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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lden Tree Apr 16. 2024

십칠 년째 계속되는 남편의 질문

장일호 '슬픔의 방문'을 읽고.

결혼생활 17년 차에 들어섰다. 

2007년 초겨울 일요일 정오. 가족과 지인들 앞에서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함께 하겠다고 아주 당당하게 맹세했다. 하지만 이렇게 오랜 기간 이 사람과 함께 살았다니 놀랍다. 길고 긴 많고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있다. 그리고 이젠 옆에 없으면 허전함을 느낄 정도로 함께하는 것이 익숙해졌다.


결혼과 동시에 워킹맘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또한 축복이지만, 그 당시에는 서운했다. 신혼의 달달함 따위는 없었기 때문이다. 결혼 생활의 단맛을 느끼기도 전에 입덧의 험난함과 유산의 두려움과 출산의 공포를 경험했다. 그리고 육아라는 전쟁 같은 일상을 마주하며 정신없이 30대를 보냈다. 워킹맘의 하루는 참 고단하다. 수시로 우울함, 두려움, 무기력, 억울함 같은 불편한 감정들이 불쑥불쑥 찾아와 내 삶을 지치게 했다. "엄마니까 참아보자, 엄마는 할 수 있다."라고 스스로에게 가스라이팅을 하며 꿋꿋하게 30대를 버텼다. 몸소 경험해 본 워킹맘의 삶은 순간순간이 어려운 과제를 건네받는 기분이었다. 짧은 시간 안에 쏟아지는 과제를 재빠르게 해결해야 하는 난이도 최상의 과제들이 매일 주어졌다.

특히 아이가 어릴 땐 예고도 없이 역대급의 과제들이 마구 주어진다. 때로는 인간의 한계치가 여기쯤일까를 느낄 정도였다.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기가 이토록 진 빠지고 힘든데, 아이를 많이 낳으라니. 저출산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킹맘으로 살며 억울하고 속상했던 순간들이 셀 수 없이 많다. 야근이 있어 가까이 사는 가족에게 아이를 맡겼다가 조금 늦은 어느 날, 세상 일은 너 혼자 다하냐는 빈정대는 말을 들어야 했고, 아픈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며 동료들의 눈치 세례 속에 어쩔 수 없이 조퇴를 해야 할 때는 속상함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런 상황이 반복될 때마다 나는 남편에게 화를 냈다.


둘이 같이 결혼해서 부모라는 이름으로 사는데 아이와 관련된 일뿐 아니라 모든 집안일의 주체는 온전히 나였기 때문이다. 남편은 조력자일 뿐이었다. 일을 앞장서서 하는 사람과 조력자는 엄연히 다르다. 마음자세부터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보니 일의 우선순위도 달라진다. 나도 일하는 여성인지라 커리어를 쌓아 인정받고 싶었지만 육아와 가사 노동은 어쩔 수 없이 나의 발목을 잡았다. 억울함에 눈물샘이 터졌고 화가 났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언젠가부터는 눈물도 화도 나지 않았다. 스스로 체념하며 여자로 태어난 게 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화를 삭히다 어린 딸에게 "너는 결혼하지 말고, 화려한 싱글 라이프를 즐겨야 된다."라고 감히 딸의 미래까지 간섭했다.




큰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고 작은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전쟁 같던 일상은 조금씩 해방기를 맞이했다. 해방의 기쁨은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선물했다. 그래서 지금은 책도 읽고 글도 쓰며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지난겨울, 우연히 들른 독립서점에서 장일호 작가의 '슬픔의 방문'을 구입했다. 나는 책을 구입할 때 표지도 유심히 보는 편이다. 표지 속 낯선 여인의 눈동자가 퍽 슬퍼 보여 책의 내용이 궁금해졌다. 내용은 재밌었고 담담하고 깔끔한 작가의 문체 덕분에 술술 빠르게 읽혔다. 책을 읽으며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살아온 나의 10대, 20대, 30대의 삶의 조각들이 문득문득 떠오르며 슬퍼졌다. 여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일들이 내 딸에게도 이어질까 두렵기도 했다.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나는 가끔 주어진 일들을 어쩔 수 없이 하며 소리 없이 궁시렁댄다. 그리고 정말 썩은 표정으로 그 일들을 마주한다. 명절에 굳이 10여 종류의 방대한 전을 왜 매번 부쳐야 하는지 어른들에게 대놓고 따져 묻고 싶지만 씩씩 거리며 전을 부친다. 매일같이 뭘 해야 하냐고 꼬치꼬치 묻는 남편에게도 썩은 표정으로 이것저것 할 일을 지시한다. 세월이 이만큼 지났으면 이젠 혼자 알아서 할 때도 됐건만, 아직까지 질문 세례를 퍼붓는 남편을 보면 한숨만 나온다. 그리고 한편으론 부럽다. 나도 먼발치에서 저 사람처럼 질문이나 하는 입장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 여자는 육아와 가사노동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 상황 자체가 싫다. 예전에 비해 여성의 권리가 많이 신장되긴 했어도 아직도 갈길이 멀다고 생각한다.


장일호 작가는 결혼 생활에 대한 나의 불만을 거침없이 표현해 줬다. 작가의 글을 읽으며 속이 시원했다. "맞아, 내가 하고 싶던 말이 이거네."라고 생각하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작가의 용기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그의 문장을 소개한다.


'슬픔의 방문' 표지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좋은 시댁을, 좋은 남편을 만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걸 '운'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내가 싸워서 얻어 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싸울 수 있었던 건 동료 여성들 덕분이라는 걸 잊지 않으려 한다.
결혼이 착취의 동의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는 여자들이 열고 있다.

(슬픔의 방문, p.152-153)











착취란, 계급 사회에서 생산 수단을 소유한 사람이 생산 수단을 갖지 않은 직접 생산자로부터 그 노동의 성과를 무상으로 취득함. 또는 그런 일을 의미한다.(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착취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이 강하긴 하지만 결혼은 아직까지 여성의 잠재적 능력을  포기하게 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여성들이 불편한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비교적 평등한 가정에서 자랐다. 80년생인 나는 그 시절 팔불출 소리를 듣는 아빠 밑에서 컸다. 아빠는 늘 엄마를 도왔고 우리와 함께 잘 놀아줬다. 나는 세상 모든 아버지는 우리 아빠 같은 줄 알았다. 하지만 아빠의 이런 모습을 빈정대듯 조롱하는 주변 어른들의 말과 행동을 눈치챌 즘, 우리 아빠가 다른 아빠들과 다름을 깨달았다. 아빠의 용기 있는 선택은 내 유년시절을 풍요롭게 해 줬다. 하지만 아빠로 인해 결혼 후, 시댁에서 맞이하는 첫 명절은 몹시 어색하고 불편했다. 그리고 슬펐다. 나를 포함한 여자들만 분주하게 움직이는 분위기가 낯설었다. 그때 첫 부부싸움이 시작됐다.




80년생인 나는 받지 못했지만, 90년생부터는 아마도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양성평등교육을 의무적으로 받고 자란 세대일 것이다. 이 세대에게 어느 한쪽의 일방적 희생을 담보로 하는 결혼 생활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과 착취로 인한 결혼 생활은 행복할 수 없다. 가끔 예전 여성의 삶과 현재 여성의 삶을 비교하며 이만하면 여자들도 잘 살고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물론 과거와 비교했을 때 맞는 말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세상만사는 미래지향적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굳이 여성의 가사 노동과 여성의 역할에만 과거지향적이 되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아이를 키우며 바지런히 사는 30대 직장동료가 내가 30대 때 겪었던 직장생활과 육아와 가사노동의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 딸이 어른이 되었을 때 일과 육아와 가사노동의 균형을 잘 잡아 행복하고 즐겁고 가볍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그런 날이 꼭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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