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스토리
단숨에 날아가버린 식서스의 홈코트 어드밴티지. 이제 'The Answer'가 응답할 차례였다. 1차전의 영웅 레지 밀러는 2차전에서도 41점을 퍼부으며 맹활약했지만, 아이버슨이 45점으로 응대하며 식서스의 손쉬운 승리를 이끌어낸다. 포스트 게임 인터뷰에서 아이버슨은 디테일하고 유연한 'IN-GAME' 전략을 구사한 래리 브라운 감독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오프시즌부터 서로 으르렁대며 치고받았던 이 둘의 관계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엿볼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분위기 반전에 성공한 식서스는 원정에서 펼쳐진 3, 4차전을 내리 잡아내며 시리즈를 3승 1패로 마감한다. 지난 10년간 동부 콘퍼런스의 강호로 군림해온 팀을 물리친 순간이었다. 평균 46분(!)의 출전시간과 더불어 31.5점을 기록한 아이버슨의 개인 성적도 훌륭했지만, 경기당 14.8개의 리바운드와 4.5개의 블락을 기록한 디켐베 무톰보의 림 장악력 역시 눈부시게 빛났던 시리즈였다. 아울러 식서스의 롤 플레이어들은 소름 끼치는 질식수비를 시전하며 페이서스에게 시리즈 평균 40% 미만의 야투율을 허용, 개인 기록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부문에서 빛을 발하며 완벽한 조연 역할을 수행한다.
"페이서스를 넘어서는 순간, 나는 우리가 우승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I knew we were going to win the championship once we got by the Pacers."
- 앨런 아이버슨, 'All The Smoke' 팟캐스트 중 -
90년대 동부 콘퍼런스 전통 강호인 인디애나 페이서스와 뉴욕 닉스를 각각 무찌르고 2라운드에서 마주친 식서스와 랩터스. 이 시리즈는 NBA 세대교체를 알리는 신호탄인 동시에, 밀레니엄을 대표하는 슈퍼스타 빈스 카터와 앨런 아이버슨의 매치업으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2001 올스타 팬 투표에서 카터와 아이버슨이 각각 동부 1, 2위로 선정된 점을 감안하면 부연설명이 필요 없는 'MUST SEE TV'였다. 또한, 카터와 아이버슨의 대조되는 젠틀맨 및 악동 이미지 때문에 코트 외적인 부문에서도 흥미를 끌었던 대결이었다.
시리즈는 1차전부터 접전이었다. 경기 내내 겨우 50초만 쉬면서 36점을 기록한 카터. 31초만 쉰 아이버슨 역시 35점으로 맞대응했지만, 고작 32%에 그친 야투율은 아쉬움을 남겼다. 식서스는 두 라운드 연속으로 값진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1차전부터 헌납한 채 시리즈를 시작한다.
2차전. 경기 내내 박빙의 스코어가 유지되는 가운데, 아이버슨이 연속 19점을 포함해 무려 54점*을 뿜어내며 팀을 승리로 이끈다. 식서스 홈 관중은 기절 직전의 광분 상태. 아이버슨을 제외하고 두 자릿수 득점을 달성한 식서스 선수는 오직 에릭 스노우 단 한 명뿐이었다.
* 랩터스의 포인트 가드이자 아이버슨의 메인 디펜더였던 앨빈 윌리암스는 훗날 DIME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2차전 종료 후 본인이 느꼈던 무기력함에 대해 회상하며, 시리즈가 끝날 때까지 모든 외부 연락을 차단한 채 오로지 어떻게 하면 아이버슨을 더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만 연구했다고 밝힌 바 있다.
토론토의 홈구장 에어 캐나다 센터(현 스코시아뱅크 아레나)로 무대를 옮긴 3차전. 롱 삭스와 더불어 나이키 샥스 BB4 농구화를 착용한 빈스 카터의 커밍아웃 파티가 열린다. 무려 9개의 3점을 성공시키며 NBA 플레이오프 신기록*을 수립한 그는 50점을 퍼부으며 랩터스의 24점 차 대승을 이끈다.
* 이 기록은 2016년 클레이 탐슨이 11개의 3점 슛을 성공시킬 때까지 무려 15년간 유지된다.
다시 식서스의 홈구장으로 돌아온 시리즈. 5차전 시작에 앞서, 아이버슨은 당시 NBA 커미셔너였던 데이비드 스턴으로부터 정규시즌 MVP 트로피를 전달받는다.
"이 경기장에 들어올 때마다 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를 듣는다. 바로 여러분의 목소리다. 이제 여러분이 이 노래를 들려줄 차례다."
"Everytime I come into this arena, I hear my favourite song. It's your voices. Now it's time for y'all to play that song."
- 앨런 아이버슨, MVP 트로피 수여식 스피치 중 -
다소 느끼한(?) 아이버슨의 스피치에 팬들은 광분하기 시작했고, MVP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3점 8개를 포함해 52점을 기록한 아이버슨은 경기를 지배하며 이 시리즈에서 가장 일방적인 경기 스코어를 완성시킨다. 식서스 121 : 88 랩터스. 언론의 관심사는 이제 아이버슨의 힙합 앨범이나 헤어 스타일이 아닌 그의 다이내믹한 경기력이었다.
시리즈 내내 랩터스의 피지컬한 견제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던 아이버슨은, 찰스 오클리와의 볼 경합 과정에서 이미 타박상을 입은 상태였던 왼쪽 허리에 다시 충격을 받으며 고통을 호소한다. 부상의 여파로 전매특허인 돌파력에 제동이 걸린 아이버슨에게 래리 브라운 감독은 '패싱 게임'을 주문했고, 이에 아이버슨은 식스맨 애론 맥키를 비롯한 식서스 동료들의 득점력을 살리는데 집중한다. 결과는 커리어 하이 16개의 어시스트. 이기주의의 대명사 'Me, Myself and I-verson'이 결정적인 순간에 이타적인 플레이를 펼치며 팀을 승리로 이끄는 모습은 그를 싫어하던 수많은 안티팬들에게도 크나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반면, 빈스 카터는 아이버슨의 부상에 따른 경기력 저하를 본인이 빛날 기회로 살리는데 실패하고 만다. 7차전 당일 아침 모교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 본교에서 열린 졸업식에 참석하며 논란을 빚었던 그는, 경기 종료 2초를 남기고 시도한 회심의 시리즈 위닝 점프샷을 놓치면서 고개를 숙인 채 무대에서 퇴장한다.
스타파워. 경기력. 노이즈 등 모든 면에서 팬들의 기대치 이상의 결과를 낳은 식서스-랩터스 시리즈. 아이버슨과 카터의 맞대결은 훗날 블리처 리포트에서 선정한 'NBA 역대 최고의 플레이오프 슈퍼스타 매치업' 시리즈에서 당당히 3위*에 이름을 올린다.
* 1위 1988년 래리 버드 vs. 도미닉 윌킨스, 2위 1984년 아이재이아 토마스 vs. 버나드 킹
시리즈 시작에 앞서 대다수의 전문가들이 벅스의 우위를 점쳤던 이유는 간단했다. 벅스 로스터에는 언제 어디서든 20점을 뽑아낼 수 있는 선수들이 4명(레이 앨런, 글랜 로빈슨, 샘 카셀, 팀 토마스)이나 있었지만, 식서스의 경우 아이버슨을 지원할 선수들의 실력이 'not good enough'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디켐베 무톰보를 제외한 식서스의 나머지 선수들은 시즌 내내 아이버슨이라는 슈퍼스타의 그림자에 철저히 가려져 있었다.
당시 NBA 2년 차였던 식서스의 주메인 존스는 대학 시절에는 득점 머신으로 명성을 날렸던 선수였지만, 식서스에 합류한 뒤에는 새로운 역할을 찾아 나서야 했다. The Sixer Sense와의 인터뷰에서, 존스는 첫 번째 팀 훈련에서 브라운 감독이 그에게 전한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득점 외에 다른 부분에서 기여할 방법을 찾아라. 우리 팀의 'LITTLE GUY'가 슛을 50번씩 쏠 테니까."
첫 두 경기에서 1승 1패를 주고받은 식서스와 벅스. 하지만 랩터스 시리즈부터 허리 부상을 달고 뛰던 아이버슨이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며 결국 3차전에 불참하게 되고, 식서스의 '다른 선수들'은 자기 자신을 증명할 기회를 얻게 된다. 비록 3차전의 결과는 패로 기록되었지만, 식서스의 롤 플레이어들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싸우며 경기 내내 박빙의 스코어를 유지한다. 특히 무톰보(손가락 골절), 스노우(발목 피로골절), 맥키(회전근개 부상) 등 대부분의 선발 선수들이 부상을 안고도 투혼을 발휘하면서 팬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4차전부터 코트로 복귀한 아이버슨이 극심한 야투 부진에 시달리는 가운데, 팀을 이끈 선수는 디켐베 무톰보였다. 그는 4차전에서 17점 15리바운드 4블락, 5차전에서 21점 13리바운드 2블락을 기록하며 팀의 2연승을 견인, MVP의 부진을 메우는 데 성공한다.
6차전이 열린 벅스의 홈구장 브래들리 센터. 레이 앨런의 슈팅 강습이 열린다. 소름 끼치는 17-0 런을 홀로 기록하며 기선제압에 성공한 레이 앨런의 벅스는 전반전에 점수차를 33점까지 벌리며 식서스의 수비를 초토화시킨다. 그런데 후반전에 가비지 타임이 아닌 식서스의 매서운 추격이 시작된다. 아이버슨은 시리즈 내내 지속되던 슈팅 슬럼프에서 벗어나 4쿼터에만 무려 26점을 몰아넣으며 경기를 다시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하지만 결국 역전에는 실패하며 최종 스코어는 벅스 110 : 100 식서스.
[심판 콜 논란]
7차전 시작에 앞서 미디어와 팬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던 다른 이슈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화자 되는 심판 콜 논란이다. 시리즈를 통틀어 양 팀의 자유투 시도 개수는 식서스 183 : 120 식서스. 테크니컬 파울 개수 식서스 3 : 12 벅스. 플레그런트 파울 개수 식서스 0 : 5 벅스. 4차전까지 자유투를 단 한 차례도 시도하지 못했던 글랜 로빈슨은 결국 불만을 폭발시키며 4차전 막판에 퇴장을 당했고, 레이 앨런과 죠지 칼 감독은 6차전 포스트 게임 인터뷰에서 일방적인 심판 콜을 강력히 비난하며 사무국으로부터 벌금 조치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에 더해 6차전 중 아이버슨에 대한 스캇 윌리암스의 파울이 경기 종료 후 플레그런트 파울 I에서 II로 업그레이드되면서 윌리암스는 최종 7차전에서 출전 불가 처분을 받는다. NBA의 역사에서 매년 빠짐없이 등장하는 심판 콜 논란은 2001년에도 존재했다.
"리그는 우리가 아닌 필라델피아가 LA의 결승 상대팀이 되어야 더 높은 수익을 올린다는 걸 알고 있다."
- 레이 앨런, AP 인터뷰 중 -
각종 논란 속에 펼쳐진 7차전은 일방적인 식서스 108 : 91 벅스 스코어로 막을 내린다. 슈팅 슬럼프를 완전히 극복한 아이버슨은 50%가 넘는 야투율과 함께 44점을 꽃아 넣으며 모든 논란을 잠재웠고, 무톰보는 무려 19개(!)의 자유투와 함께 23점 19리바운드 7블락을 기록하며 벅스의 골밑을 초토화시켰다. 식서스는 1983년 이후 18년 만에 결승행 티켓을 거머쥐며 동부 콘퍼런스의 챔피언 자리에 등극한다.
- 앨런 아이버슨, 프리 게임 인터뷰 중 -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골리앗의 선방으로 시작된다. 레이커스는 1쿼터 초반부터 16-0 런을 기록, 18-5로 앞서가며 기선제압에 성공한다. 하지만 식서스는 1쿼터 막판 17-5 런을 바탕으로 추격을 가한다. 팽팽하게 이어지던 경기에 아이버슨은 2쿼터 마지막 4분간 15점을 몰아넣으며 전반전에만 30점을 기록, 소름 끼치는 핫 핸드를 선보인다.
3쿼터에 점수차를 12점까지 벌리며 달아나는 듯했던 식서스. 이에 레이커스는 샤킬 오닐을 집중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올해의 수비수' 디켐베 무톰보를 상대로 오닐은 짐승 같은 인유어페이스 덩크를 연달아 꽃아 내리며 경기를 다시 팽팽하게 만든다. 오닐의 1차전 기록은 44점 20리바운드.
후반전에 경기가 접전을 계속한 이유 중 하나는 아이버슨의 핫 핸드가 어느새 잠잠해졌기 때문이었다. 레이커스의 필 잭슨 감독은 하프타임 이후 무명의 타이론 루*를 아이버슨 전담 수비수로 기용하기 시작하는데, 잭슨이 띄운 승부수가 놀라운 효력을 발휘하면서 아이버슨의 리듬을 무너트리는 데 성공했다. 루의 악착같은 디나이 디펜스와 빠른 발은 레이커스가 도움수비 없이 아이버슨을 방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 실제로 아이버슨과 흡사한 체구와 스피드를 갖춘 타이론 루는 레이커스 팀 훈련에서 아이버슨의 역할을 자처하며 레이커스 선수들이 맞춤형 수비를 연습할 수 있도록 도운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된 바 있었다.
"아이버슨이 오늘 타이론 루의 꿈을 꿀 것 같은데요?"
"Iverson, will he be dreaming about Tyronne Lue tonight?"
- 마브 앨버트, NBA ON NBC 경기 해설 중 -
경기 종료 2분 전. 식서스 92 : 92 레이커스. 샤킬 오닐의 파워풀한 원핸드 슬램과 함께 식서스 92 : 94 레이커스. 맞은편에서 에릭 스노우가 탑에서 시작된 돌파를 레이업으로 마무리하며 스코어는 94 : 94로 동점. 양 팀이 추가적인 득점 없이 4쿼터를 끝내며 경기는 연장전에 돌입한다.
치열한 공방이 오고 가는 가운데, 타이론 루가 다소 무리한 레이업을 시도하다가 밸런스를 잃고 바닥에 쓰러진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속공에 나선 식서스의 애론 맥키가 왼쪽 45도 3점 라인 앞에 서 있는 아이버슨에게 패스한다. 아이버슨의 3점은 깨끗하게 림을 통과하며 스코어는 식서스 101 : 99 레이커스. 남은 시간은 1분 19초. 이어진 포제션에서 릭 폭스의 오닐을 향한 롭 패스가 그대로 관중석까지 뻗어 나가면서 다시 식서스 볼.
경기 종료 51초 전. 코트 오른쪽 코너에서 볼을 전달받은 아이버슨. 후반전부터 자신을 괴롭히던 타이론 루와의 아이솔레이션. 이번 포제션에서 식서스가 득점에 성공하면 투 포제션 게임이 되는 상황.
사실 아이버슨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 같았다. 성사 직후 불발이 되어버린 오프시즌 트레이드. 시즌 내내 이어진 브라운 감독과의 불화. 힙합 앨범 가사 때문에 붉어진 여성 및 동성애자 비하 논란. 하나같이 NBA 평균 이하라는 오명 아닌 오명에 시달리는 동료들. 그리고 뛰어다니는 것 자체가 신기하게 여겨질 만큼 수도 없이 많은 본인의 부상. 하지만 아이버슨이 득점에 성공한다면, NBA 역대 최고의 플레이오프 팀을 그들의 홈구장에서 격파하는 소름 끼치는 시나리오가 완성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목격한 그 장면은 전설이 되었다.
- THE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