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다 Jan 13. 2021

내재된 불안 속에서

에드워드 양,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牯嶺街少年殺人事件, A Brighter Summer Day, 1991, 대만, 237분


 에드워드 양의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1991년도 작품으로, 최근 한국에서 다시 개봉되었다. 러닝타임이 무려 4시간에 육박하는 아주 긴 영화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개봉소식이 알려지자마자 나는 이 영화를 봐야 한다는 묘한 확신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그도 그럴만한 게, 이 영화는 그저 매력적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에 무리가 있는 영화다. 간단한 몇 가지 단순화된 소감만으론 불가능하다. 총체적이고 다층적이며 감각적이고 사실적이다. 갖은 수사들을 붙여도 좋다. 어떤 수사든 허용 가능한 영화이리라.


 에드워드 양은 1980년대 대만 뉴웨이브를 이끌었던 감독으로 평가된다. 영화는 1960년 대만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대략적 사전지식이 수반된다면 영화를 이해하기 쉬워질 것이다. 혹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어질 것이다. 타이완은 1885년 하나의 성(省)으로 독립하였고, 청일전쟁 뒤 일본 최초의 해외 식민지가 되었으며, 1949년 중국공산당과의 내전에 패배한 국민당의 장제스 정권이 이전해 와 성립된 국가이다. 즉, 이 영화는 그리고 10년 후가 배경이 된다. 1950,60년대 대만은 미국의 원조로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어 나가는 동시에, 내부적/외부적 긴장상태가 극에 달해 있던 시기였다. 그 팽팽한 시기를 시간적 배경으로 삼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영화의 곳곳에 일본식 가옥이 존재하고 탱크가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 옆으로 굉음을 내며 지나간다. 그 장면들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러닝타임 내내 당시 대만의 시대 상황과 분위기를 알려줄 수 있도록 지나간다.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시대적 배경과 그로 인해 형성된 심리를 간략하게 몇 줄로 축약한다.


이 험난한 시기에 자라난 아이들에게는 부모 세대의 불안감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동류의식을 찾아 거리의 패거리를 규합하고 서로의 안전을 도모했다.


 영화의 엔딩을 본 후에 어쩌면 이 문장들이 영화 그 자체였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영화 속 축이 되는 인물인 14살 소년 샤오쓰가 국문점수를 낮게 받아, 야간 중학교로 가게 되는 것이 이야기의 시작이 된다. 불안으로 가득 찬 아이들은 집단을 형성하고, 내재되어 있던 불안을 폭력으로 표출한다. 나와 뜻이 다른 집단을 어떻게든 끝내야 본인들의 안전이 보장 받는다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불안이라는 건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흔들리는 다리 위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은 불안에 좀먹히고 이내 불안 그 자체가 된다. 그에 비해 샤오쓰는 고요하고 차분한 아이로 비추어진다. 말이 없고 시종일관 책을 읽어내며 휩쓸리듯 흘러간다. 샤오쓰가 가지고 있는 특성은 관찰에 가깝다. 영화촬영장을 몰래 엿보거나 보지 않는 듯 어떤 장면을 곁눈질하고 있다. 관찰은 숨을 죽인 작업이다. 그 고요는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조금도 예상할 수 없게 만듦과 동시에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불안을 형성시킨다. 샤오쓰 또한 대만으로 피난 온 가정의 소년이라는 사실을 에드워드 양은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샤오쓰의 말과 표정이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바로 우연히 양호실에서 밍이라는 소녀를 만나게 되는 순간이다. 샤오쓰는 또한 자연스럽게 밍에게 사랑에 빠진다. 자신의 비밀스러운 공간과도 같았던 영화 촬영장의 한 공간으로 밍을 들인다. 그리고 그곳에서 영화 감독과 마주친다. 감독은 밍의 얼굴을 마음에 들어 하고, 카메라 테스트를 제안한다. 그 장면은 밍이 어떤 인물인지 설명해주는 간략한 시퀀스이기도 하다.

 후에 밍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카메라 앞에 선다. 웃으라는 말엔 웃고, 울라는 말엔 기꺼이 울어준다.


 샤오쓰는 밍이 가진 전사를 전혀 알지 못한 채 밍에게 빠졌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마음을 짓눌러야만 했는데, 밍의 주위엔 고작 샤오쓰가 들어서기에 버거운 사건들이 많았다. 밍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서 남성들에게 매력적인 소녀로 비추어진다. 밍을 가지기 위해 남성들은 본인들만의 전쟁을 치루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를 죽였다가 도피해 있기도 한다. 물론 밍은 자신에게 호감을 비추는 남성들을 굳이 거절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받아들인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유달리 깊은 애정을 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혐오감과 불쾌감, 그들의 태도에 대한 무력감을 비춘다. 우습지 않나. 굳이 밍이 갈등과 폭력을 주도한 적도, 어떤 선택을 한 적도 없는데 모든 폭력은 밍을 배제한 채 발생되곤 했음이 말이다. 은근한 구애들과 직접적 구애들. 오히려 그것이 밍에겐 폭력이었다. 폭력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밍이 그런 시선들을 너무 지루하고 고루하게 느끼는 것부터가 그렇다. 한 소녀의 일상은 남성들의 성적이고 집착적인 시선들에 묶여 있다. 샤오쓰 또한 그녀를 결박하게 만든 인물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더 명확히 말하자면, 샤오쓰야 말로 밍을 완전한 결박상태로 만든 인물이다.


 이 영화의 서사는 곁눈질을 하거나 숨어들기 바빴던 외곽의 샤오쓰가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되는 과정을 매끄럽게 보여준다.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듯. 어쩔 수 없었다는 듯이 말이다. 샤오쓰는 점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대체로 그 과정은 폭력적이다. 국문점수를 낮게 받아 주간학교에서 야간학교로 가게 되었던 샤오쓰가 정학을 당하게 되고, 후엔 퇴학까지 당하게 된다. 사실 돌이켜 보자면 자연스러운 일과 어쩔 수 없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샤오쓰 뿐만이 아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에게 묘한 불안이 잠재되어 있다. 도박에 빠진 형이나 종교에 빠진 누나. 무언가에 깊이 몰두하지 않으면 불안을 떨치기 힘들다.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감각을 지울 수 없고 언제고 그 예감은 어떤 식으로든 들어맞는다. 공무원으로 일하던 샤오쓰의 아버지는 라디오를 듣거나 책 읽기를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샤오쓰의 아버지는 하루 아침에 좌익으로 몰려 고문을 당하게 된다. 결국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하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아버지는 눈에 띄게 약해지고 정신적으로 이상증세를 보이기도 하다. 본인 하나 지키기 힘든 시국에 누군가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얼핏 꿈 같기도 하고 욕심 같기도 하다. 어느 것 하나 지키지 못한 채 본인을 갉아먹히는 사람들이 이 영화의 전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보는 이들을 그 욕심 같은 꿈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끊임없이 희망을 가지게 됐을 것이다. 이 답답하고 도무지 어디로 흘러가게 될 것인지 알 길이 없는 영화를 보면서도, 불행이 중첩되는 와중에도 영화가 안온한 결말을 맞아주길 바라게 됐을 것이다. 사람들은 당연히 해피엔딩을 향해 나아가려 하는 경향이 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란 확연한 영화의 제목마저 외면한 채 희망을 잃지 않으려 한다. 에드워드 양은 잔인하리 만큼 희망의 작은 불씨 조차 드러내지 않는 감독이다. 그 무겁고 어두운 침묵 때문에 그럴 일 없을 줄 알면서도 희망을 품게 된다. 그렇게라도 해야 이 영화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누구도 행복한 결말이 아닐 줄 알면서도.


 샤오쓰는 퇴학 직후 미래를 꿈꾼다. 시험을 쳐서 무사히 주간학교로 들어가겠다고 당당히 말한다. 밍에게 합격하기 전까지 만나지 않겠다는 선언도 한다. 그러나 그 각오가 무색하리 만큼 샤오쓰는 쉽게 의지를 저버린다. 대단한 포부를 가졌다 해도 우리는 쉽게 저버리고, 져버리지 않는가. 샤오쓰도 그랬다. 늘 그랬듯이 샤오쓰는 언제나처럼 우리처럼 쉽게 휘둘리고 쉽게 포기하고 쉽게 나가떨어지면서도 불안했을 뿐이었다. 총체적인 불안 속에 샤오쓰가 존재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이 존재했다.


 샤오쓰는 좋은 소년이었을까. 그런 소년이었던 시절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샤오쓰는 최선을 다해 좋은 소년인 척 했다. 그는 본인이 보기에 그르고 타락한 듯 보이는 소녀들을 쉽게 바꿀 수 있다고 여긴다. 이 모든 불안 속에서도 젠더권력이 들어 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 등장하는 수많은 여성들은 남성의 부수적인 존재처럼 여겨진다. 영화의 젠더감수성이 모자라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 영화 속 여성캐릭터들이 주체적이고 단단하다 여긴다. 그들은 일을 하고 싶어하고 공부를 하고 싶어하며 불쾌와 호의를 명확히 드러낸다. 다만 이 영화 속 남성캐릭터들이 모자라고 편협한 시선을 가진 채 여성을 대한다. 샤오쓰도 마찬가지다.


 불안과 분노가 분리되지 못한 채 하나의 얼굴이 되었을 때, 샤오쓰는 더 이상 좋은 척 조차 불가능한 소년이 되었다. 고작 소문 때문이었다. 자신의 친구인 샤오마와 밍이 연인 사이라는 확인 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말 뿐인 소문이 샤오쓰를 극한 분노로 내몬다. 샤오쓰는 샤오마를 찾아가 분노를 드러낸다. 우스운 건 샤오쓰의 오만이다. 밍은 수많은 남성들에게 대상화 되어왔다. 그런 밍을 사랑하게 된 샤오쓰는 아마도 자신이 다른 남자들과 다르다 여겼던 듯하다. 본인이 밍을 바꾸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 확신하는 오만이 샤오쓰에게 있었다. 그 오만은 비겁하고 유약하다.


샤오쓰는 샤오마를 죽이기 위해 칼을 들고 학교 앞을 서성인다. 그러나 정작 죽이려던 샤오마는 만나지 못하고 밍과 마주치게 된다. 밍은 샤오쓰가 샤오마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지친 기색을 보인다. 밍에겐 이미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 죽는 걸 본 경험이 있었다. 샤오쓰는 그런 밍에게 "나만이 네 편이야. 나만이 네 희망이야"라고 말한다. 밍은 반복되는 악몽 속에서 분노한다.


네가 날 바꾸겠다는 거야? 남들처럼? 너도 남들과 마찬가지야.
날 바꾸겠다고? 내 세상이 있는데 그걸 바꾼다고? 네가 뭔데?


샤오쓰는 샤오마를 죽이지 못한다. 대신 밍에게 칼을 수차례 찔러 넣는다. 이상하지 않나. 샤오마 '대신' 밍에게 칼을 찔러넣는다는 것이. 사실 살인을 하기로 마음 먹는 것 자체가 정상적이진 않다. 그러나 이 우발적인 살인은 상대가 자신보다 약하다 여겨지는 밍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남들과 다를 거라 여겼던 스스로를 부정 당했다는 분노만으로도 그저 살인이 가능했던 것이다. 거부와 부정을 견디지 못한 결과가 살인이라니. 현 사회에도 끊임없이 터져나오는 문제이기에 쉽게 지나칠 수 없없다. 깊이 남는다. 우발적으로, 라는 말에 깊은 반감과 불쾌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에드워드 양은 살인에서 영화를 끝내지 않는다. 조금 더 나아간다. 자기중심적인 인간과 그 이기심을 보여준다. 샤오마는 "하나 뿐인 친구였는데" 라고 말하며 울음을 터트린다. 죽은 밍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살인을 저지른 샤오쓰를 향해 있는 말이다. 아무도 밍을 애도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 영화를 본 이들이 밍을 애도하게 된다. 끝내 자신의 세상을 손에 쥘 기회를 얻지 못한 밍을.


  237분. 과연 길었던 것일까. 대만의 역사와 그 시대 사람들, 인간의 교묘한 심리와 세상을 바라보는 비판주의와 섬세한 장면들. 뚝뚝 떨어트렸다가 순식간에 결말부에서 파편을 감싸 쥔다. 그와중에도 영화에 대한 물음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샤오쓰는 영화 속 감독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물음은 감독 본인에게 건네는 것이자,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것이기도 하다.


자연스러워? 진짜랑 가짜 구분도 못 하면서 영화를 찍는다고? 뭘 찍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해?


 길지 않은 4시간이었다.

 덧붙이자면 이 영화 속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죽음의 정치성 그리고 당신을 위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