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보통 Jan 11. 2024

3분 46초의 눈물

  같은 공간에서 살고 있는 동생과 나는 음악이 필요할 때 이어폰을 끼고 혼자 듣거나, 스피커로 틀어서 같이 듣곤 한다. 같이 음악을 듣는 때에는 그 애가 주로 선곡을 한다. Sugar sugar - Deja ve, French kiwi juice - Tadow, Cigarettes after sex - k 같이 진한 바이브의 음악을 튼다. 가끔은 수민 - 너네 집,  Sun rai - Sanfrancisco street 느낌의 곡도 등장한다. 장르 가림 없이 이 곡 저 곡 틀다가 어떤 곡에 꽂히면 "언니, 이거 너무 좋지 않아?!"라면서 계속 그 곡만 재생한다. 다행히도 그 애랑 나는 음악 취향이 같다. 어떤 걸 틀어도 괜찮다. 싫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렇지만 아무리 좋아하는 곡이라도 한 번에 열 번 넘게 반복해서 들으면 짜증 난다. "야, 이건 너무 한 거 아니야? 좋긴 한데 다른 곡도 좀 틀어봐." 금세 의기소침해진 그 애는 "끝나면 다음 곡 틀게."라면서 플레이 리스트를 뒤적인다. 자기만 들리는 상황에서는 자기가 듣고 싶은 곡을 몇 번이고 듣든 상관없다. 두 명 이상이 있는 한 공간에서 다 같이 들리게 음악을 틀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우리는 같이 음악을 들을 때 이런 일이 종종 있곤 했다. 그래서 각자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기 싫을 때 서로에게 물어본다. "나 음악 틀어도 돼?"


  그날 밤도 그랬다. 이층 침대에 누워서 "음악 들을래?"라고 그 애가 조용히 물었다. "그래." 나도 음악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같이 듣는 첫 곡의 첫 소절이 나오자마자 거짓말처럼 무언가가 마음을 때렸다. '내 곁에만 머물러요, 떠나면 안 돼요. 그리움 두고 머나먼 길 그대 무지개를 찾아올 순 없어요.' 이문세의 소녀를 오혁이 커버한 버전이었다.


  소녀를 내가 언제 처음 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소녀를 어느 순간마다 들었는지는 기억난다. 애인과 같이 누워있는 침대에서 갑자기 외로워졌을 때 그의 발 위에 포갰던 내 발을 치우며 들었고, 술에 취하고 싶었지만 취하지 못했던 아쉬운 밤에 길동무로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차인 날 사무치게 그리워서 들었고, 내가 얼마나 외로운지 잘 모르겠지만 기분이 적적할 때마다 들었다.


  소녀의 마지막 가사가 스피커에서 몇 번이고 나왔고 일곱 번쯤 반복됐을 때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처음으로 내 방 이층 침대에 누워있는 저 애에게 "이제 그만 다른 곡을 틀지 그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곡이 나올까 봐 내심 조마조마했다. 듣고 또 듣고 싶어서. 나도 표현할 수 없던 내 마음이 저기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 대신 저 노래가 울고 있었다.


  울고 싶을 때 우는 사람은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다. 눈물은 모든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사람은 외로워서만 우는 게 아니라 기뻐서 울고, 화나서 울고, 안심해서 운다. 나는 잘 우는 사람이다. 차오르는 눈물을 목구멍으로 삼키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지만 요 며칠은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아서 괴로웠다. 한바탕 울고 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 울지 못하는 나 자신이 너무 힘들었다. 뭐가 잘못됐길래 울지 못할까? 그동안 잘 울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속 어딘가가 고장 난 거라고 여겼다. 눈물은 자기를 치유하는 방법이니까. 나는 울음으로 나를 위로하고 싶은데, 가슴속에 돌덩이를 밀어내고 싶은데 거울 속에 내 얼굴은 아무 일도 없는 사람 같아 보였다. 그런 내가 너무 싫었다.


  마음이 땡볕에 갈라진 논바닥처럼 쩍쩍 마르고 있던 중에 M이 생각났다. M은 잘 울지 못하는 애였다. 영화를 보다가 슬퍼서 찔끔 울거나, 편지를 받고 감동받아서 눈가가 붉어지는 나를 보면 당황했다. 자기는 잘 울지 않는다고, 우는 사람을 보면 어쩔 줄 모르겠다고 했다. "엉엉 크게 울어본 적 없어?" 로제크림 파스타를 먹다가 의아해서 포크를 내려놓고 M에게 물었다. "기억이 안 나." 하이볼을 홀짝이며 덤덤한 표정으로 M이 말했다. "마지막으로 운 게 언제야?", "글쎄…?"  M은 그마저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누군가가 내게 최근에 운 게 언제냐고 묻는다면 언제, 몇 시쯤에 어디서, 왜 울었는지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그때는 M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의 나는 M같이 울기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울지 못했다.


  눈물이 잘 나지 않는 사람들은 무엇으로 자기를 위로할까? 울고 싶을 때는 눈물만이 최고의 위로가 아닌가? 눈물이 안 나면 이 공허한 마음을 무엇으로 달래야 하지? 슬픈 음악을 들으면 감정이 북받쳐 오르지 않을까 싶어 처량한 음악을 들었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날 밤도 눈물이라는 숙제를 안고 잠들 뻔한 날이었다. 3분 46초의 우연이 아니었더라면.


  소녀는 1985년 11월에 발매된 이문세 앨범 <난 아직 모르잖아요>에 수록된 곡이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에 먼저 나온 노래다. 중학생 때 처음 들은 이후로 지금까지 셀 수 없이 소녀를 들었다. 머릿속에 익숙한 멜로디와 가사인데 그날 밤은 3분 46초가 몇 번이고 반복되어도 처음 듣는 것 같았다.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듣는 시절이었다면 아마 필름이 늘어질 때까지 들었을 거다.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속에 그대 외로워 울지만 나 항상 그대 곁에 머물겠어요. 떠나지 않아요.'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위로였다. 눈물 없이 우는 나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 나는 울고 있었구나.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해서 울지 않는 게 아니구나 깨달은 순간 그제야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어깨가 파르르 떨리고 작은 눈물이 트였다.


  그날 이후에도 여전히 나는 엉엉 크게 울지 못한다. 장대비같이 울고 한 번에 모든 시름을 날리고 싶지만 그건 욕심 같다. 지금은 이슬비 정도의 눈물로도 괜찮다. 그만큼도 울 수 없을 때도 괜찮다. 눈물이 나지 않는다고 마음이 고장 난 건 아니니까. 어쩌다 의심이 드는 밤에는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음악을 들으면 된다. 오늘 밤은 내가 이층 침대에 누워있는 동생에게 음악을 틀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날 밤처럼 반복해서 소녀를 들었다. "졸리니까 이제 그만 듣자." 그 애가 말했다. 나는 스피커를 끄고 이어폰을 꼈다.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창 너머로 푸른 새벽녘 빛이 들어와 있었다. 오늘도 무사히 지나갔다. 날이 밝았으니 이제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귓가에는 꺼지지 않는 3분 46초가 영원처럼 흐를 것이다.



2020년 5월 5일 씀.

keywor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