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여행기
'성스러운 물'을 뜻하는 청수사(淸水寺)로 불리는 사찰 기요미즈데라. 무려 778년에 세워져 12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교토에는 2000개가 넘는 사찰과 신사가 있는데 그중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은 17군데이며 기요미즈데라 역시 1994년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이다. 가파른 절벽의 끝에 세워진 기요미즈데라의 본당은 못을 사용하지 않고 건축한 사찰로 유명하다. 사진으로 가장 많이 찍히는 본당의 '부타이'는 무대를 의미하는 말이고, 그 부타이를 받치는 구조물이 못 없이, 가로 세로로 엮은 나무만으로 만들어졌다. 높이는 13m, 건물 4층 정도의 높이다. 사찰에 무대가 있는 이유는 본당에 모신 십일면 천수관세음보살에게 바치는 공연을 위해서라고 한다. 지금은 사찰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북적이고 있다.
기요미즈데라가 세워지게 된 일화가 궁금해져서 찾아보았더니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었다. 어느 날 승려 겐신의 꿈에 하얀 옷을 입은 노인이 찾아와서 "남쪽 지방을 떠나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겐신은 계시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북쪽으로 향하다가 교토 오토와 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포를 발견한다. 그곳에서 금욕을 하며 수행하던 교에이코지 신부를 만났는데 그가 겐신에게 신성한 나무를 주며 "이 나무를 천군만마의 관음상으로 조각하고, 이 신성한 장소에 관음을 위한 사원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한다. 그로부터 2년 뒤, 오토와 산에 사냥을 하러 간 사카노우에 타무라마로가 오토와 폭포에서 겐신을 만나고, 겐신의 학식과 덕망에 존경심을 느낀 타무라마로는 사원을 짓는 겐신의 임무를 돕게 된다.
천수관음상은 모든 중생의 괴로움을 보고, 구제하는 보살이다. 그래서 그런지 건강, 학업, 출산, 복, 재물운 등 다양한 기도를 하러 오는 사람들로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본당에서 기도를 올리며 천수관음상을 저 너머로 살짝 볼 수 있었는데 기요미즈데라의 천수관음상 전체 모습은 33년에 한 번씩 공개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에 마지막으로 공개된 년도는 2000년이니 천수관음상을 보고 싶다면 2033년에 다시 방문해야겠다.
인왕문, 서문, 삼중탑을 지나오면 보이는 수구당. 1735년에 건립되었다. 중생의 소원을 실현해 준다는 대수구 보살 다이즈이구보사츠를 보존으로 모시고 있다. 본존은 신앙의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며 법당에 모신 부처 중에 가장 으뜸인 부처라고 한다. 수구당에서는 인연, 순산, 육아의 신불도 모시고 있는데 그 지하는 '보살의 자궁'을 상징하며 입장료를 내면 지하에 들어갈 수 있고 '태내 돌기'라는 소원 빌기에 참여할 수 있다.
우리가 기요미즈데라에 방문한 날은 1월 4일. 새해의 첫 주간이라 수구당에서부터 사람들로 북적였다. 수구당 앞에 늘어선 줄을 보고 뭔가 하는 곳인가 보다! 하고 따라 서봤다. 가까이 가보니 이곳도 기도를 하고 부적을 사는 곳이었다. 후시미이나리에서 재물운을 빌었으니 오늘은 건강운을 빌어야겠다, 하고 가운데 구멍이 뚫린 동전을 찾는데 5엔이 없어서 50엔을 지출했다. 대수구 보살님 10배로 냈으니까 10배로 이뤄주세요.
기도를 마치고 수구당을 나가려는데 100엔을 내고 지하로 입장하는 사람들을 봤다. 저곳은 뭘 하는 곳이지 찾아보니 출산, 순산, 육아 같은 단어들이 보이길래 나와는 상관없다고 넘겼는데 수구당 지하가 보살의 자궁이라는 상징이 있고, 깜깜한 벽을 따라 걸으며 기도를 할 수 있다는 말을 나중에 알게 되고서 뭐야, 어마어마하잖아! 그런 경험을 놓치다니 하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기요미즈데라 본당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장료를 내야 한다. 요금은 성인 400엔, 아동 200엔이다. 입장 시간은 계절별로 다른데 겨울에는 저녁 6시까지 입장할 수 있다. 본당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탁 트인 전경도 아름다워 기대감이 한층 부풀었다. 기요미즈데라는 입구에서부터 곳곳에 기도하는 장소가 있었지만 천수관음상이 모셔져 있는 본당이 기도의 메인 장소였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종을 울리고 경건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본당 앞에서 기다리다가 줄이 줄어들었을 때쯤 들어가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본당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돌면 본존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신 아미타도가 나온다. 아미타도는 에도시대 초기 1631년에 재건되었다. 상행염불이 일본에서 최초로 행해진 장소라서 많은 참배객이 방문한다고 한다. 상행염불의 의미가 궁금해 찾아보니 常行 한자를 쓰고 '일상으로 하는 일'이라는 의미가 있었다. 따라서 매일 염불을 했다는 게 아닐까.
아미타도, 오쿠노인을 지나오면 자연에 둘러싸인 기요미즈데라 본당의 절경을 찍을 수 있는 곳이 나온다. 방문객들의 제일 좋아하는 포토 스팟 중 하나다. 교토에 처음 가면 기요미즈데라는 꼭 가야 한다고 말했던 R은 이 자리에서 기요미즈데라의 사진을 찍고 싶었다고 했다. 푸른 하늘 아래 1200년을 살아낸 사찰이 장엄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긴 세월 동안 여러 차례 화재로 사찰이 무너졌지만 일본 국민들과 승려들의 자발적인 봉사로 그때마다 재건되며 지금의 모습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기요미즈데라.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기도와 염원이 쌓인 곳. 얼마나 강한 염원이 있기에 저 절벽에서 뛰어내릴 생각을 했을까? 기요미즈데라 본당 무대에서 뛰어내리고도 살아남으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속담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뛰어내렸다고 한다.
이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여우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루종일 비가 왔다 갔다 하면 어쩌지 했는데 다행히도 비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다만 구름이 가득 껴 있어서 아쉬웠지만 비가 멈춘 게 어디야. 기요미즈데라를 한 바퀴 돌아 나오니 산넨자카, 니넨자카 길이 보였다. 산넨자카, 니넨자카는 기요미즈데라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꼭 걷는 유명 관광명소다. 사찰로 가는 길에 형성된 기념품 가게, 음식점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크다. 비록 미어터지는 사람들 때문에 여유롭게 구경할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 덕분에 넘어지지는 않았다. 니넨자카, 산넨자카에서 넘어지면 2년 또는 3년 안에 죽는다는 설이 있다. 살벌한 이 길을 쭉 따라가면 아름다운 정원을 가진 사찰 코다이지가 나온다. 시간이 없어서 코다이지는 방문하지 못했는데 다음에 기요미즈데라를 간다면 코다이지도 꼭 방문하고 싶다.
2024년 첫 여행지 일본. 새해가 시작된 주간에 방문한 교토. 후시미이나리, 아라시야마에 이어 기요미즈데라까지 새해 소원을 빌고 올해도 열심히 살아보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던, 다른 여행과는 의미가 남다른 시간이었다. 글을 쓰는 지금 교토에서의 시간을 돌아보며 내가 어떤 마음으로 향을 피우고 기도를 했는지 되새겨본다. 브런치에 여행기를 기록하기로 결심했던 것도 그때의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글을 쓰는 거지. 핸드폰 속의 사진을 다시 들춰보고, 글을 쓰며 그때의 감상을 꺼내 정리하는 동안 교토로 시간 여행을 다녀오는 것 같아 기분이 말랑말랑해졌다.
추신.
기요미즈데라에 대해 글을 쓰다가 발견한 소식. 올해 2월 4일까지 기요미즈데라 본당에서 다큐멘터리 <KYOMIZU - Cycle of blessings>을 상영한다고 한다. 10년간 걸쳐 아카이브 한 영상으로 만들었다고 하니 무척 기대된다.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때에 기요미즈데라에 방문하는 것도 너무 좋을 것 같다.
"최근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 앞이 보이지 않는 불안을 갖지 않을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 사찰의 역할은 사람들의 안녕과 세계 평화를 기원하고 그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마음의 터전이 되는 것입니다. 이 영상을 봐주신 여러분은 기요미즈데라와의 만남에 인연을 느껴 작게나마 지금을, 미래를 사는 '희망'을 느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FEEL KIYOMIZUDE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