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을 두고 떠나는 유학, 가능할까?"
“신랑이 유학가도 된대요? 시댁은요?”
아이들과 함께 유학을 떠난다고 했을 때, “부럽다!” 다음에 꼭 따라오는 질문이었다. 그럴 때마다 웃으며 “잘 설득했죠.”라고 했지만, 사실 신랑을 설득하는 데만 꼬박 2년이 걸렸다.
나는 일단 부딪혀 보는 스타일이지만, 신랑은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성격이었다. 유학을 가고 싶다고 했을 때 신랑은 “왜 꼭 가야 해?”, “무슨 돈으로?” 같은 현실적인 질문들을 던졌다. 하지만 내 대답은 신랑을 설득하기엔 부족했다. 결국 신랑을 온전히 이해시키지 못한 채 유학 준비를 시작했다.
신랑을 설득하는 2년의 과정
유학을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아이들의 영어 교육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늘 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신랑에게 “그냥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어.”라고 하면 너무 무책임해 보일 것 같았다.
현실적으로 접근했다. 학비와 생활비를 꼼꼼하게 계산해서 한국에서의 생활비와 비교했다. 아이들을 사립학교가 아닌 공립학교에 무료로 보내고 한국에서 지출하던 학원비를 절약했다. 불필요한 외식비를 줄였다. 계산해 보니 하와이에서의 생활비가 한국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하와이에 여행하면서 안전한 곳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유학원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우리처럼 유학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함께 알아보면서 점점 신랑의 마음이 열렸다.
하지만 신랑의 마지막 질문은 여전히 나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왜 꼭 가야 돼?”
나는 여전히 그 질문에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한 채, 하와이로 떠났다.
하와이에서 찾은 답 : ‘자유’
유학을 시작했지만 신랑의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정말 ‘왜’ 온 걸까?
유학 초반, 현실은 기대와 너무 달랐다. 아이들을 돌보면서 공부까지 병행하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 매일 숙제와 수업 준비에 쫓겼다. 반찬가게도, 청소 도우미도, 가족의 도움도 없는 환경. 모든 걸 혼자 해결해야 했다.
그러다 어느 날, 한 권의 책에서 해답을 찾았다. 개그맨 고명환 씨의 『책 읽고 매출의 신이 되다』라는 책이었다. 서문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나는 자유를 얻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그래, 나도 자유를 얻으러 하와이에 온 거야!”
엄마, 아내, 직장인으로서 늘 의무감에 쫓기듯 살았다. 남들이 정해준 기준 속에서 좋은 엄마, 좋은 아내, 좋은 직원이 되려고 애썼다. 하지만 정작 ‘나’는 없었다.
하와이에서는 달랐다. 아무도 내 직업을 묻지 않았고, 아이가 공부를 잘하는지 관심 갖지 않았다. 무슨 차를 타고, 몇 평짜리 집에 사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뱃살이 늘어나든, 민낯으로 돌아다니든 누구도 나를 평가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남의 시선에서 벗어나 내 삶을 살고 있었다.
자유에는 책임도 따른다
물론 자유를 얻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차가 견인되거나, 문이 잠겨 집에 못 들어가거나, 집에 물이 새는 일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역시 힘드니까 오는 게 아니었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하나씩 해결해 나갈 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달았다. 어렵지만 이곳에서의 삶이 좋다는 것.
아이들도 변화했다.
공부를 지루한 의무가 아닌, 즐거운 경험으로 받아들였고, 영어가 교과서 속 문장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언어가 되었다. 무엇보다 엄마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완벽한 자유를 찾은 건 아니었지만, 한국에서보다 훨씬 자유로워졌다.
“신랑아, 그동안 열심히 살았으니까, 나 스스로에게 안식년을 줬어. 괜찮지?”
내가 찾은 답은 완벽한 논리나 현실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이었고, 우리 가족에게 좋은 변화가 될 거라는 믿음이었다.
유학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완벽한 준비는 없고, 확실한 이유가 없어도 가보면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믿고 따라가 보라고.
나는 그렇게, 유학을 떠났고, 자유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