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일기를 책으로 엮기까지
- 2003년 여행 당시 매일 기록.
- 2003년 다음 '중여동' 카페에 일기를 그대로 올림. 2007년 블로그 개설 후 이관
- 편집자의 의견, 교열 과정을 거쳐 원고를 들어내고, 추가해 최종본 완성.
2003년, 6개월 간 중국 배낭여행 과정을 일기로 남겼다.
카페 등 온라인 커뮤니티에 정보 공유 차원에서 기록을 남겼고, 블로그에도 올렸다.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이대로 흘려보내기엔 아까운 내용이었다.
책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감정이 널뛰고 시간 순으로 사건을 배열하다 보니 쓸데없는 기술이 많다.
표현이 단조롭고 서사에 힘이 없다.
단순한 기록에 그칠 뿐 전체 내용을 관통하는 주제 의식이 없다.
독자 입장에서는 이 글을 읽을 이유가 없다.
따라서 책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독자가 이 글을 읽을 이유를 만들어야 했다.
블로그 글을 싹 긁어서 텍스트 파일로 변환한 후 천천히 다시 읽었다.
SNS용으로 글을 바꾼 글이다 보니 이모티콘과 오글거리는 표현이 넘쳤다.
이 과정에서 사유는 생략되고 에피소드에 과장이 들어갔다.
군더더기를 빼기로 했다.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무엇일까 고민했다.
사실 어렵지는 않았다.
그 시절 경험이 현재 내 가치관을 형성한 기반이 됐으니까.
스물다섯의 나는 여행을 떠날 때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의도하지 않게 시간이 생겼고, 부모님 지원으로 경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장기여행으로 남이 하지 못한 경험을 한다는 사실을 뽐내고 싶은 마음이 글에 배어 있었다.
그래서일까? 초반부 기록에는 내내 풍경과 신기한 문화적 경험에 대한 묘사 일색이었다.
중반부로 넘어가면서 사람이 등장했다.
사기꾼을 만나 느낀 환멸, 작은 친절에 받은 감동,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과 만나 스스로를 돌아본 내용이 나왔다.
여행을 통한 자아 성찰, 중국인에 대한 이해, 두 가지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을 듯했다.
다음으로는 내 여행기에서 추출할 수 있는 매력이 무엇인지 정리해 봤다.
첫째, 지역에 대한 궁금증
신장 위구르 자치구와 시장 티베트 자치구는 당시에도, 지금도 여전히 쉽게 갈 수 없는 곳이다.
한동안은 소수민족 독립운동과 중국 정부의 탄압, 이로 인한 유혈 사태로 외국인 출입이 제한된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 지역을 소개하는 것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
둘째, 사람의 이야기
나는 중국고전문학을 전공했다.
필수과정으로 어학을 선행해야 했으니 중국어로 현지인과 소통할 수 있었다.
덕분에 여행 중에 만난 수많은 사람과 나눴던 대화, 에피소드를 소개할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그 내용은 대부분 일기로 남겼다.
대부분 여행기가 작가 개인의 심상을 풀어내는 데 집중하는데, 중국인과의 대화를 통해 중국을 소개하는 콘텐츠는 경쟁력이 있다고 봤다.
셋째, 사진자료
고등학생 때 사진반 활동을 시작했다.
여행 중에 찍은 사진은 사실 남에게 보여주기 민망한 수준이지만, 이후 20년 간 수차례 중국을 방문해 보충해 놓은 사진자료가 있다.
여행기에 들어가는 지역 사진 역시 많기에 지면 구성이 수월하다.
판단이 서자 브런치 연재를 시작했고, 약 8개월 만에 연재를 마쳤다.
1차로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 응모했다.
2024년 8월에 응모했는데, 결과는 12월에 발표됐다.
결과는 낙선이었지만 애당초 크게 기대하지 않았기에 아쉽지는 않았다.
다만 4개월 가까이 허송세월한 시간이 아까울 뿐이었다.
이후에는 여행 에세이를 출간한 이력이 있는 출판사 리스트를 정리해 투고했다.
투고 과정에 대한 내용은 따로 글을 써야 할 테니 건너뛴다.
여행 에세이 시장의 현황에 대해서도 글을 따로 써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다행히 출판사 한 곳에서 제안을 받았다.
출판사가 요청한 양식에 따라 한글파일로 원고를 정리해서 보냈다.
1차 교정지를 받았다.
교열작가는 편집자처럼 글의 방향과 주관적인 표현에 대해 지적했다.
처음에는 화가 났는데, 생각해 보면 내 글을 객관적으로 읽어준 첫 번째 독자였다.
나는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였다.
독자 입장에서는 당연히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표현과 감상이 계속 나오니 읽기 싫어졌을 만했다.
글을 과감하게 깎아야 했다.
1차 교열 후 디자인에 들어갔다.
판형을 정하고 디자인을 잡았는데, 원고가 넘쳤다.
쓸 때는 '이것만 갖고도 책이 될까?'라고 걱정했는데, 1/3은 덜어내야 할 상황이었다.
여행 에세이 시장의 현실을 고려해야 했다.
일반적인 에세이 판형인 4*6판(188*128mm)에 폰트 크기를 기본으로 잡으니 글은 한없이 뒤로 밀렸다.
욕심을 내면 내용을 다 넣을 수 있지만, 그러면 제작 단가가 오르고, 책 가격도 오른다.
에세이류의 평균 가격은 1만 7000원 아래로 책정한다.
여기에 맞추려면 270p 안쪽으로 끊어야 하는데, 내 글은 340p에 육박했다.
책값이 오르면 출판사에서 마케팅하는데 애로사항이 생긴다.
아니, 그전에 사람들이 책을 안 산다.
공들인 챕터 네 개를 들어내야 했다.
분량을 맞췄고, 맘에 들지 않는 디자인 요소를 수정했고, 사진 배열을 정돈하고, 흐름에 맞춰 더 어울리는 사진으로 교체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제 표지 디자인만 확정하면 책이 나온다.
왜 책을 쓰는가?
시장은 수요와 공급 법칙을 따른다.
내가 갖고 있는 콘텐츠가 수요가 있다면 책을 쓰면 된다.
하지만 나처럼 여행 에세이를 쓴다면, 수요는 크지 않다.
솔직히 말하자면 없다.
그럼에도 책을 쓰려는 이유는 이 경험이 휘발되지 않고 기록으로 남아 세상의 한 조각이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라는 존재의 실존을 증명하려는 애처로운 몸부림으로 볼 수도 있다.
다만 기왕 쓰기로 했으니 누군가에게는 내 책이 선한 영향력, 동기부여가 되길 바랄 뿐이다.
또, 그렇게 되도록 최선을 다해 쓸 따름이다.
나는 무엇을 쓸 수 있는가?
내가 가진 콘텐츠는 무엇일까?
구성만 보면 내 여행기는 책으로 만들 수 있는 요소를 대부분 갖췄다.
하지만 내가 20년 전 일기를 쓰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300페이지에 달하는 적지 않은 내용을 제로 베이스에서 다시 쓸 엄두는 나지 않는다.
요컨대, 평소 나의 관심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게 중요하다.
그 관심사가 대중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지는 별개 문제고.
마지막으로, 나는 아직 에세이를 몇 권 더 쓸 생각이다.
나이 마흔에 회사를 때려치우고 아내와 여행을 떠난 이야기.
20년 넘게 고양이와 동거하면서 있었던 에피소드와 이를 통해 삶과 관계에 대해 정리한 생각들.
논문을 준비하면서 답사한 지역의 문학과 인문 환경에 대한 이야기.
등등 소재는 많다.
마찬가지로 대중의 공감을 얻을 수 있도록, 재미있게, 지겹지 않게 쓸 수 있느냐는 다음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