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뭐래도 보긴 봐야지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제갈량의 말이다.
<하얼빈>을 보고 든 생각이기도 하다.
역사를 소재로 만든 영화라면, 우리는 이미 결말을 안다.
하지만 기꺼이 지갑을 열고 극장을 찾는다.
왜?
화려한 출연진, 감독의 이름값, 막대한 제작비, 시대적 소명 등 떡밥은 다양하다.
국난 극복을 다룬 영화라면 이미 흥행의 오부능선을 넘은 것과 같다.
'독립운동'은 우리 유전자에 설치된 골든 버저다.
시나리오가 산으로 가거나, 감독의 역량이 어지간히 수준 미달이 아닌 이상 기꺼이 박수를 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얼빈>은 그 모든 떡밥을 다 뿌렸다.
이 미끼를 물지 않을 방법이 없다.
안중근 장군이 누구던가?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명시한 건국이념을 알고, 아니 몰라도 상관없다, 올바른 역사관을 갖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순신 장군과 함께 가장 존경하는 인물 탑 티어에 올리는 게 마땅한 인물이다.
그리고 배우가 현빈이다.
먹고 죽어도 이 떡밥은 물어야지.
예고편과 출연진, 제작비를 보고 블록버스터를 상상했는데 아니다.
오프닝 시퀀스와 영화 초반 처절한 신아산 전투 장면까지는 X꼬에 힘이 빡 들어간다.
하지만 이후부터는 실금이 걱정될 정도로 스르르 힘이 풀린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서사 구조 중 위기가 2/3다.
절정은 조루다.
작중 안중근(현빈)의 대사다.
관객도 같은 마음이다.
화려한 오프닝에 마음을 뺏겼다가 느린 호흡으로 안중근의 내면세계를 따라가다 보면 헷갈린다.
이유가 있다.
역사를 다룬 팩션(faction)은 자칫 '국뽕'으로 빠지기 쉽다.
우민호 감독은 이 부분을 매우 경계했다.
맥스무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우리가 느끼는 괴리감과 당혹스러움은 아마도 여기에 있을 터.
영화는 인간 안중근의 고뇌, 시대적 사명을 다하기 위한 처절한 분투를 다룬다.
<곡성>, <기생충>을 찍은 홍경표 촬영 감독이 ARRI ALEXA 65라는 무서운(?) 카메라를 들고 연출한 무겁고 아름다운 화면은 조연이다.
여기서 영화에 대한 평이 극과 극으로 갈린다.
스토리텔링의 완성도와 극 중 인물 형상화, 개연성 등을 따지면 수작으로 보기 어렵다.
하지만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묵직하다.
사이드 스텝 밟으며 잽을 아무리 날려봤자 상대를 쓰러뜨리는 건 제대로 꽂히는 스트레이트 한 방이다.
<하얼빈>의 스트레이트는 타이슨의 주먹이다.
이 영화가 울림을 주는 이유는 시기가 바로 지금, 2024년 12월이기 때문이다.
실제 안중근 장군이 쓴 글을 뼈대로 만든 마지막 대사는 슬프게도 아직 진행 중인 우리 역사 현실이다.
이토 히로부미의 대사를 듣는 순간 머리에 피가 쏠렸다.
국뽕이 아니라 분노다.
이럴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분노.
영화를 보다가 광화문을, 여의도를, 남태령을 떠올렸다.
나의 선배들은 화염병과 쇠파이프, 깨진 보도블록을 들고 거리를 뛰어다녔다.
우리 세대는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뛰쳐나갔다.
이제 우리 다음 세대는 믐뭔봉을 들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대가 부르는 현장으로 달려 나가고 있다.
100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작년에도, 올해도 도모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순간 피가 끓고 눈물이 솟는다.
그러니, 이 영화는 볼 수밖에 없고, 봐야 한다.
2024년 12월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여기서부터는 사족이다.
배우들이 멱살 잡고 캐리: 연기가, 연기가, 연기가... 간혹 눈과 귀에 걸리는 대목도 있지만, 이거보다 어떻게 더 잘하나 싶다. 빵꾸난 설정, 개연성을 배우들이 연기로 다 메꾼다. 마지막까지 울려 퍼지는 "까레아, 우라"를 들을 때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여기저기서 욕을 먹는 연출이었지만 말이지.
역시 홍경표: 화려한 색감을 배제한, 암부 묘사에 영혼을 갈아 넣는 듯한 홍경표 촬영감독의 연출은 독보적이다. 실제로 지난 10년 사이 나온 대작 중 홍경표 감독의 이름이 안 들어간 영화가 드물 정도다. 이제 영화 마니아가 아니라도 '어? 이거 어디서 본 듯한데'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우민호 감독이 유비라면 홍경표 감독은 제갈량이다.
최재형의 눈물: 영화 안에는 숨어 있는 디테일이 제법 있다. 솔직히 나중에 다른 영화평 보고 안 게 대부분이다. 내가 가장 감탄했던 부분은 최재형의 눈물이다. 폭탄을 사용하려던 거사가 실패하고, 블라디보스토크 골방에서 햇빛이 들지 않는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안중근이 최재형(유재명) 앞에 무릎 끓고 절규한다. 빛이 드는 창가에 서 있던 최재명이 빛과 어둠 사이에 놓인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눈물 한 방울을 떨군다. 카메라는 그 눈물을 타이트하게 잡지 않는다. 골방 문 언저리에서 반대편 창가에 마주한 인물들을 멀찍이 관조한다. 하지만 그 먼 거리에서도 안중근의 고뇌를 이해한 최재형이 떨군 눈물 한 방울은 또렷하게 빛나며 떨어진다. 딱 한 방울이다. 그 한 방울이 계란으로 바위를 쳐야 하는 독립군의 심정을 아프게 대변한다.
이동욱의 파안대소: 솔직히 처음엔 이창섭 맡은 배우가 누군지 몰라봤다. 여전히 살짝 어색한 분노하는 연기를 보고 '역시 이동욱인가?' 싶었다. 그러나 모리 소좌에게 "이 바보새끼야"라며 처절하게 웃는 얼굴을 보며 소름이 돋았다. 미안합니다, 이동욱 님. 제가 몰라뵀어요.
박점출: 배우를 밝히면 스포일러가 될까? 사실 여기저기서 다 떠들어 놔서 의미 없어 보이긴 하지만, 모르고 보는 분들들도 있을 테다. 좌우간, 이 캐릭터의 서사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가 안 된다. 좌절한 독립투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건 알겠는데, 불과 2~3분에 불과한 시퀀스 안에 다 담으려는 건 욕심이었던 듯하다. 감정도, 개연성도, 서사도 널을 뛴다.
공부인: 혼자 사극 찍는다. "박점출 네 이놈~!" 할 때는 솔직히 등골이 찌릿할 정도로 카리스마가 있었다. 근데 그 톤이... 전여빈 배우는 좋은 배우다. 다만 아쉬울 뿐이다.
두만강이냐 북해빙궁이냐: 두만강은 강폭이 좁다. 탈북자들이 갈수기에 걸어서 건넌다. 하지만 스틸컷으로 본 두만강은 바이칼 호수 같다. 길을 잃은 안중근을 표현하기 위한 영화적 장치다. 그리고 솔직히 졸라 멋있다. 납득할 수 있다.
만주에는 사막이 없다: 안중근 일행이 폭약을 구하러 박점출을 찾아가는 여정은 황당하다. 만주에는 사막이 없다. <놈, 놈, 놈> 때문일까? 나름 유서 깊은 '만주 웨스턴'의 영향일까? 게다가 거사 5일 전에 출발했는데, 가는 데 이틀, 오는 데 이틀이다. 저... 저기요?;;;
선양-쓰핑-장춘-하얼빈으로 통하는 길 좌측은 내몽골자치구와 닿는 사막지대가 있긴 하다. 하지만 저기는 사막보다는 초원에 가깝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안중근 일행이 이틀 만에 저길 다녀온다고? 실제 만주벌판은 드넓은 옥수수밭이다. 기차 타고 가다 보면 끝도 없는 옥수수밭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