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7 회사작당
지난 한 주는 게임 하는 재미에 푹 빠져서 헤어 나오지도 못하고 허우적거렸다. 틈만 나면 노트북을 켜서 고사양 게임에 버벅거리는 이 친구를 붙잡고 게임을 해댔다. 엔딩을 보겠다고 나흘 밤낮을 매달렸으니, 게임 중독에도 급성과 만성의 구분이 있다면 나는 급성 게임중독자라고 할 만하다. 혼자 살아서 어찌나 다행인지 누군가와 함께 살았다면 금방 제지당했을 것이다.
이렇게 재미 붙여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고 있는 게임이 ‘디스코 엘리시움’이다. 기억을 잃어 자신의 이름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형사가 임시 파트너 ‘킴’과 함께 살인사건의 진상을 좇는 게 이 게임의 주요 골자다. 이렇게 보면 그 유명한 시리즈인 ‘셜록 홈스’와 비슷한 장르의 추리게임이 아닌가 싶지만, 실제로 플레이해보면 정말 이것이 추리게임인가 의문이 든다. ‘디스코 엘리시움’은 그보다는 인간의 내면을 파고드는 길고 장황한 심리 소설에 가까운 게임으로, 주인공 형사가 점차 사건을 조사하면서 주변의 증언과 증거들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회복하고 그와 동시에 여전히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상처를 마주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기억을 송두리째 날려버림으로써 고통으로부터 도망친 주인공이 수사과정에서 조금씩 자신이 누구인지, 왜 괴로워하는지 알아가고 게임 말미에는 급기야 피를 방울방울 흘리는 만신창이의 몸이 되는 것도 외면하던 상처를 다시 마주하는 여정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겠다.
한 해에 수도 없이 많은 게임이 쏟아져 나오고 그중에 어마어마한 자본을 들인 게임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이 작은 인디 게임 회사의 첫 작품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아주 신기한 일이다. 자신의 내면세계도 아직 완전히 탐구하지 못하고, 내가 무엇에 고통스러워하는지, 삶은 무슨 의미가 있어 내던져진 것인지 알지 못하는 내 성미를 자극하는 무언가가 이 게임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자신의 바깥에 존재하는 살인사건과 자신의 안에 존재하는 과거의 기억이 서로 조응하며 공명 운동을 일으키는 모습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데, 더구나 플레이어 각자의 선택을 통해 이를 다양한 방향으로 발전시켜나갈 수 있다면 이보다 재미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주인공의 내면을 플레이어 개개인의 각자의 방식으로 탐험하기, 그것이 ‘디스코 엘리시움’의 진짜 목적이자 치명적인 매력이라고 본다.
그렇게 해서 나는 나만의 형사를 만들어내는데, 작품 말미쯤 되면 주인공이 어떤 이념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성정을 가지고 있는지가 그동안의 선택지를 통해 자연스럽게 결정이 난다. 나는 실로 나답게도 공산주의와 도덕주의 그 어딘가의 애매한 지점에 서서 늘 상대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다니는 경찰이 되어있었다. “진짜 나 같이 나왔네.”하며 실소를 터뜨려주는 수밖에 없다. 과격한 선택지는 결단코 누르지 않는 내가 주인공을 나 자신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이 플레이한다면 나는 전혀 택하지 못할 선택지를 통해서 또 다른 경찰을 만들어낼 테다.
‘디스코 엘리시움’은 이것 말고도 갖가지 매력을 잔뜩 안고 있는 게임임에 틀림없다. 망해버린 공산주의의 폐허 위에 연합국들의 엉성한 지배를 받고 있는 작중 세계관이 꼭 전후 한국과도 같다. 부서진 콘크리트 건물과 같은 앙상하고 메마른, 하지만 강렬한 색채로 표현된 미술과 따로 빼내어 듣고 싶을 정도의 음악, 그리고 ‘창백’, ‘이솔라’ 등 그 이상을 더 듣고 싶게 만드는 치밀한 세계관 등 무대의 뒷자락에 더 관심을 쏟는 나 같은 사람들이 즐기기엔 딱인 요소들이 넘쳐난다. 덕분에 미친 듯이 했더랬다. 평상시에도 주야장천 ‘디스코 엘리시움’의 BGM을 틀어놓고 그 세계 속에 푹 빠져지내고 있다.
지금으로선 1회차 플레이를 마치고, 주인공의 특성을 조금 달리하여 2회차를 도전해보려 하고 있다. 본성을 억누르고 짐짓 다른 사람이 되어 예상치 못한 선택지를 눌러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 속 주인공이 여전히 살아있다면, 현실의 나도 조금은 다르게 살아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게임 오버되지 않고 멀쩡히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거지 틀린 게 아닐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