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9_회사작당
WHO는 건강을 ‘단순히 질병이 없거나 병약하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온전히 안녕한 상태’라고 정의했다. 비판을 잔뜩 받은 정의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런 관점에서 건강함을 따져보자면 나는 결코 건강하지 않다. 병들었다.
현대사회는 유력한 병인으로서 횡포를 부린다. 노동자를 시간의 틀 안에 가두어 놓고 인내심을 한계치까지 몰아붙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지금 누군가가 점심시간도 휴식 시간이라고 일러둘지도 모르겠다. 법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현장에서 점심시간이란 기실 조직의 비공식적 부문을 담당하며 동료들과의 관계를 다지는 데 쓰이는 게 대부분이다. 그런 와중에 뇌를 비롯한 각종 핵심 장치들을 꺼두고 넋 놓을 수는 없다. 혹자는 누군가와 식사를 하지 않더라도 자잘한 일을 처리하거나 자기계발 활동에 그 짧은 시간을 소진해 버린다. 그러니 엄정한 의미의 휴식시간이란 없다.
그렇지만 인간은 낮잠을 자도록 설계되었다던데.
그래서 오늘날의 9to6 근무 체계에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연스레 찾아오는 졸음을 견디는 대가로 임금을 받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다. 산업이 현대사회의 체계에 완전히 포섭되면서 적어도 일정 비율의 노동자에게는, 특히 화이트칼라 직업군에게는 훨씬 낮은 강도의 노동 의무가 부과됐다. 분명 우리는 선조보다는 적은 시간 일하고, 그것도 그럭저럭할 만하다. 다만 그게 빈틈없이 꽉 들어찼다는 게 문제다. 비정한 제도는 오전에 4시간, 오후에 4시간씩 쉬지 않고 사무실에 앉아 무엇이든 하기를 요구한다.
정당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류의 발전과 더불어 조금씩 빼앗긴 휴식이 절실하다. 원시 수렵 사회에서는 4~5시간 사냥을 하거나 채집을 해오면 나머지는 쉬었다고 한다. 농경사회에 접어들어서는 해가 떠있는 동안은 일을 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그래도 햇볕이 너무 따가운 한낮에는 잠시 그늘로 피해 낮잠을 잤다. 몸이 힘드니 어쨌든 쉬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단 말이다.
그러나 추우면 따뜻하게, 더우면 시원하게 인체에 최적의 환경을 조성하는 오늘날의 사무실에서는 그런 공감대가 사라진 지 오래다. 놀 궁리만 한다며 혀 차는 소리나 들을 것이다. 그렇게 변명의 기회도 없이 매여있는 동안 경추와 척추가 비명을 질러대고 무엇보다도 쏟아지는 피로감을 견디기 위한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단지 성실한 일꾼 흉내를 내기 위해 에너지를 써대는 것이 곧 우리의 노동이다.
철없게도 인류의 진보를 믿는 사람인지라, 언젠가 우리 노동자에게도 충분한 휴식이 가능한 환경이 마련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때가 되어 주어진 휴식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낮잠을 고를 것이다. 온몸에 부드러운 이불이 감겨오는 감각, 마지 땅으로 꺼질 것처럼 침대를 파고드는 살결을 느끼면서 의식을 저 멀리 떠나보내는 과정을 매일 수행할 것이다.
고작 키보드를 두드리는 게 다인 생활을 하면서 왜 낮잠을 자려고 하냐고? 잠드는 것이 행복한 걸 어떡하란 말인가. 눈을 뜨고 있는 한 각종 전자기기가 뿜어내는 청색광에 사로잡혀 스스로가 쌓아올린 두려움과 불안, 아집의 노예가 될 게 뻔하다. 그럴 바에는 설령 현실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하더라도 잠깐의 유예라도 얻을 수 있도록 잠을 청하는 게 낫다. 예술로 현실을 탈출하려 했지만 능력이 비루한 내가 누르는 비상 탈출 버튼으로서의 낮잠이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아주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