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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상적인튀김요리 Jul 24. 2024

교실(敎室) 말고 교실(交室)

[교실 에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실 (2)

교실은 하나의 선생과 여럿의 후생이 만나는 곳이다. 후생은 나중에 태어난 게 죄(?)라는 걸 바득바득 깨닫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선생이 먼저 태어나 먼저 겪은 일들을 후생들에게 말해주는 곳이기 때문이다(우리는 대개 이것을 잔소리라 부른다.). 그래서 우리는 선생을 가르치는 자, 교사라고 부르고 후생을 배우는 자, 학생이라고 부른다. 안타깝게도 선생이 가르치는 것의 대부분은 후생들에겐 귀찮거나 답답하고 재미없는 것들이다. 애초부터 뽀로로처럼 노는 게 제일 좋은 후생의 니즈에는 영 맞지 않는 관계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중에 태어난 게 죄라면 죄인 것을. 이렇게 보면, 선생이 후생에게 몹쓸 꼰대 짓을 하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겠으나 실은, 선생이고 후생이고를 떠나 교실은 사람 사는 곳이다. 선생과 후생으로 만나기 전에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는 곳이라는 얘기다. 김소영이 『어린이라는 세계』에서 ‘어린이가 아무리 작아도 한 명은 한 명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크든 작든, 먼저 태어났든 나중에 태어났든 그냥 하나의 머릿수에 불과한 사람과 사람의 만남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교사 대신 선생 혹은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게 좋다. 그저 먼저 태어난 사람일 뿐인데, ‘가르치는 자’라는 타이틀(특히, 스승 사(師) 자가 가장 부담스럽다.)을 받는 것이 불편하다. 먼저 살았던 경험과 가치, 지혜를 나누는 하나의 사람이면 좋겠다. 선생이라는 말이 딱 좋다. 그리고 후생들은 후생(사실, 잘 쓰지도 않는 말이지만)이라는 후진 말보다는 하나의 존재로서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을 좋아한다. 싸잡아 부를 때는 때에 맞게 여러분이라고 부르고, 어린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그런지 ‘교실(敎室)’이라는 말도 조금 부족하다. 선생이 어린이들에게 가르치는 공간이라는 말이다. 가르치고 배우는 것 또한, 학교에서 선생과 어린이가 만나, 해야 하는 중요한 과업 중 하나이겠지만, 그보다 먼저 살펴야 할 것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서로 다른 사람끼리 즐겁고 행복하게 만나는 것이 무언가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그러니 단어 하나가 뭐 그리 중요하겠냐 만은, 교실(敎室) 말고 교실(交室)은 어떨까. 사람을 사귀는 공간. 말만 들어도 멋진 공간일 것 같다. 사람을 만나고 대하고 헤어지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존중하는 삶의 공간. 게다가 사귀는 것은 어린이들에게만이 아니라, 내게도 중요한 일이다. 선생은 어린이와 즐겁고 행복하게 사귀기 위해 교실에 있다. 그것은 오롯한 기쁨이다. 어린이들과 제대로 사귀지 못하면 선생은 괴롭다. 어린이도 괴롭다. 선생과 어린이가 괴로운 교실은 당연 괴롭다. 선생도 어린이도 교실로 오는 발걸음이 얼마나 무겁겠는가. 


우리는 대개 대학으로 진학하면서 교실을 떠난다. 대학도 교실처럼 사람들이 모여 함께 공부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지만, 교실이라 이름 짓지 않고 강의실이라 따로 지어 부른다. 그러니 교실은 고등학교까지다. 대학의 공간을 교실이라 이름 짓지 않는 까닭도 공간의 기능이 수업에 초점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업이 끝나면 강의실을 채웠던 사람들은 흩어지고 사라진다. 그러나 교실은 강의실과는 다르다. 수업이 끝나도 사람들은 남아 관계를 맺는다. 교실은 그런 공간이다. 사람을 사귀는 공간이다. 이런 낭만적인 말을 술자리에서 늘어놓았더니 고등학교 3학년 담임을 맡은 친구 한 놈이 역시 초등학교 선생님이라며 피식 웃으며 말한다. 


“야, 사귀는 건 다 막아야 해. 사귀었다 헤어지고 그걸로 즈그들끼리 싸우고 울고 뒷담이나 까고 얼마나 골치 아픈 줄 아냐?”


그래,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다만, 나의 ‘교실’은 꿈과 희망의 초등학교 교실이 아닌가.


“야, 초등학교니까, 낭만적이어도 용서해 주라.”


어쨌든 그렇게 나는 사람이 사귀는 낭만적인 교실을 꿈꾼다. 꿈을 향한 길, 첫걸음은 단연 어린이들을 하나의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다. 잘 듣고 잘 답해주는 것이다. 처음엔 어린이의 질문에 쉬이 답하지 않았다. 내가 막 선생이 되었을 무렵에는 그러했다. 나이는 100살, 몸무게는 1000kg, 키는 너보다는 커 정도로 답하곤 했다. 이외에도 여자친구가 있는지, 가족관계는 어떤지, 좋아하는 운동은 무엇인지 등에 제대로 된 답을 주질 않았다. 어린이들에게 만만하게 보이지는 않을까 두려움이 앞섰던 때였다. 


그렇게 몇 번 제대로 된 답을 주지 않으면 백이면 백, 어린이와 선생 사이에는 턱이 진다. 나는 어린이와 선생 사이에 생긴 턱이 교실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나라는 사람에 대한 질문도 웬만하면 받아주는 편이다. 그게 지나친 사적 영역 침범이 아니라면, 가령 몸무게를 물어보는 따위의(내 몸무게는 여전히 1000kg이다.). 이렇게 질문을 진심으로 받아주기 시작한 것이 바로, 교실을 교실(敎室) 말고 교실(交室)로 이해하기 시작한 때부터였다. 어린이와 선생 사이의 턱이 있어야 가르칠 수 있다고 믿었던 때를 지나, 어린이와 선생이 우선 잘 사귀어야 가르칠 수 있다고 믿는 때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때부터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어린이들끼리는 며칠이면 투닥거리며 대게는 쉽게 사귈 수 있는데 선생과 어린이가 사귀자니 삐걱대는 것들이 있는 것이다. 삶의 철학도 다르고(나도 노는 게 제일 좋긴 하다만) 관심사나 고민도 다르다. 좋아하는 음식도 다르고 음악이나 영화 장르도 다르다. 내가 오래 달리고 나면 개운해지는 게 있다고 말하면 어린이들은 푹 인상을 쓴다. 미술 시간에 통기타 반주의 잔잔한 음악을 브금으로 깔아주기라도 하면, 더러는 흥이 나질 않는다며 플레이리스트를 바꾸려 든다. 


더구나 내가 대화라도 하려고 이름을 부르면 죄다 굳은 표정으로 다가온다. 머리를 바싹 짜서 찾아낸 어떤 잘못이라도 떠오른 모양이다. 요새는 그걸 즐기는 것 같기도. 어린이들의 귀여운 표정 변화를 즐긴달까. 괜히 “왜, 뭐 잘못했어? 왜 이렇게 얼어 있어?”라고 너스레를 떨어보기도 한다. 아무튼, 어린이도 선생과 대화하는 것은 부담스럽고 어려운 일이며, 고리타분하고 지루한 것이다. 그래서 교실을 잘 살핀다. 평소와 달리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어린이나 요새 큐브에 빠져 쉬는 시간 내내 큐브를 돌리고 있는 어린이와 같이 어린이와 가벼운 대화의 거리를 만들 수 있는 계기들을 자꾸 발굴한다.   

  

“오늘 기분 안 좋아 보인다?”

“아침에 엄마랑 싸웠어요.”

“선생님이 엄마랑 대신 싸워줄까?”

“…?”     

“선생님도 큐브 엄청 잘하는데.”

“…”

“선생님도 잘한다니까?”

“…”     


이렇게 대화에 실패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꾸준히 시도하는 것이 나름의 비법이라면 비법이다. 그렇게 노력하다 보면 나중에는 시시콜콜 대화를 거는 어린이들이 생긴다. 선생님은 마이쮸를 좋아하는지 새콤달콤을 좋아하는지 따위의 기호에 대한 질문이나 옆 반에 아무개와 아무개가 사귀기 시작했다는 브레이킹 뉴스도 더러 있다. 그때는 꼭 어린이의 눈을 바라본다. 잡무로 가득한 컴퓨터 모니터가 내 눈길을 부여잡더라도 어린이의 눈을 바라보려 한다. 


선생을 선발하는 임용시험에는 모의수업 평가 영역이 있다. 어린이는 없지만, 어린이가 있는 것처럼 꾸며 일종의 모노드라마, 이른바 모노-수업을 찍는 것이다. 면접관은 이 기괴한 모노-수업을 보고 그대가 선생으로서 자격이 있는지를 평가하게 된다. 아무렴 어린이들이 없는 시험장이지만 수업만 덜렁하기에는 소통 없는 선생처럼 보일까 싶어 수험생은 백이면 백, 시험장 이곳저곳을 돌며 이른바 순회 지도를 한다. 그때, 반드시 들어가야 할 지시문이 있다. ‘(무릎을 꿇고 어린이와 눈을 맞추며)’ 시험관 앞에서 보란 듯 무릎을 꿇는 내가 세상 작위적인 것처럼 느껴지는. 그러나 그 지시문은 결코 헛된 지시문이 아니다. 눈을 맞춘다는 것은 선생이 어린이를 대하는 태도와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면 나는 영영 선생으로서의 기쁨을 놓치게 된다. 눈을 맞추는 순간, 우리는 서로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비로소 사귀게 되는 것이다. “눈 맞추면, 우리 사귀는 거다?”


또 다른 거대한 문제는 선생은 어린이‘들’을 사귀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이는 질문을 쏟아낼 준비가 매일 아침 되어 있지만 선생은 그 모든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교실에 선생이 하나밖에 없기에 그렇고, 선생도 하나의 인간이기에 그렇다. 더구나 똑같은 질문이 계속 쏟아질 때는 더욱 그렇다. 오늘 체육 시간에 무얼 할지 묻는 질문을 열 명쯤 받다 보면 눈을 맞추며 꿋꿋이 답하던 선생도 어느 순간, 대답하기가 지친다. 


그러다 보면, 선생의 말과 행동에는 날이 선다. 한숨을 쉰다든지, 짜증을 낸다든지, 답은 않고 차가운 표정으로 응시한다든지 그렇게 날이 선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며칠을 그러다 보면, 오늘 체육 시간에 무얼 할지 묻는 질문이 줄어든다. 또 그렇게 몇 달이 흐르고 나면, 어린이들과 선생 사이에는 벽이 놓인다. 마치, 교탁 옆에 노란 폴리스라인이라도 그어진 것처럼. 안타깝게도 내 선생 경력으론 어린이들을 화려하게 상대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찾지 못했다. 대신, 어린이와 선생 사이에 폴리스라인이 그어지기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건 여러 번 확인이 가능했다. 


묘수는 없다. 도를 닦는 수밖에. 언젠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선생에게는 50번째 질문이었을지 몰라도 그 어린이에게는 첫 번째 질문이었을 거라는 말. 나는 그 말을 교실로 향하는 아침 출근길에 되풀이한다. 그러면, 잠시나마 어린이들 말이 귀하게 들린다. 그리고 나 또한, 귀하게 답한다.


교실(敎室) 말고 교실(交室)은 어떨까, 라며 말장난을 걸었지만, 교실은 교실(敎室)이자, 교실(交室)이다. 가르치는 것이든 사귀는 것이든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곳이다. 교실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모여 사는 방법을 배우는 공간이니까. 다만, 교실의 무게 추는 사귀는 것으로, 조금 기울었으면 하는 게 내가 교실을 바라보는 태도이자 내가 삶을 바라보는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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