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북동 탕웨이 Apr 14. 2024

프랑스에 산 거 아니에요?

그랬다면 좋았겠네요

Courbevoie 사무실에서 본 파리 시내

에펠탑이 멀리 보이는 사무실에 출장 와 지난주부터 일하고 있고 어제는 짬을 내어 무려 17년 만에 오르세 박물관에 다시 갔다.


폐관 시간이 다 된 오르세 박물관

기억이란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져서 그런지.. 마치 처음 간 것처럼 새로웠다. 물론 그때와 다르게 에스컬레이터가 생겼다. 사람이 많은 것도 시계도 그대로다.

파리 길바닥의 알림판

나는 프랑스에서 2007년에 처음 가 봤고 그때가 내 첫 해외여행이었다. 부모님이 여유가 없어 보내기 어렵다고 한 프로그램을 당시 담임 선생님이 설득한 교환 학생 프로그램을 통해서 갔다.

Augstin Thierry 친구들

2주 남짓한 일정에 현지 홈스테이 가정에 머무르며 매일 학교 수업도 듣고… 샤워한 후에는 머리카락을 치웠고, 컨서버토리에서 레슨도 받고 발표회도 했다.

샹젤리제 어딘가

주말에는 바삐 기차를 타고 파리에 당일치기 여행을 왔다. 샹젤리제에 가서 개선문도 보고 버튼을 눌러서 문을 열어야 하는 지하철도 타 보고 그랬다. 에펠탑도 중간 까지는 올라탔던 것 같고 샹 드 막스 공원에서 간식도 먹었다. 기념품도 샀던 거 같고, 불타기 전 노트르담 성당도 보고 소르본 대학교 근처도 걸었다.


당시 선생님이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난 뒤에 사람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가지고 참가를 설득하셨던 것 같은데, 정말로 그 여행이 계기가 되어 그 이후로 자연스럽게 프랑스어를 열심히 배웠던 것 같다. 관심이 생기니 자연스럽게 그다음이 생겼다고 해야 할까. 새로운 친구들도 만나게 되고 한 마디로 새로운 우주가 한편에 생긴 셈이다. 그때의 문화적 영향을 한 두줄로 정리할 순 없고, 대학교도 전공으로도 이어지고 프랑스어로 한참 먹고살기도 했으니 새삼 돌이켜 보면 큰 영향이었다. 그때 그 여행이 아니었으면 오늘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지금 다니는 회사도 그렇고 전에 다녔던 회사 프랑스인 또는 한국인 동료들은 내가 프랑스에 살았다고 생각한다. 프랑스인 남편이 있거나 유학한 친구들이 교환 학생 정도는 다녀오지 않았나 하고 생각하고, 내지는 화장을 하지 않거나 보이는 것들을 보고 유학생이나 교포라고 생각했다는 얘기를 심심치 않게 듣는다. 영어 하는 것도 보고 필시 뭔가가 있다고 추측과 판단을 무지막지하게 한다. 호기심에 물어보고 칭찬을 하거나 노력을 인정해 주는 사람도 있지만, 대게는 나의 노력과 능력을 인정하기는 싫은 모양이 아닐까. 나의 배경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 것이라 제 멋대로 추측한다. 그런데 나 말고도 이른바 토종 한국인인데 훌륭한 언어 능력을 가진 사람이 너무 많다. 명함을 못 내밀 정도로 뛰어난 분들도 있고 유학을 다녀왔음에도 못 하는 사람도 많다는 걸 안다. 하기 나름인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그려려니 했는데, 이제는 아예 그냥 살다왔다고 할까 싶다. 한국 사람이면, 한국에서 학교도 다녔는데 어쩌구 저쩌구 웅앵웅 하는 이야기 지겹다.


말하자면 나는 그저 전공과 상관없는 일을 하며 커리어를 쌓았고 외국어로 먹고살고 있는대 그런 사람은 아주 많다. 나를 특이하다고 몰아가지만 그런 사람이 주변에 널리진 않았어도 많이 있다.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면, 일상에서 남들과 스스로 비교하며 불공평함으로 화로 가득 차 있는 삶에 편승하며, 주변 사람들의 암묵적인 룰을 따르는 게 사람의 미덕인데 나는 그렇게 보이지 않나 보다. 이런 사람은 처음이라며 수동 공격을 하곤 한다. 사회화가 덜 되었다는 말도 하는데, 그렇게 살지 않아도 꽤 괜찮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게 배가 아픈 게 아닌가 한다. 혹은 바뀌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용기가 없는 게 화가 나서 한풀이를 한 걸 수도 있다. 부모님이 바쁘셔서 신경을 못 쓴 게 아닌가 따위의 말도 서슴지 않는데.. 우리 부모님은 남에게 피해를 주고 살지 않는 것보다는 스스로를 위하는 삶을 살길 바라셨고, 힐난받은 기억보단 지지받고 사랑받은 기억이 있다.


다들 에너지가 넘치는구나 하다가도, 어쩌면 자기처럼 살지 않아도 꽤 괜찮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게 배가 아픈 게 아닌가 한다. 혹은 바뀌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용기가 없는 게 화가 나서 한풀이를 한 걸 수도 있다. 양육이란 게 커서도 계속되고 유년 시절의 토양도 있지만 그 이후의 삶이 훨씬 길기 때문에 성인이 되고 나서도 부단히 다져야 하는데 쉽진 않겠지 하고 이해하다가도 상처를 받는다. 미세 공격이 만연한 사회에서 살아남으려 다들 애쓴단 생각이 들다가도 무례하다 느껴진다. 공감 능력이 없는 게 아니고 선택적 공감을 한다고 하는데 공감 피로로 내 건강을 해치고 싶지 않다.


공부는 끝이 없고, 나는 이번에도 여기 친구들이 하는 신세 한탄 관련 잔뜩 배우고 있다. 예를 들면, 더 이상 하고 싶지 않고 원하지 않는다는 그런 의미의 j’en peux plus를 jpp로 줄인다든지 참을 수 없다고 말할 때 c’est insupportable을 insup으로 줄여서 말한다.  Je suis en PLS 라도 해서 쓰러져서 일으켜 세울 때 옆으로 누워서 들어야 하는 상태 position latérale de sécurité라고 해서 뭘 더 할 수 없어서 도움이 필요한 상태일 때 쓰는 표현을 새로이 배웠다. 여기 애들도 화가 많구나 싶었다. 그런 걸 알아서 어디 써먹느냐고 말할 수 있겠으나 나는 이런 걸 배우는 게 재미있다.


서로의 경험과 배움의 기쁘을 나누기만 해도 모자란 세상인데 여유가 점점 없어진다. 그런 데 그럴 때일수록 서로를 인정하고 배려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힘든 세상에 매일 살아내고 있음을 다독여줘도 모자란 판인데, 이러니 저러니 어쩌니 하고 싶지 않다. 별 수 있느냐고 말하지만 분명, 조금씩 매일 다르게 할 수 있다. 자주 좌절하고 지치고 고되지만 누가 뭐래도 굴하지 않고, 숱한 가스라이팅에도 스스로를 인정하고 또 남을 인정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나로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돌이켜보니 갭이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