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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u May 24. 2020

(8) 선수협 창립기념일의 광경 (부실한 권리)

직장인 늦깎이 유학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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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선수협 창립기념일의 광경 (부실한 권리)



2000년 1월 21일 저녁 63 빌딩에서 열린 프로야구 선수협의회(이하 선수협) 창립총회는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다. 390명의 프로야구 선수들이 선수협 설립에 동의하는 서명을 하였으나 이날 모인 선수들은 100여 명 남짓이었다. 선수협의 창립을 반대하는 구단들이 선수들의 참석을 막기 위해 선수들에게 압력을 가하거나 대놓고 전지훈련을 보내 참석을 막았기 때문이다. 구단과 여론의 눈치를 살피던 선수들은 63 빌딩에 도착해서도 막상 총회장에 입장하지 못하였다. 누가 먼저 입장을 하느냐를 놓고 선수들 간에 유치한 실랑이가 벌어질 정도로 눈치 싸움은 이어졌고 개회는 계속해서 지연되었다. 이 총회는 어떻게 준비되어야 하는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채 열린 것 같았다. 열릴지 안 열릴지는 모르지만 열린다면 굉장히 역사적일 수 있는 그래서 기자들과 팬들이 선수들보다 많이 운집한 이상한 총회였다.


기자들과 팬들이 선수들보다 많이 운집한 이상한 총회

선수협 창립총회


결국 기나긴 눈치싸움 끝에 75명의 선수가 남아 자정이 넘은 시간에 선수협 창립을 선포했다. 프로야구가 생긴 지 19년 만의 일이었다.


KBO는 선수협 창립 선포 당일 창립 선언에 참가한 75명의 선수의 방출을 결정했다.(이 결정은 추후 취소되었다) 친목 도모의 목적으로 세운 협회가 아니라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다행히” 이들을 제외하고도 프로야구를 진행하는데 문제가 없다며 가뜩이나 짧은 선수생활을 단축시켜 주었다. 75명이면 프로야구 한 팀의 1군 엔트리 25명의 세 배에 달하는 숫자인 데다가 선수협 창립총회에 참석한 75명의 선수들은 대부분 베테랑 스타플레이어들이었는데 이 선수들을 제외하고 프로야구의 진행에 무리가 없다는 판단도 놀랍다. 


KBO는 선수협 창립 선포 당일  창립 선언에 참가한 75명의 선수의 방출을 결정

당시 KBO의 총재였던 박용오 총재는 선수 개인이 문제가 있으면 구단과 상의를 하면 되지 집단행동을 한다며 불만을 표출하였다. 구단과 KBO는 집단이라는 것을 잊은 것인지 아니면 권익 보호를 위해 집단을 만들 수 있는 직업군은 따로 존재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발언이었다. 그는 결국 프로야구를 없애버리겠다는 발언까지 하여 역설적으로 선수들을 옹호하는 여론이 생겨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프로스포츠의 주인은 선수와 팬 그리고 구단 이어야 하지만 그는 자신만이 프로야구 존폐를 결정할 수 있다는 양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에 팬들의 반감을 사는 것은 당연했다.



선수들이 구단의 소유물이라고 인식되던 당시 학교 졸업 후 프로팀에 입단을 하면 종신 계약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프로야구뿐만 아니라 거의 다른 모든 프로 스포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계약기간이 없는 이름과 연봉만 있는 계약서에 묶인 선수들은 팀을 옮기고 싶어도 옮길 수 없었고 해외 진출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은 평생 한 팀에 몸 담은 원클럽맨이 존중받는 시대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불합리한 계약 관계로 인해 거의 모든 선수가 원클럽맨인 것이 당연했다. 연봉도 구단에서 제시하는 것을 거의 일방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에 구단의 자금 사정이 좋지 않은 팀에선 아무리 좋은 성적을 내어도 보상을 받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런 불합리한 계약 관계 아래서도 그들의 권익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협의회를 구성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일반인보다 연봉을 많이 받는 선수들이 하라는 운동은 안 하고 집단을 만들어 돈만 밝힌다는 프레임은(마치 노동자가 귀족이 되는 귀족노조 프레임과 비슷하다.) 아주 쉽게 씌워졌고 여론도 이에 따라 가볍게 움직였다.  


구단의 자금 사정이 좋지 않은 팀에선 아무리 좋은 성적을 내어도 보상을 받는 것은 불가능

우여곡절 끝에 결성된 선수협은 내외부적으로 다양한 진통을 겪으며 지금까지 겨우 유지되어 오고 있다. 아직도 미국이나 일본의 프로야구 선수 노조에 비하면 그 역할이나 권한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지만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선수들의 불합리한 처우를 개선하는 데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가장 큰 변화는 선수협이 생긴 이후로 구단과의 계약 기간이 확실해졌다는 것이다. 즉 선수들은 구단에 입단하여 일정 기간 동안 규정 경기 수 이상 출전을 하게 되면 자유 계약 신분이 된다. 이 때는 계약을 할 때 시장에서 형성된 가격으로 실력을 보상받을 수 있고 경우에 따라 해외 진출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프로 선수들의 최저 연봉 또한 많이 개선되어 어린 선수들이 경제적 곤란을 겪지 않을 수준의 연봉을 보장받게 되었다. 작은 변화도 많이 일어났는데 일례로 겨울 비급여 기간 동안의 단체 훈련 축소와 같이 계약관계에 기반하여 구단의 일방적인 요구를 거부하기도 했다. 이처럼 선수협은 다양한 부분에서 선수의 권익을 스스로 지키기 위한 목소리를 내어 왔다. 아직도 선수들과 KBO, 선수들과 구단 간의 완전한 소통창구로 선수협이 인정되고 있지는 않으나 적어도 중대한 의사결정을 내릴 때 선수협의 의견을 듣는 것 정도는 자연스러운 문화가 되었다.


계약관계에 기반하여 구단의 일방적인 요구를 거부

선수협 결성 과정에서 그리고 그 이후 발생한 많은 문제들도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 어떻게 개인의 권리를 챙기고 개선시켜야 할지 배우지 못한 우리는 선수협 창립총회에 입장하지 못하는 선수들처럼 집단의 눈치만 살피고 있다. 개인의 권리를 어떻게 존중하고 타인의 권리를 어떻게 침해하지 않을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서로 의도치 않은 상처를 주는 상황이 사회 어느 곳에서든 빈번하게 생긴다.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아직 부자연스러운 행위이다. 권리를 주장하려면 먼저 내가 왜 권리를 가질 권리가 있는지 법적, 철학적 근거가 분명하고 이것이 설명 가능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상당한 공부와 대화 훈련, 그리고 무엇보다 이 훈련을 가능하게 할 토론/대화의 문화가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아직 부자연스러운 행위

또한 요구되는 권리가 합당한 경우 이것이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어야 하지만 집단의 권위가 강한 이 사회에서는 합법적인 권리를 주장하는 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다. 이런 분위기는 당연히 집단의 경쟁력을 우선시했고 노동권과 생명권은 외면했다. 사회가 사람들을 보호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 존엄성은 자연스럽게 상실되었다. 우리는 선진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개인이 살아가는 사회를 좋은 사회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사회를 찾아 경험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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