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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Nov 11. 2020

11월 10일의 하루

색다른 느낌의 감사인사

이른 저녁을 챙겨 먹고 어김없이 노트북을 챙겨 동네 카페로 향하던 길이었다.


내 몸집의 두배는 넘어 보이는 폐지들을 가득 실은 손수레가 골목길 정중앙에 홀로 버려져있었다. 그냥 지나치려는 순간 손수레 위로 쌓여있는 폐지 무덤 맨 꼭대기에 아슬아슬하게 올라가 있던 박스 한 묶음이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졌다.


잠깐 고민했다. 그냥 지나칠까....


그때 야속하게도 등이 90도로 굽은 왜소한 체격의 할머니가 빌라 앞에 버려진 박스들 테이프를 뜯으면서 정리하고 계신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 이거 그냥 맨 위에 다시 올려드릴까요?"


어쩔 수 없이 떨어진 박스들을 주워 들고 크게 외쳤지만 할머니는 미동도 없으셨다. 그렇게 어색하게 멀찍이 떨어진 채 두세 번 더 할머니를 애타게 불러봤지만 귀가 많이 어두우신 것 같았다.


이미 내 손에는 떨어진 박스 한 묶음이 들려있고 이대로 다시 놓고 가던 길을 계속 갈까 고민했지만, 할머니 쪽으로 좀 더 걸어가서 다시 한번 여쭤봤다.


"할머니! 이거 떨어졌는데 맨 위에 올리면 되나요?"


그제야 천천히 날 올려다보면서 고맙다고 맨 위에 올려달라고 하셨다. 그렇게 박스 묶음을 맨 위에 올려두고 돌아서는 찰나에 고작 종이테이프를 힘겹게 뜯어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이거까지 도와드리는 건 오지랖인 거 같은데 그냥 갈까'

그렇게 또 멈칫했지만 이미 난 할머니 앞에 쭈그려 앉았다.


"할머니 제가 금방 해드릴게요"

"추워 추워.. 아가씨 장갑도 없이 안돼..."


날 걱정하시는 할머니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난 박스를 바로 해체해버렸다.


"아이고 고마워라... 고마워... 세상에... 고마워라... 이거도 저기 위에 같이 올려줘~"


잘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와 뭉개진 발음으로 얘기하셔서 잘 알아듣진 못했지만 너무 자연스럽게 나한테 일을 추가로 더 부탁하시고 계신 건 확실했다.


'어 뭐지, 나 잘못 걸렸나... 나 이러다가 손수레까지 끌어드려야 하는 건 아니겠지..?'


조금 불안했지만 다행히 그런 건 아니었다. 그렇게 추가로 박스를 더 올려드리고 할머니가 손수레 끄는 모습을 조금 지켜보다 할머니 가는 길 반대방향으로 발걸음을 뗀 순간 또다시 박스 묶음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곧바로 되돌아가서 떨어진 박스를 올려드리고 할머니가 건네준 작은 박스를 밑에 끼워 넣어서 더 이상 떨어지는 박스들이 없도록 도와드렸다.


나는 반대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할머니께 말씀드리고, "어두운데 조심히 가세요~"라고 인사드렸다. 이젠 정말로 다시 가던 길로 걸음을 옮겼다. 할머니가 반대방향으로 가면서도 연신 "아이고 고마워서 어째.. 세상에... 너무 고맙네.."라는 말이 들려와서 내심 뿌듯한 마음이었다.


그때 내 눈에 할머니 손수레 때문에 지나가지 못한 검은색 중형 자동차 한 대가 들어왔다. 라이트를 밝게 킨 채로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데 왜 못 봤을까... 그냥 지나치려는 순간 운전자가 창문을 내렸고 중년의 남성이 날 쳐다봤다.


'혹시 오래 기다렸다고 짜증 내는 건 아닐까. 나한테 뭐라 하는 거 아닌가'

살짝 쫄았다. 나한테 뭐라고 하면 바로 도망치기 위해 뒷발에 힘을 싣는 순간, 오히려 환하게 웃으면서 나한테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


반사적으로 "아, 아니에요. 기다려주셔서 감사해요"라고 답은 했지만 순간 멍해졌다.


왜 저 운전자가 나한테 고맙다고 한 걸까? 내가 제3자의 감사인사를 받을 만큼 한 게 있나?


난 평소에 노인분들을 돕고 그런 일을 할 정도로 선행을 베풀지는 않는다. 지하철 역 근처에서 나눠주는 광고지들도 "죄송합니다" 한마디만 하고 제대로 보지도 않고 지나치며, 길가에서 할머니들이 파는 채소들을 샀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난 단지 내 눈앞에 박스들이 떨어졌고, 그걸 본 사람은 나뿐이고, 이미 본걸 그냥 지나치기엔 마음이 찝찝해서 도와드린 것뿐이다. 제 3자인 운전자의 예상치 못한 짧은 감사인사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감정을  가져왔다. 추운 날씨에 폐지 줍는 할머니를 도와드렸다는 뿌듯함과는 다른 기분이었다.


내가 안 도와드렸더라면 더 오래 기다려야 했는데 시간을 단축시켜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일까?

내가 아니었다면 본인이 내려서 도왔어야 했는데 그걸 내가 대신해서 고맙다는 걸까?

아니면, 정말 순수하게 학생(으로 보이는)이 할머니를 도와드린 것에 대한 어른의 격려일까?


단순한 감사 인사 한마디에 이렇게까지 깊게 생각하는 건 내가 과장해서 생각하는 게 맞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3자의 감사 인사를 직접적으로 받아본 적이 없었던 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결국 개운한 답을 내리지는 못했다.


그래도 아직까지 가슴에 남아있는 이 복잡 미묘한 감정은 생각보다 썩 나쁘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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