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포드 기어츠는 그의 저서 "The Interpretation of Cultures"에서 인간은 자신이 만든 상징의 그물망 속에 매달려 있는 존재라고 말했다.
1972년 12월,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리 아버지는 대학교 1학년이었다. 가난했던 아버지는 과외를 하며 학비를 벌었다. 어느 날 밤, 가르치던 학생의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서울시민회관에서 조명장치가 터지는 바람에 큰 화재가 발생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학생이 거기서 열린 콘서트갔는데 돌아오지 않았다고. 너무 걱정되어 가보아야겠는데 혼자 가기 무섭다고. 아버지는 부탁을 거절하기가 어려웠다고 했다. 시신이 가득한 사고 현장에 가는 것이 무섭긴 했지만, '뭐, 난 남잔데.'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사고현장에 도착해 학생 어머니와 아버지는 학생을 찾기 위해 시신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시쳇더미 속에서 아버지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공포를 느꼈다. 그 후 수 십년 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잠을 자다가 소리를 지르거나 잠꼬대를 한 것을 들은 적이 더러 있었다. 엄마는 꿈 속에서 공포에 시달리는 아버지와 잠자리를 함께 하는 것이 불편하다고도 했다.
"아빠, 무엇이 아빠를 그렇게 무섭게 했어요?"
"음... 시체를 본다는 것! 시체를 보는 게 그렇게 무서울 줄 몰랐거든? 그런데 막상 보니까 무섭더라고."
죽어있는 몸. 정신 현상이 더이상 작동하지 않는 물질 덩어리. 물질 덩어리이기는 하지만 시체는 대면하지 않고 있던, 무의식 아래로 꽁꽁 숨겨두었던 죽음의 불가피성을 상기시킨다. 생존 본능을 좌절시키는 죽음의 표상 앞에서 아버지는 공포와 불안에 휩쌓였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그러나 시신을 보며 공포를 느끼는 것이 언제나 당연한 것은 아니다. 여자 장의사 '케이틀린 도티'가 쓴 책,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에는 시체를 마치 우리가 스마트폰을 다루듯 다루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를테면 화장장에서 시신을 방부처리하는 사람들. 계약직 방부처리사 브루스는 농담까지 주고 받으며 시체의 피를 뽑고 마사지하고 포름알데히드 용액을 주입한다. 도티는 브루스라면 커피를 마시면서도 이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브루스는 시체들을 보며, 심지어 그것을 해체하고 그것의 피를 뒤집어쓰면서도 아빠가 느꼈던 공포를 느끼지 못한다. 그에게 시체는 물질 덩어리이자, 자신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능숙하게 처리해야 할 업일 뿐이다. 수많은 시신을 방부처리하며 그는 시신으로부터 죽음에 대한 관념들을 분리시킬 수 있었고, 죽음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았을까?
만약 '죽음'을 떠올릴 때, 공포나 불안에 사로잡힌다면, 그것은 내 눈 앞에 호랑이가 달려들어 편도체가 흥분하고 편도체의 흥분에 의해 신체적인 반응이 일어나는 현상과는 좀 다르다. 그것은 직접적인 생명의 위협에 대한 신체적인 반응이라기 보다는 사회 문화적으로 학습된 이야기, '죽음은 이러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수많은 이야기로 엮어진 '의미의 그물망'에 단단히 사로잡혀 있음을 의미한다.
다행히 아버지는 이제 악몽을 꾸지 않으신다. 하지만 도처에 널려있는 의미의 그물에 걸리지 않으려면 외부에서 나에게로 다가오는 기호들과 내면에 세뇌된 채 나를 조종하는 있는 기호들의 맥락과 진위여부를 알아채고 스스로 의미를 선택하고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도처에 그물들이 있다. 그물들을 탐색하는 것, 그물들을 통과하는 것, 그물들을 활용하여 새로운 그물들을 엮는 것, 이 모두는 흥미롭다. 그런데 그래도 그물들은 그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