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 집 할머니는 혼자 사신다. 재작년까지는 할아버지와 함께 사셨는데, 코로나에 걸리신 후 할아버지의 지병 증세가 악화되어 이제 할머니 혼자만 남게 되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을 때, 할머니는 내게 물었다. '혼자 살면 외롭지 않아? 나는 너무 외로워.' 할머니는 곧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르신을 어떻게 달래주어야 할지 몰라서 어색한 얼굴로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약이긴 한가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년 가까이 된 지금 할머니는 명랑한 얼굴로 다니신다. 여든이 훨씬 넘으셨는데도 활력 넘치시는 모습을 보면 보고 있는 나마저 기분이 좋아진다. 할머니 댁에는 자녀들이 자주 방문한다. 손주도 한 명 있는데 이제 제법 훌쩍 컸다. 갓 태어났을 때부터 그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간간히 보았다. 엘리베이터나 현관문 앞에서 만날 때마다 우리는 인사를 주고받는다.
어제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아이를 만났다.
"이제 몇 학년이지?"
"중학교 1학년이요."
"아, 벌써? 아기 때부터 봤는데. 이제 다 컸네요."
"네."
문득, 아이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중학교 1학년이면 뭐에 가장 관심 있어요?"
아이는 대답했다.
"게임이요."
"어떤 게임을 하는데요?"
"@#$%*+^이요."
"그게 어떤 게임이죠?"
"총 쏘는 게임이에요."
"아... 총 쏘는 게임이구나..."
총을 쏘아서 목표물을 제거하는 게임을 아이, 아니 학생은 즐기고 있었다. 내가 너무 평화로운 것들만 선호해 왔나? 전에 남자친구가 전쟁과 살인 게임을 즐긴다고 할 때도 뭔가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워서 어색했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랫동안 잔인한 장면이 나올 법한 영화나 드라마는 모두 피하고 있었다. 더 글로리나 오징어 게임이 한창 유행할 때도 폭력적인 장면, 광기 어린 장면이 나올 것 같아서 보지 않았다. 뉴스를 보지 않기 시작한 이유도 비슷한 이유 때문이다. 어린이나 동물을 살해한 이야기, 데이트 폭력, 가족이나 이웃 간의 범죄와 관련된 소식들을 듣는 걸 의도적으로 피했다. 그런 이미지와 이야기들을 피할수록 나의 일상은 잔잔하고 평온해져 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궁금했다. 왜 이토록 폭력물과 관련한 콘텐츠 사업이 번성하고 있는 것일까? 공포 영화, 마피아 영화, 전쟁 영화 등은 끊임없이 유행을 거듭한다. 시대를 거슬러올라가 기원전에도 신화와 전설 등에도 온갖 종류의 폭력이 등장한다. 그리스 비극은 복수극의 시조 아닌가? 셰익스피어의 비극들만 봐도 친척, 형제, 부모자식 간에도 살인이 난무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폭력에 매혹당해 왔던 것이다.
예전에는 성선설이나 성악설과 관련한 논의를 하기도 했지만, 진화생물학이 발달한 요즘 우리는 인간의 본성은 진화가 진화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알고 있다. 인간은 진화 과정에서 수많은 위험에 노출되었고, 폭력에 대처하는 능력이 높을수록 생존이 유리했다. 공격적 성향을 가진 개체가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경우도 많았다. 폭력적 성향은 쾌감에 끌리는 성향과 마찬가지로 진화의 산물이다.
하지만 이 폭력적 성향이 얼마나 오랫동안 인류를 거대한 고통으로 몰아갔는가. 지난 세기의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만 해도 그렇다. 그래서인지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은 인간의 폭력적 본성에 주목한 작품들을 만들어 낸다.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출신의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인간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퍼포먼스 작가로 유명하다.
1974년,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나폴리의 한 전시실에서 전례 없는 퍼포먼스를 열었다. 퍼포먼스 현장에는 72개의 도구가 준비되어 있었다. 깃털, 장미, 향수 등 쾌락의 도구와 칼, 가위, 면도날, 장전된 총 등이었다. 관객들은 그 도구로 마리나를 사물처럼 대해도 되었다. 발생할 수 있는 결과에 대한 법적 책임은 마리나가 전적으로 지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처음에 사람들은 머뭇거렸지만, 시간이 흐르자 마리나에게 달려들어 자신들의 욕망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옷을 뜯고, 폭행하고, 키스하고, 도구로 상처를 내는 등. 총을 겨누는 사람까지 있었다. 마리나는 저항하지 않았으나 눈물을 흘렸다. 벗겨진 몸으로 서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눈물을 닦아주고 옷을 입혀주는 이도 있었다. 퍼포먼스가 끝났을 때, 그녀에게 폭력적 행위를 했던 사람들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리듬 0'이라는 제목의 이 퍼포먼스는 6시간 동안 벌어졌다.
이 퍼포먼스에 대해 접했을 때,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를 떠올렸다. 이 소설은 모든 사람들이 눈이 먼 전염병에 걸린 상황에서 홀로 멀쩡히 눈을 뜬 여인이 지켜본 인간의 폭력성을 그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며 법과 제도적 장치의 제어력이 부재한 상태에서 사람들은 도둑질, 폭행, 강간, 살인마저 서슴지 않는다. 타자에 대한 이해나 공감은 없다. 오직 자신의 욕구 충족만이 전부인 신체들. 진화는 호모 사피엔스의 신체에 그토록 깊은 폭력의 흔적을 남긴 것일까?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떠올린 적이 또 있다. 유튜브에서 한 생물학자는 기후위기가 심각해지면, 생존 위협이 극심해진 상태에서 전쟁이나 폭력적 상황이 일어나면서 사회 안전망이 해체될 수 있다고 경고 했다. 그때 무법지대에서 살인과 강간을 일삼는 눈 먼자들의 형상 떠올랐다. 기후 위기로 식량난이 생기거나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호모 사피엔스는 지금의 평화롭고 안정된 상태에서처럼 내면의 폭력성을 제어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이 오랫동안 머물렀다.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는 그의 저서, “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 Why Violence Has Declined”(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들: 왜 폭력은 감소했는가)에서 인간의 폭력에 역사에 대해 다룬다. 그는 침략과 약탈, 식인의 풍습까지 있던 선사시대 인류의 폭력성에 대해 거론하며, 인간 사회가 역사적으로 폭력을 줄이고 평화와 번영을 향해 나아가는 진보의 과정을 거쳐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진보는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수없이 고통을 성찰하고, 사회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헌신이 있었겠는가. 잠시 짐작해 보아도 숙연해진다. 그 덕분에 현재 나는 직접적인 생존의 위협 없이 진화와 문명이 선물해 준 천국과도 같은 일상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붓다가 말했 듯 모든 것은 변화하고 영원한 것은 없다. 인류의 역사를 조망하며, 그리고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며, 생존 기계에 내재한 두려움과 폭력성을 사유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