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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본 유학생 상도 Jun 24. 2023

집단에 있어서의 한국와 일본의 차이

일본의 단체주의와 한국의 단체주의 비교

미리 양해 말씀을 구하자면, 이번 글은 상당히 노잼입니다.

그래서 최대한 재미있게 쓰기 위해 약간의 욕설과 날 것의 표현(?)을 쓸 예정입니다.

부디 너그러운 눈길로 봐주셨으면 합니다.



이 인간은 유학에서 뭘 얻고 싶었을까?

유학은 생각보다 고평가 되어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만큼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사람은 유학에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기 않기 때문이다.


유학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보면, 일본에 공부를 하러 온 것이 아니다.

다들 일본에서 관광을 하러 온 경우가 많고, 돈을 쓰며 즐기러 온 느낌이 강하다.

나는 그런 것들을 보면서 과연 그게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되뇌인다.


어떤 사람은 외국에 살면서 문화를 느끼고, 배우는 것만으로도 공부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외국에서 즐긴 경험이나 생각이 무언가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한국에 있어도 마찬가지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또, 제대로 된 목표를 갖지 않고 길을 걷는 것과 목표를 갖고 걷는 것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1가지를 얻을 수 있을 때, 목표의식을 명확히 가진 누군가는 5가지를 얻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세상의 모든 것을 단적으로 확정 지을 수는 없다.

운이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하고, 수많은 우연과 확률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목적의식을 확실히 가진 사람이 가지지 않은 사람보다 통계적으로 더 많은 것을 얻으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유학에서 갖고 있었던 목적의식은 “일본인은 도대체 뭔 생각을 하고 살까”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래서 1년 동안 뭐 했는데

나의 목적의식은 “일본인론”.

일본인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았으며, 저 인간들이 왜 저렇게까지 성공했느냐에 대한 것이다.

나는 일본이라는 민족과 민족성에 대해서 참을 수 없을 만큼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내가 일본에 도착하고 시도한 것은 “만남과 대화”였다.

순수한 호기심을 가지고 일본인을 만나서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었다.

지난 10개월 간 미친 듯이 말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나만큼 일본인과 만나보려 한 유학생은 상당히 드물 거라고 생각한다.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대화를 시도하고, 동아리에 가입하며, 아르바이트에 들어갔다.

그 속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한 시도를 끊임없이 했다.

심지어는 일본인의 번호를 따보기도 했다.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그들과 만나 카페에서 대화를 하거나 같이 시간을 보냈다.

물론 좋은 일만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좋지 않은 일들이 머릿속에 더 오래 남아있다.

하지만 나는 계속 이어나갔고, 7개월 정도가 지났을 무렵 나름의 대답을 냈다.


그리고 7개월 정도부터 “일본인 종특”이라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이야기는 “일본인은 집단주의이지만 왜 개인주의를 지향하는가?”에 대해서이다.

또, 한국도 집단주의를 가지지만 왜 일본과는 다를까에 대한 이야기다.

 


일본과 한국의 집단

한국이나 일본이나 “집단”을 중시한다는 점은 같다.


내가 초창기 일본에 왔을 때, 한 가지 착각했던 점 중의 하나가 “일본은 집단에 소속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였다.

일본은 “개인 플레이”라는 이미지가 되게 강하다.

그런 탓에 그런 착각을 했는데, “일반적인 일본인”이라면 집단에 소속하는 것을 매우 매우 중시한다.

내가 그런 이미지가 있던 이유는 아마 씹덕 문화로 일본을 바라봐서가 아닌가 싶다.


어쨌건 일본도 한국만큼이나 집단을 중시한다.

집단에 속하기를 좋아하고, 그 속의 일원으로서 살아가고 싶어 한다.

사실 이 부분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한국과 일본이 무엇이 다를까 하고 생각해보면 “참견”과 “개인주의”이다.


한국의 집단은 대개로 “다른 사람에게 간섭하기“를 좋아한다.

한국인은 어딘가 모를 표준성이 존재하고, 그곳에 속하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가장 흔히 들어볼 수 있는 게 “옆집의 누구누구는 학원을 다니고, 20살에는 어떤 대학을 가야 하고” 같은 국민 테크다.

절대적 진리도 아닌데, 우리는 지인에게 이걸 강요하고 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말이다.


그에 비해 일본의 집단은 “너 알아서 하세요”라는 걸 좋아한다.

일본은 집단에 뭉치는 걸 좋아하지만, 그 집단의 일에서 벗어난 순간 개인적인 시간을 존중한다.

여기서 “시간을 존중한다”라는 표현을 썼지만, 정확하게는 “건들지 않는다”라는 말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차이는 도대체 어디서 발생할까?



한국과 일본의 집단은 뭐가 다르길래

한국과 일본의 집단이 탄생한 이유는 결국 “생존”을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라는 동물이 혼자서 살아가는 것보다 협력을 하고 같이 살아가는 것으로 더 나은 길을 모색할 수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발전의 과정이 조금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한국의 경우, “땅 떵어리가 좁다”라는 이유가 간섭의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예전부터 한국은 개인 프라이버시가 지켜지지 않을 수준으로 다른 사람과 밀접한 촌락에 살았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에게 간섭하는 일도 많아지고, 참견하게 되는 게 많아지는 게 아닐까 싶다.


반면 일본의 경우, “생존”, “평균”, “민폐”의 3가지가 이걸 만들어내지 않았나 싶다.




“생존”은 단순하게 말해서 정말로 집단에 속하지 않으면 죽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일본에 와서 가장 먼저 내가 마주한 것은 태풍이었다.

우산이 부러질 뻔하고, 전철이 멈췄다.


겨울에는 폭설이 내려서 교통이 마비되고, 아르바이트하던 가게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최근에는 가벼운 지진을 느끼기도 했다.

이러한 자연재해와 사고들이 비일비재한 곳이 일본이다.


환경적으로 일본은 “집단의 힘“이 한국보다 클 수밖에 없고, ”여기에서 밀려나면 안된다.“라는 생각이 유전자에 박혀있지 않나 싶다.



“평균”이라는 것은 무리에 무난하게 속하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한다.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단체에서 배제될 확률이 올라간다.

단체에서 배제되는 것은 인간에게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히며, 과거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본에서는 “분위기를 잘 맞춰야 한다”나 “눈치가 빨라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그게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집단에 융화되기 쉬운 무난한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오래 살아남는다.

그게 일본 사람들이 적응하기 위한 생존 전략이 아니었을까?


그 때문에 나는 ISFP와 ISFJ 유형의 성격이 일본에 가장 많으리라고 생각했다.

이 둘은 사회에서 가장 무난한 성격이기 때문에 말이다.

또, 실제로 내가 가장 많이 본 유형의 사람들이기도 하고 말이다.




 타인에게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됩니다.


나는 이 문구가 굉장히 무섭다.


저 문장 하나로 일본에서 일어나는 각종 문제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다.

내가 저 문장에 때문에 피해를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사실 피해라기보다는 오해와 다툼의 연속이었다.


또,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일반적인 일본인“의 이미지에는 저 말을 삶의 규율로써 지킨다.

그 탓에 그들은 외국인과 이해하기가 힘들고, 큰 장벽이 생긴다.

솔직하게 말해서 내가 저 문장에 대한 의미를 깨달은 후, “더 이상 일본인 친구를 사귀지 말자”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자식 왜 이렇게 근들갑(호들갑) 떠냐?”, “민폐 안 끼치면 좋은 거지 멍청한 건가”라고 말이다.

나는 이런 이들에게 오히려 반박해주고 싶다.


“실제로 일본인 만나서, 몇 달 같이 지내보고 지껄이라고”


아마 이 글만으로는 내가 전하고자 하는 것이 명확하게 전달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폐”라는 것이 관념적인 것이고, 그걸 글로 전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

또, 한국인의 입장에서 일본인의 “민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그저 사회도덕이 좋은 정도의 인식이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민폐”라는 것이 문제인 이유를 이야기하자면, 사람마다 “민폐의 범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서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문제가 없을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연애”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일본인은 한국인처럼 “간섭”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 간섭이 그 사람에게 민폐가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이는 “감정적인 소모”가 심해진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에 대해서 계속해서 생각하고, 고민한다.

특히나 외국인이면 그걸 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그 탓에 일반적인 일본인과 외국인이 친해지기는 참으로 어렵다.

외국인은 자신에게 조금 실례를 저질러도 상관없지만, 일본인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난 도대체 어떻게 일본인 친구가 이렇게 많아졌을까..

내가 “일본인의 민폐”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일본인을 알고 싶어서, 이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행동이 그들의 문화에서는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알았다.

그 탓에 나는 6개월 정도가 지났을 무렵에는 일본인과의 만남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일본인 답지 않은 일본인”을 만나게 되었다.

자기 스스로 그런 말을 하는 자식이니 나만큼이나 제정신이 아닌 녀석이다.


일반적으로 일본인과 “일본인론”이나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친구는 조금 달랐다.


그런 것부터 시작해서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어느 순간 나에게도 무리가 생겼다.

무리라고 하면 이상하지만, 사고관이 같은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분명 일본 사람이랑 구태여 친해지려는 생각을 안 하고, 이 사람들의 문화를 깨달았을 뿐이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과 만났다.

내가 지금 속한 집단은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보기 힘든 이상한 집단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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