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우리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평생을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고 당신 자신을 위한 것에는 십원 한 푼도 아깝다며 지갑을 열지 않으셨다. 화장품 냄새가 싫다며 세안하고는 수건으로 닦고 두 손으로 슥슥 문지르고 머리 빗는 것으로 엄마의 외출 준비는 끝났다. 외출이라 해야 교회 가는 것이 유일한 엄마의 중요한 주말 일정이었다. 평생을 교회와 집, 동네 품앗이로 지내온 엄마.
큰 오빠가 결혼을 할 때도 엄마의 헤어와 메이크업은 내 손에 맡겨지고 생전 처음으로 화장이라는 걸 해보셨단다. 엄마가 결혼식의 주인공인 신부였을 때는 당연히 하셨을 테지만 말이다. 엄마는 그렇게 검소하게 평생을 살아오셨다.
특히, 병원 가시는 것을 싫어하셔서 아버지와 늘 잦은 다툼이 일곤 했다. 그러다 엄마가 처음으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식사를 전혀 못하시고 장에 문제가 있는지 설사가 멈추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러다가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지 열흘이 지나서야 엄마를 만날 수 있었다. 엄마의 모습은 바람 불면 날아갈 듯 뼈 밖에 남지 않은 가냘픈 모습이었다.
안부전화를 드리면 늘 괜찮다고 하시던 엄마가 야속하고 속이 상했다. 아프다고 병원 좀 데려가 달라고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후로 엄마는 "마지막 소원이니 정밀검사를 받아보고 싶다"라고 하셨다. 종합병원에서 담당의사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는 가망이 없어 보인다고 고개를 저으며 요양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이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엄마의 마지막 소원이라는 말을 하자 간단한 진료를 하고 입원절차를 밟았다.
엄마와 함께 병원에 있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자녀가 없는 나는 기저귀 한번 갈아본 적도 없었고 옷을 갈아입혀본 적도 없었다. 더구나 아기도 아닌 노모의 모든 수발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그래도 닥치면 해야 하니 미리 걱정은 접어두기로 했다. 엄마와의 전쟁 같은 시간들이 시작되었고 급기야 기저귀를 하루에 열 번 이상을 갈아야 하는 날들도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원 생활은 엄마와 막내딸에게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 가는 소중한 시간들로 채워졌다.
퇴원은 했지만 거동을 할 수 없어 요양원에 모시게 되었다. 92세이신 아버지는 엄마와의 생 이별에 밤낮으로 괴로워하셨다.
어떤 것이 가장 최선인 건지.....
아버지는 엄마의 빈 베개에 얼굴을 묻고 이부자리에 당신의 몸을 누이며 통곡을 하셨단다. 엄마의 체취를 간직하려 지금까지도 그러신 모양이다.
이번 추석은 엄마 없이 처음으로 맞이하는 명절이었다. 친정에 가는 것이 어색하기도 하고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아버지와 형제들을 우리 집에서 맞이하기로 했다. 요양원에 계시는 엄마의 말씀이 "나는 안 가니? " 하셨단다.
가끔 전해져 오는 요양원에서의 생활 풍경을 보면 마음이 저려 온다.
'엄마가 왜 거기 있어요?'
나는 오늘 엄마를 위한 테이블을 준비했다. "나는 안 가니? "하시는 엄마의 음성이 메아리처럼 귓가에서 윙윙거렸다. "엄마가 올 수 없으니 제가 갈게요."라는 혼자만의 독백으로 엄마와 대화를 해본다.
내 직업은 푸드코디네이터이다. 푸드코디네이터라는 직업은 테이블 세팅, 공간연출, 요리등 전반적인 일들을 총괄해서 하는 일이다. 요양원 정원에 테이블을 펼쳐 공간 연출을 하고 음식을 담고 엄마를 맞이했다. 엄마의 모습에서 평안함이 느껴졌다.
아버지와 엄마에게 올려드린 요양원에서의 만찬이 7성급 호텔에서의 그 어느 것보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만찬이었다.
엄마는 요양원 사람들에게 멋진 추석 선물을 한 아름 안겨 주어 고맙다고 행복한 목소리로 전화를 하셨다.
이제 엄마의 "나는 안 가니?"의 가슴 아픈 메아리가 아닌 "엄마, 제가 갈게요"라고 먼저 전화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