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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May 02. 2022

서사를 이끌어 가는 대화

대사는 이용당했다

<우연과 상상>은 <드라이브 마이 카>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이자 세 편의 단편을 엮어 만든 소품같은 영화다. 걸작임에도 러닝타임이 길고 등장인물이 많아 관객을 부담스럽게 만들었던 전작과는 달리 <우연과 상상>은 두 시간여의 적당한 러닝타임에 편당 주요 등장인물의 수가 세 명을 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줄어든 등장인물의 자리를 꿰찬 것은 이들이 나누는 대화다. 이들의 대화는 때로는 독백의 형태로, 때로는 낭독의 형태로, 때로는 상황극의 형태로 발현되어 우연을 드러내거나 상상을 이끌어 낸다. 보다 스케일도 크고 로케이션도 다양했던 전작과는 달리 <우연과 상상>은 등장인물 수도 적고 배경도 한정되어 있지만 이들의 대화를 통해 밝혀지는 진실은 <드라이브 마이 카> 못지 않게 흥미진진하다. 세계의 주목을 집중시켰던 <드라이브 마이 카>보다는 감독의 초기작 중 하나인 <열정>의 전개 방식에 <해피 아워>의 서사를 담은 것만 같은 <우연과 상상>은 하마구치 감독의 초심을 담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마구치 감독은 어째서 복잡한 비유나 상징을 이용하는 대신 직설적인 발화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을 택했을까.


영화 언어에서 발화 언어를 통한 서사 전개는 촌스러운 방식으로 여겨진다. 직접성보다는 간접성을 통해 수용자의 다양한 해석을 이끌어내는 예술은 정답을 이끌어낼 여지가 있는 직설적인 표현을 꺼려한다. 아예 언어가 배제되는 회화나 무용의 경우는 색감이나 예술가의 신체 등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지만 발화 언어를 사용할 선택지가 있는 영화 예술은 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예술성을 평가받기도 한다. 대사에 복잡한 비유와 상징을 담아 직설성을 배제하기도 하지만 대개 발화 언어는 직접적인 표현 방법에 쓰인다. 특히 상대적으로 대중성을 담보로 하는 예술인 영화는 대사를 알쏭달쏭하게 꼬는 대신 관객에게 정보를 전달하거나 의미를 함축하더라도 직접적인 의미 전달과 간접적인 의미 함축이라는 두 역할을 수행하게끔 만들곤 한다. 이는 추리물을 포함한 반전 서사에서 가장 두드러지는데 관객에게 반전의 충격을 안겨주려면 간단한 대사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반전 영화에서는 플래시백으로 시각적인 효과를 노리더라도 나레이션을 사용해 관객에게 충격을 안겨준다.



<우연과 상상>은 소소한 반전을 품은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플래시백이 전혀 없다. 등장인물들은 현재 시점에서만 존재하며 과거의 이야기는 전부 대사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플래시백을 영화 기법에서 제외하는 경우 관객은 한가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등장인물들이 하는 대사는 전부 진실에 기반하는 것인가? 3화 「다시 한번」에서 아야(카와이 아오바 분)의 입을 통해 드러나는 반전은 아야만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관객은 아야의 말에 의구심을 느끼지 않는데 그 이유는 아야가 드러낸 진실이 진실인지 아닌지가 크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연과 상상>의 대화들은 내용의 진실성에 크게 구애받지 않으며 관객이 느끼는 감정에 충실하다. 대개는 즐거움인데 대화가 <우연과 상상>을 한층 좋은 영화로 만들어주는 이유는 정작 대화를 나누는 등장인물들에게는 진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우연과 상상>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명언을 그야말로 충실하게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첫 에피소드인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은 퇴근길 택시에 합승한 메이코(후루카와 코토네 분)와 츠구미(현리 분)의 대화를 오래도록 보여주지만 대화의 내용은 한 줄로 요약이 가능하다. 츠구미가 새로운 남자를 만났고 마음이 잘 통하는 사람이라는 것. 중요한 것은 이 대화 직후에 이루어진다. 메이코는 택시에서 내려 어딘가로 향하고 그 곳은 바로 츠구미가 만난 남자 카즈아키(나카지마 아유무 분)가 일하는 곳이다. 카즈아키와 이코는 역시나 긴 대화를 이어가지만 대화의 내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메이코가 이 장소를 떠나는 순간이 되어야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다. 카즈아키가 메이코를 따라가지 않는 것이다. 첫 에피소드에서 대화는 많은 것을 알려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인물들의 행동 사이에 존재하는 배경으로 작용할 뿐이다. 이 에피소드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대화가 거의 들리지 않는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다. 그리고 카즈아키가 대화를 할 수 있는 유리창 내부의 공간으로 이동했을 때 발생하는 대화는 주로 메이코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첫 에피소드는 대화를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대화를 인물들의 행동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혹은 맥거핀으로 유연하게 사용한다. 



두번째 에피소드인 「문은 열어둔 채로」에서 관객의 시선을 가장 오랫동안 붙잡아두는 발화 언어는 나오(모리 카츠키 분)가 세가와 교수(시부카와 키요히코 분)의 책을 낭독하는 부분이다. 상당히 오랜 시간 일부러 민망한 부분을 골라 낭독하는 나오의 목소리는 관객으로 하여금 웃음을 유도하지만 동시에 세가와 교수가 보이는 반응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도록 만든다. 민망해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멈추게 하거나 화를 내지 않으며 낭독을 듣는 세가와 교수는 이 낭독을 즐기는 것일까 아니면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일까. 문을 닫으려는 나오의 행동만을 저지하며 긴 낭독을 듣고 나오의 고민상담을 해준 세가와 교수는 나오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듣고서야 당황한 모습을 보인다. 나오의 질문에 대한 세가와 교수의 대답은 일반적으로 관객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방향으로 흐르며 관객에게 쾌감을 안겨준다. 하지만 이들의 대화가 무용지물이었다고 말하기라도 하듯 이 에피소드의 결말 또한 전혀 다른 곳으로 향한다. 특히 가장 충격적인 결말은 나오의 발화가 아닌 오타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2화 또한 대화를 훌륭한 매개체로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대화를 발화 언어의 목적 그 자체에 가장 충실하게 활용한 에피소드는 3화인 「다시 한번」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에피소드의 가장 큰 반전은 아야의 입을 통해 전달되지만 아야와 나츠코(우라베 후사코 분)는 결론적으로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나츠코를 자신의 집에서 대접하며 오랫동안 이야기를 이어가던 아야는 사실 대화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어떤 정보를 알아내려고 했던 것임이 드러난다. 반면 대화 자체가 목적이었던 나츠코에게 이는 충격으로 다가오는데 이후 대화를 이어가려고 하는 쪽은 나츠코가 아니라 아야다. 관객에게 가장 큰 충격을 전달하는 것은 이후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진실이지만 서사를 마무리짓는 것은 폭로 이후에 이어지는 상황극이다. 특히 아야가 나츠코를 배웅하며 역 앞의 육교에서 벌이는 상황극은 대사는 상황극일지언정 두 캐릭터의 감정만큼은 진실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이 에피소드에서도 대화는 아야와 나츠코의 과거를 들려주고 스스로를 힐링하는 수단으로 기능한다(실제로 심리 치료에도 사이코드라마라는 비슷한 기법이 활용되기도 한다). 



그다지 변화가 없는 배경, 적은 수의 등장인물을 가지고 대화만으로 흥미로운 서사를 이끌어 냈지만 사실 대화가 서사를 잇는 매개로서 작동한다는 점에서 <우연과 상상>은 영화 예술에서 대사의 활용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굳이 어려운 비유와 상징을 사용하지 않아도, 혹은 대사 없이 이미지로만 보여주려 하지 않아도 대사는 영화에서 많은 역할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하마구치 감독이 증명해낸 셈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 비하면 소소해 보이는 영화지만 <우연과 상상>은 초심으로 돌아간 감독이 관객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안겨준다.


*본 리뷰는 씨네랩의 시사회에 초청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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