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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Apr 04. 2022

폭력 트라우마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윌 스미스는 왜 비판받을까

<모비우스>는 소니 마블 유니버스의 우려를 증폭시키는 작품인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안티 히어로에 대적하는 빌런이 지나치게 전형적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스파이더맨과 스파이더맨에 관련된 900여개의 캐릭터 판권에는 한가지 맹점이 있다. 스파이더맨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빌런이라는 점이다. 현시대 가장 성공적인 히어로 유니버스를 구성하고 있는 MCU에서조차 안티 히어로를 메인으로 한 솔로 무비는 없었다(데드풀은 엄연히 말하면 안티 히어로보다는 B급 히어로에 가깝다). 소니는 용감하게도 베놈을 필두로 안티 히어로 솔로 무비에 도전했고 현재 로튼토마토 지수에서 참담한 결과를 받아들이는 중이다. <모비우스>라고 해서 별다른 결과를 내놓은 것은 아닌데 특히 안티 히어로에 대적하는 빌런의 전형성에서 그 참담함이 더욱 두드러진다. 불거진 광대가 특징적인 마스크를 지닌 맷 스미스는 병력으로 인해 시한부 인생을 사는 마일로/루시안을 연기하는데 마일로의 흑화 계기는 병력 그 자체가 아니다. 어린 시절 병력으로 인해 건강한 이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한 트라우마가 마일로를 빌런으로 만든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이가 복수심에 이를 갈며 빌런이 된다는 빌런 오리진은 낡을 대로 낡아서 <조커> 이후로는 새로울 것이 없는 서사다.


동양, 특히 한국의 관객은 어린 마일로가 건장한 동급생들에게 얻어맞는 장면을 보며 사실 의아해할 수밖에 없다. 구해줄 어른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마일로와 마이클의 멘토격에 해당하는 니콜라스(자레드 해리스 분)는 구타 현장을 목격한다. 한국이었다면 가해자들은 불려가서 어떤 식으로든(설령 적절하지 않다 하더라도) 처벌을 받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니콜라스의 눈앞에서 가해자들은 그저 달아나기만 할 뿐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94회 오스카 시상식에서 크리스 락에게 폭력을 행사한 윌 스미스가 전국적인 지탄을 받고 있는 것을 떠올려 볼 때 특히나 이 상황은 문화적으로도 이해가지 않는 부분이다. '맞을 짓을 했다',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와 같은 표현들이 익숙한 한국인은 윌 스미스의 폭력은 감수할 만한 정도라고 생각하지만 <모비우스>의 학교폭력 장면은 다소 받아들이기 어렵다. 학교 폭력을 행사한 전력(?)이 있는 공인들이 대대적으로 질타를 받는 한국 사회에서 다소 가벼운 폭력은 어느 정도 용인하는 데 반해 물리적인 상처가 남는 폭력은 용인되지 못한다. 반면 총기 소지가 가능해 총기 테러의 가능성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는 미국 사회는 작은 폭력에도 민감하지만 청소년기에 다양한 교외 활동을 지원하기에 상대적으로 학교 폭력에 대해서는 무감한 편인지도 모른다.



혹자는 윌 스미스 사태에 대해 표현의 자유에 대한 문화 차이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표현의 자유와 폭력에 대한 사회적인 용인 정도, 심리적 혹은 언어적 폭력에 대한 민감도 차이가 어우러진 결과가 미국과 한국에서 해당 사태를 다르게 받아들이는 상황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크리스 락이 기존에 동양인 차별을 한 과거가 있어 한국에서 더더욱 지지를 얻지 못하는 상황이긴 하지만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그가 '맞을 짓을 했다'고 받아들이는 편에 가깝다. 다시 <모비우스>로 돌아가서, 마이클의 박쥐 혈청을 사용해 동일한 힘을 얻은 마일로는 자신을 막으려는 니콜라스 앞에서 니콜라스가 항상 마이클만 편애했다고 징징거린다울부짖는다. 하지만 영화 전반에서 드러나는 마일로의 주된 복수심은 니콜라스가 아닌 세상을 향한 것으로 묘사된다. 주어진 힘이 저주라고 생각하는 마이클에겐 마일로처럼 구타당한 역사가 없다(최소한 영화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마일로는 매일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아온 자신의 삶을 왜 타인이 느끼는 건 안되느냐고 묻는다. 즉 병력에 더불어 타인의 폭력까지 감내하며 살아온 마일로에게 새로 주어진 힘은 자신과 타인이 동등해질 기회에 가깝다. 남성성에 대한 기준이 엄격한 미국 사회에서 건강하지 않은 남성은 패배감을 느낄 확률이 높다. 학교 폭력을 겪은 과거에 마이클만큼의 학문적 성취를 이뤄내지도 못한 마일로는 기실 마이클에게 평생 열등감을 느끼며 살아왔고 박쥐 혈청은 그 열등감을 해소할 방법이었던 것이다.


마일로와 마이클이 같은 병으로 고생하고 있기에 동등한 친구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둘은 결코 같은 위치에 있지 않다. 언급한 대로 마이클이 의사로서 노벨상을 거절할 만큼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반면 마일로는 스스로 무언가를 성취한 역사가 없다. 마이클은 마일로의 실제 이름인 루시안을 거의 부르지 않는데 이는 루시안 이전에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이들과 루시안이 별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영재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마일로를 떠날 때 남긴 쪽지에 매달리는 건 마일로이며 마이클은 마일로에게 매달리지 않는데다 자신이 접은 쪽지를 다시 똑같이 접을 수 없을 것이라며 무시하기도 한다(장난스럽게 보이지만 간과해서는 안되는 부분이다). 마일로가 마이클에게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유일한 부분은 금전적인 부분인데 마이클이 진행하는 연구의 후원자가 됨으로써 마일로는 마이클과 동등한 위치가 된 것처럼 느낀다. 하지만 그 연구실에서 마이클은 연인인 마틴(아드리아 아르호나 분) 박사를 만나 마일로보다 앞서나간다. 마틴 박사는 남성 중심의 히어로 영화에서 인질 이상의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소니 유니버스의 약점으로 기능하기도 하지만 <모비우스>에서 마일로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자극제로도 기능한다. 가부장적인 남성성의 특징 중 하나는 처자식을 부양할 수 있는가, 혹은 그에 앞서 처를 견인할 능력이 있는가인데 마일로는 이 부분에서 마이클에게 뒤처졌다고 느끼는지도 모른다. 마틴에게 연정을 느끼는 것이 아님에도 마이클에게서 마틴을 빼앗으려는 마일로의 시도는 이런 심리에서 비롯된다.



영화에서 몇번 반복되는 대사 중 하나는 '우리는 소수이고 그들은 다수(few against many)'다. 평생 소수자에 속해온 마일로는 자신을 적대시한 다수에 맞설 수 있는 기회를 거머쥐고 마이클을 자신과 같은 위치에서 결코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마이클이 병자로 돌아가는 순간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소수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이클이 변환된 신체 상태를 유지하며 자신을 대신해 누명을 쓰는 상태를 지속하는 한 자신은 건강한 다수에 속하는 동시에 다수에 대한 복수를 이어갈 수 있다. 마이클과 마일로 모두 뱀파이어 상태를 유지하는 동안 마일로는 마이클에 대한 우위를 선점하면서도 외롭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마일로는 마이클을 어떻게든 설득하려 든다. 심지어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의 마이클은 마일로로부터 혈액을 공급받아야 하는 신세이기까지 하기에 마일로 입장에서 최선은 자신의 죄를 뒤집어쓴 마이클이 혈액을 공급받으며 생존하는 것이다. 영화이기에 그런 상황이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같은 질병을 지니고도 세상에 대한 다른 관점을 지니게 된 마이클과 마일로의 차이는 결국 어린 시절의 폭력 경험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모욕적인 언행을 듣고 행사한 윌 스미스의 폭력이 정당화될 수 없듯이 마일로의 복수심도 정당화될 수 없다(이와는 별개로 크리스 락의 언행도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자신의 죄를 뉘우칠 기회가 없었던 마일로에게는 안타깝기도 하지만 어쩌면 어린 마일로를 구타한 아이들과 이를 방관한 어른들이야말로 악을 낳은 존재들이 아닐까.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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