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워 바디 | 2021 늦봄호 01
오늘 날씨 어때요? 계신 곳엔 어떤 꽃이 피어있나요? 봄날을 어떻게 보내고 계시는지 궁금하네요.
저는 봄타고 있어요. 새해 버프로 1월부터 전속력으로 달렸더니 벌써 11월은 된 것 같은 체력이고요. 다들 새 출발을 이야기하는 와중에 회사를 그만두어 버린 저는... 모두 끝나버렸다 난 시작도 안 해봤는데...
마음을 가다듬어 보다가도 자꾸 힘이 빠져 벌러덩 드러누워 버려요. 이 좋은 날에! 그치만 뭐 이런 시기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이렇게 생각이 복잡할 땐 뭐가 좋을까요? (레몬 사탕)
머리 쓰지 않고, 감정도 많이 쓰지 않고, 몸에 집중해 보기로 합시다.
한가람 감독의 <아워 바디>는 제목 그대로 우리의 몸에 대한 영화에요. 여러 작품으로 얼굴이 익숙해진 최희서 배우가 자영 역을 맡았고요. 행정고시 장수생인 자영은 어느 날 밤 달리기를 하던 현주(안지혜 분)와 우연히 마주치고 그를 따라 달리기를 시작합니다. 30대 초반의 여성이 놓인 현실을 바탕에 두고, 30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몸을 알아가는 자영의 시선이 영화의 중심이에요.
자영의 시선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현주의 몸을 관찰해요. 몰아쉬는 숨을 따라 움직이는 살가죽, 피부에 맺힌 땀, 생동의 증거를 뿜는 몸을 자기도 모르게 넋을 놓고 바라보아요. 살아 움직임에 대한 동경은 곧바로 자영을 움직이게 합니다. 무엇에 홀린 듯 서랍을 뒤져 낡은 운동화를 찾아내고, 유튜브에서 배운 대로 어설프게 운동장을 달려 보지요.
자영의 시선을 따라가는 우리도 현주의 생동감을 동경하게 되는데, 한편으론 새로워요. 여성의 몸을 관찰할 때 ‘저렇게 마르고 싶다,’ 혹은 ‘저런 (예쁜) 근육을 갖고 싶다’를 떠올린 적이 훨씬 많으니까요. 땀과 호흡을 내뿜는 몸보다는 11자 복근이나 애플힙 따위의 단편을 관찰하곤 했고요. 여성 시점에서 여성의 몸을 비추는 이 시선은 기존의 영화와 구분됩니다. 남성 시점, 우위를 점한 카메라가 소비하듯이 여성의 몸을 훑는 장면은 익숙해도 매번 불쾌하고, 지겹잖아요.
자영의 시선은 탐구에 가까운데요. 또한 섹슈얼하기도 해요. 자영과 현주가 술을 마시며 '남자랑 자고 싶다'는 얘기로 시작하는 장면이 있어요. 감각이 한껏 예민해진 상태로 대화하는데, 둘 사이 공기에 분명 뭔가 느껴지거든요. ‘자고 싶은' 대상으로 상대를 욕망하는 것과는 달랐어요. 진득하지도 않고요. 이 낯선 긴장감을 느끼는 건 굉장히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얼큰하게 술에 취해 불그죽죽해진 둘의 몸은 술 마시다가 화장실에 갔을 때 마주친 우리 모습 같아요. 뺨만 발그레 칠한 인형이 아니라 온몸의 모공이 한껏 열린 사람, 두 ‘사람’을 비추는 덕분에 우리는 몸과 감각 자체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자영의 시선은 이내 자신의 몸으로 옮겨가는데요.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움직이고 반응하는지 살피며, 달리는 데 쓰이는 큰 근육에서 더 세밀한 감각으로 탐구의 범위를 넓혀가요. 컴컴한 단칸방 바닥에서 의미 없이 흔들리는 몸뚱이로 시작한 첫 장면과 대비되어, 햇살 드는 호텔 스위트룸에서의 마지막 장면에선 묘한 승리감이 느껴져요.
여전히 나아지지 않은 상황에서, 자영은 엄마와 친구의 말처럼 현실 감각이 없고 뻔뻔한 사람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자신의 몸을 알게 된 자영은 분명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파도를 멈추게 할 순 없지만 내 멀미를 멈추고 나를 안정시킬 줄 아는 사람 말이에요.
자영과 동갑이 된 올해 영화를 다시 보니 “취직도 안 해, 시험도 안 봐, 그 나이에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하는 자영 엄마의 말에 제 뼈가 다 부러지는 것 같았어요. 속으로는 “왜 안 돼!”를 외치면서요. ‘왜 안 돼, 뭐 어때’의 마음으로 생계 걱정은 잠깐 접어두자고요. 물론 생계 중요하죠... 너무... 큽.
하지만 한 시간 삼십오 분 정도야 뭐 어때요. 영화의 개연성이나, 바디 포지티브 같은 담론도 접어두어요. 우리는 봄타는 사람으로서, 생각을 줄이고 생동에 집중해 보는 거예요.
짧은 교복 치마를 입고 젓가락 같은 다리로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는, 자영의 자매 화영도 언니의 생동감에 홀려 달리기를 시작해요. <피리 부는 여자들>처럼요. 앞장서서 달리는 현주를 따라 자영과 화영이 달리면 그 뒤를 따라 화영을 부러워했던 다리가 통통한 친구가 달릴지도 모르지요.
영화를 보는 내내 당장이라도 달리고 싶어져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면서! 내일 새벽에 일어나서 달려야겠어, 다짐하며 술기운에 얼얼해진 몸을 뉘고 들뜬 기분으로 잠들어요.
근데 사람 사는 게... 뭐 그렇지 않습니까. 술 먹고 늦게 잔만큼 늦잠을 잤다면... 뭐 어때요. 저녁에 달려도 되고요. 다음 편을 읽으며 ‘달리지 않기’를 선택해도 된답니다.
덕복 취향대로 잡솨 보세요.
시간 1시간 35분
비용 티빙 1200원 / 시리즈온 1000원
언제 휴일 전날 늦은 밤
간식 안주 없이 마실 물 섞은 위스키 (조금 몽롱해질 정도의 술)
*제철영화에세이 [취향의 오작동] 늦봄호 수록 (2021.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