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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덕복희 Feb 11. 2022

우리 같은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지만

영화 미쓰 홍당무 | 2021 초여름호 02


사람이 비상식적인 행동을 할 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잖아요.

열아홉 살 때 담임이었던 서 선생을 무려 10년째 짝사랑해 온 양미숙 양에게도 이유가 있다.
당시 양미숙은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지독하게 외로웠던 순간, 서 선생이 이름을 부르며 미숙을 찾았다. 길든 짧든 따돌림을 당해본 사람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그때 누군가 내민 이 어느 정도 의미인지, 그저 고마웠다고 표현하기엔 얼마나 절박하게 그 을 붙들었는지. 미숙은 서 선생이 자신을 구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스물아홉 살에도 미숙은 여전히 따돌림을 당한다. 게다가 중학교 영어로 이동하라는 날벼락이 떨어지고, 이미 유부남인 서 선생에게 애인까지 생긴다. 이 지독하게 외로운 순간, 미숙은 서 선생의 딸 종희와 을 잡게 된다.




둘은 서 선생을 각자가 바라는 위치로 되돌려 놓기 위해 그와 애인을 떼어 놓을 ‘작전’에 돌입한다. 그 일환으로 애인에게 외설적인 채팅을 보내는 종희를 보며 미숙은 “우리 종희, EQ가 높구나?” 하고 감탄한다. 보통 선생이라면 “너 대체 어디서 이런 말을 배웠니?” 묻지 않나. 그럼 종희가 바로 '어린 미숙'이라고 가정해 보자. 중학생인 종희가 미숙과 수평어를 쓰는 모습도 자연스러워진다.


착하게 굴지 마라. 열심히 하지 마라. '어린 미숙'이 자라면서 겪을 일에 상처받지 않도록 미숙은 조급하게 조언을 쏟아낸다. 하지만 그러는 미숙은 얼마나 열심히 살았나. 자세히는 몰라도 교사가 될 만큼 공부 했고, <고도를 기다리며>를 즐겨 읽을 만큼 교양을 쌓았고, 돈도 억척같이 모으고 있다. 뭐든 날로 주어진 적이 없으니 죽어라 노력하는 게 습관인 사람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 돼. 결국 털어놓은 미숙의 속내는 그랬다. 불공평한 세상에서 더 열심으로 버티는 것보다 나은 방법은 없었다. 그런 이유로 미숙과 종희는 비상식적인 '작전'을 붙들고 과몰입한다.



합숙은 진실 게임을 부르곤 한다. 또 다른 ‘작전’인 공연 연습으로 강당에서 밤을 지새우며, 미숙과 종희는 아마 따돌림을 당한 경험도 나누지 않았을까. 야, 니가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걔들이 뭘 안다고 그래? 내가 아주 가만 안 둘 거야. 서로 이렇게 말해주었을 게 분명하다. 욕도 꽤액 질러 봤겠지. 워라밸은커녕 의식주도 챙기기 힘들었던 미숙의 삶이 왜 그리도 고단했는지 찬찬히 톺아보는 밤들이 되었을 것이다.


미숙이 서 선생에게 다른 속셈을 가지고 종희와 손을 잡았다는 건 작은 문제다. 그보다 공연 리허설을 앞두고 “그냥 너 혼자 해”라며 쉽게 포기했을 때, 차곡차곡 쌓은 둘의 관계를 엉클어뜨리는 게 종희를 속상하게 한다. 진실을 고백하며 우는 미숙보다 더 서럽게 가슴을 치는 이 ‘어린 미숙’은 동시에 미숙의 엄마 같기도 하다. 고작 그 손길에 10년 동안 목을 매었다니. 고작 그 일 때문에 나를, 너 자신을 잃을 뻔했다니.



애들은 빨리 자란다. 종희는 그새 미숙보다 한 뼘 더 컸다. 공연이 시작되어 방송에서 ‘찐따와 찐따 애인’ 팀이 호명되자 종희는 미숙의 손을 붙들고 무대에 오른다. 여전히 ‘창피하다’ 소리를 하는 미숙에게, '더 강한 버전의 미숙'은 일갈한다. “아, 고만 좀 해요. 나는 선생님 하나도 안 창피하니까.” 감동의 도가니 같은 건 없다. 나는 더이상 내가 창피하지 않아. 그러니까 얼른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자고.


팀 이름은 학생들의 악의로 지어졌다. 그들은 쓰레기를 던지며 해맑게 ‘찐따’를 연호한다. 이렇게 무서운 상황에서 둘은 현실 감각을 버리고, 연습한 대로 공연을 마친다. 밀가루 범벅이 되어 돌아가는 둘의 뒷모습에선 정신 승리를 넘어선 광기가 느껴진다. 역시 이상한데... 마지막까지 서 선생을 대체할 남자를 찾는 모습도 좀 이상하지 않나. ‘파니 핑크’도 ‘아멜리에'도, 외로운 여자들은 왜 그렇게 남자에게 사랑받으려 할까. 하지만 미숙 양이 그랬지. 사람이 비상식적인 행동을 할 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미숙을 섣불리 동정하거나, 앞으로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기를 감히 바라지 않는다. 내가 아니면 아무도 나를 챙기지 않으니까 밉더라도 기를 쓰고 나를 챙기는 마음을 알고 있다. 인정하기 싫지만 나도 그렇다. 미숙처럼 모난 돌은 정을 맞으니까 그걸 적당히 감추며 살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미숙은 아무리 못되게, 대충 살거라 다짐해도 아득바득 사는 쪽이 차라리 마음 편할 것이다. 


다만 종희와 을 잡고 ‘이 다음’으로 간 미숙이 덜 외로웠으면 좋겠다. 더이상은 열심일 수 없을 만큼 지친 순간이 다시 온다면, 그때도 을 잡아줄 사람이 한 명은 나타나기를 바란다. 양미숙 양에게도, 나에게도.


사진: <미쓰 홍당무>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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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지독하게 외로워도 연락하고 싶은 사람은 없고 다 지겨운 날
간식 찐 감자, 집에서 뽀려온 매실청 넣은 탄산수



*제철영화에세이 [취향의 오작동] 초여름호 수록 (2021.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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