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기자 Apr 03. 2023

노원역 10번 출구의 신문가판대

누구나 때때로 돌이켜 보는 순간들이 있다. 한껏 숨이 차오르다가도 그때를 떠올리면 안온하고 차분해지는 그런 장면들. 게임으로 따지면 '세이브 포인트' 같은 지점들이다. 실수를 하거나 다른 길로 접어들었어도, 그곳으로 되돌리면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2013년과 2014년의 노원역 역시 나에게 그런 여러 순간 중 하나다.


2013년쯤 내 신분은 언시생이었다. 대학에 수십만 원을 주면 학생 신분은 유지하되, 졸업은 원하는 만큼 유예시켜 줬다. 그땐 졸업이 뭐가 그리 두려웠을까. 적당한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맞이하는 졸업은 마치 낙하산 없이 날아가는 비행기 위에서 떨어지는 것과 다름없다고 그땐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름은 치열하게 공부하려고 노력은 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시작한 게 아침 신문 스터디였다. 대여섯 명이 모여 각자 주요 일간지를 하나씩 정독하고 거기에 나온 이슈나 단어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십시일반 서로 나누자는 게 모임의 목적이다. 자칫 한없이 퍼지기 쉬운 취준생(또는 백수)들의 아침 시간을 억지로 일찍 앞당겨 보자는 이유가 사실 더 강했다.


당시 노원역 인근의 30~40년이 된 주공아파트에 살던 나는 매일 아침 8시 1호선 종로3가역 1번 출구(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인근의 스타벅스 3층에서 하는 신문 스터디에 가입했다. 제각기 서로 다른 대학에서 공부하던, 언론고시 준비 카페에서 만난 같은 나이 또래의 스터디생들. 이제는 대개 기자가 됐거나 얼추 목표하던 삶을 찾아 열심히 살고 있다. 


순수 지하철로 32분 정도 소요되는, 한 번만 갈아타면 되는 노원~종로3가 코스의 지하철은 사실 서울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별 부담이 없는 짧은 거리다. 그렇지만 나에겐 지금 상상해도 숨이 막히는 그야말로 지옥철이었다. 한 뼘의 개인공간도 허용되지 않는, 출근길의 악다구니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매일 아침 온몸에 힘을 꽉 줘야만 했다. 사람들에게서는 어젯밤 회식 때 먹었던 양념돼지갈비나 아침밥으로 들이켰던 된장국 같은 눅진한 냄새가 풀풀 풍겼다. 옆사람의 온기가 내게도 그대로 전해졌는데, 말 그대로 땀과 땀이 엉겨 붙어서 전달되는 끈적한 온기였다.


더군다나 그다지 부지런하지 못했던 내게 8시 모임은 매일이 도전이었다. 현관문에서부터 시작되는 '레이스'에서 숨을 돌릴 수 있는 구간은 지하철 스크린 도어 앞에 도착해서 지하철을 기다리는 순간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내게 할당된 일간지를 살 수 있는 여유도 그제야 생겼다. 노원역 10번 출구와 가까운 신문가판대에서 매일 500원이나 700원 정도를 주고 중앙일보나 한국경제신문 같은 걸 샀었다.


1, 2주쯤 지났을까. 신문가판대를 운영하는 아주머니께서 먼저 말을 걸어왔다. "아침마다 부지런하네"하며. 그도 그럴 것이 10년 전에도 매일 아침 꼬박꼬박 신문을 사는 20대는 흔치 않았으리라. 게다가 500원이나 700원짜리 상품이니 마찬가지로 500원이나 300원을 꼭 거슬러줬어야 했다. 손가락에서 손바닥으로 전달되는 동전으로 서로의 온기 정도는 익히게 됐던 것이다. 


아주머니는 가끔 빵이나 물 따위를 건네줬다. 천 원짜리를 내도 받지를 않았다. 얼굴에 쓰인 '헐레벌떡'한 모습이 내심 안쓰러웠던 걸까. 아니면 고도의 판매 전략이었을지도 모른다. 괜히 마음 한 켠이 쿡쿡 찔렸던 나는 이틀에 한 번씩은 제 돈을 내고 아침 요기를 사 먹게 됐다. 아침밥 따위 고등학생 때부터 먹어본 적이 없었는 데도 말이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동안 매일 짧게 안부를 주고받기도 했다. 오늘 아침에는 어떤 손님이 다녀갔느니, 요즘 들어 더더욱 장사가 안된다느니, 다음 주면 필기시험이 있다느니 하는. 1년 정도 신문과 함께 빵이나 물, 요깃거리 등을 샀다. 신문을 따로 구독하지 않은 것도, 오롯이 신문가판대의 아주머니 때문이었다. 모든 물건이 그렇듯 신문도 구독하면 훨씬 싸게 볼 수 있었고, 취준생인 나에게는 5000원이나 10000원이 참 소중하던 때였다. 그렇지만 딱 꼬집을 수 없는 그런 감정 탓에 신문은 따로 받아보지 않았다.


스크린도어가 닫히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했을 때는 그냥 신문만 갖고 지하철에 뛰어들었다. 외상값은 다음 날 갚았다. 아주머니는 내게 여름엔 미숫가루를, 겨울에는 온커피를 먹어보라고 자주 줬다. 신문사나 방송사 면접 보러 가는 길이라 정장을 입고 있으면 그걸 알아보고 2000원이나 3000원쯤 하는 비싼 음료수를 건네주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유독 마음이 다부지게 됐다.


급작스레 부산에 취업을 하게 됐고, 몇 달이 지나고 나서야 동생과 함께 살던 노원집에 들러 전공책 같은 물품을 정리할 여유가 생겼다. 딱히 갈 일도 없었지만 노원역 10번 출구 인근의 신문가판대에 들렀다. 그해 11월부터 다른 분이 가게를 인수했다는 얘기를 듣게 됐다. 어느 어느 언론사에 합격해서 이제는 직장인이 됐다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마음의 온기가 부족할 땐 가끔 그때 그곳의 신문가판대를 뒤돌아 보게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지방'이 싫어서? '적당한' 일자리가 없어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