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치 않으나 대략 2006년부터 가수 윤하의 노래를 듣기 시작했으니, 올해 벌써 햇수로 17년쯤 됐다. 가족이나 네다섯 정도의 학창시절 친구를 제외하고 이렇게 오랜 시간 관계를 맺어왔던 무언가는 내 인생에 없었다. 물론 그쪽에서는 나를 모르기 때문에, 지극히도 일방적인 관계다. 그럼에도 고등학교부터 지금까지 이르는 내 인생의 중요하고 다양한 순간에는 항상 그때 즈음 들었던 윤하의 노래가 하나쯤은 있었다. 그때를 떠올리면 노래가 생각나고, 노래를 들으면 그때의 추억과 그때의 감상, 그때의 기분이 함께 섞여 마음을 요동친다.
지난해 윤하가 '사건의 지평선'으로 역주행을 하며 또다시 전성기를 맞았을 때, 너무도 기분이 좋았다. 성실하고 착한 고향친구가 오랜 시도 끝에 다시 성공을 거뒀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 같았다. 물론 또 한 번 말하지만, 이건 순전히 내 중심으로 짜인 일방적인 관계다. 아무튼, 한 가수의 음악이 개인에게 남길 수 있는 영향력이 얼마나 큰 지 나조차도 한번 가늠해 보기 위해 기억에 남는 순간과 노래를 되짚어보려고 한다.
散る季節だって あの夏の花火だって
벚꽃이 지는 계절에도 그 여름의 불꽃놀이도
君を君を いつだって思ってたよ
그대를 그대를 언제라도 생각하고 있었어요
秋の切なさだって ひとりきりのイブだって
가을의 애달픔도 외톨이로 있었던 크리스마스 이브도
윤하_思い出にできない(추억이라고 하기엔) 중 일부
처음은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친구의 mp3를 빌려 듣다가 일 수도, 아님 당시 유행하던 P2P 프로그램에서 우연히 다운받았을 수도 있다. 그렇게 2006년쯤 윤하가 부른 일본 노래들을 처음 접하게 됐다. ほうき星(혜성)은 물론이고 ゆびきり(약속), あした、天気になれ(내일도 맑은 하늘처럼), もっとふたりで(좀 더 둘이서) 등 저변을 넓혀갔다(?). 당연히 일본어를 알아 듣지는 못했으니 처음에는 멜로디부터 익혀갔다. 그러다가 점차 쉬운 단어부터 입에 붙어서 흥얼거렸고, 모르는 가사는 단어를 찾아가며 들었다.
윤하는 나보다 한 살 많은 88년생이었다. 이 즈음 만들어진 노래는 대부분 또래 여고생의 기쁨과 슬픔, 기다림 등의 감정을 품고 있었다. 남중, 남고를 나온 나에게는 다른 세계 언어인 것마냥 낯설고 다가가기 어려운 감성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오묘하고 색다른 즐거움이 있었던 것 같다.
당시 윤하 특유의 맑고 고운 목소리도 듣기에 참 좋았다. 가사를 완전히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도 득이 됐다. 책상에 엎드려 잘 땐 한국어 가요는 방해가 됐다. 요즘으로 치자면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라고 할까. 수학문제를 풀 때나 아무 생각 없이 등하굣길 버스에 앉아있을 때, 대개 윤하 노래를 많이 들었다.
내 학창 시절 가운데 고1과 고2쯤을 떠올리면 어김없이 이때 윤하가 일본에서 발매한 노래들이 함께 생각난다. 학교 창밖으로 펼치던 나른한 봄볕의 풍경과, 청소시간 책걸상을 한꺼번에 뒤로 밀던 순간과, 새하얀 입김이 피어나던 독서실 옥상의 저녁 같은 모습들이 필름카메라가 인화한 사진처럼 남겨진다.
Time2Rock Ready Go 햇살이 따스해
오늘 컨디션도 너무 좋은 걸 두근대는 마음은 Let It Go
오늘은 하고 싶은 이대로 보여 줄 거야 세상에 하나뿐인 나를
윤하_Auditon(Time2Rock) 중 일부
그땐 왜 몰랐을까. 지금 보니 정말 오글거리는 가사다.
정말 손발이 펴지지 않을 정도로 얼굴이 화끈거리는 이런 가사들이 "나에게 꼭 맞는 이야기"라며 착각해 볼 수 있는 건 청소년의 몇 안 되는 특권이지 않을까 싶다. 당시엔 파격적인 용량이었던 512MB 아이리버 mp3에 항상 최상단에 링크된 곡이었다. 중요한 모의고사를 치르거나 논술 시험을 치러 가거나, 수능을 볼 때 긴장을 풀기 위해 들었던 노래였기 때문이다.
그땐 수능이나 입시가 너무나도 큰 일인 줄 알았다. 한 발 미끄러지면 인생이 무너지는 줄, 운 좋게 한 발 더 뻗을 수 있으면 마치 큰 업적을 이뤄낸 줄로만 생각했다. 부모님께 참 짜증도 많이 냈었다. 3개 대학에 수시 원서를 접수했는데, 매번 논술을 볼 때마다 부모님이 1박 2일 일정으로 KTX를 타고 서울로 함께 갔다. 그땐 그게 당연한 일인 줄 알았다. 수험생은 컨디션을 조절해야 한다 말하시며 숙소에서 제일 아늑한 방을 줬고, 16년 전에도 허리가 불편했던 아버지는 거실 바닥에서 잠을 청했다. 그래도 당연한 줄로만 알았다.
시험을 보는 동안 부모님은 늘 대학교 근처의 카페에 앉아 있었다. 카페라고는 일생 가본 적도 없는 분들이지만, 지하철이나 버스도 함부로 타지 못할 정도로 생경한 서울에서는 별달리 방법이 없었다. 합격 경쟁률만큼이나 카페 좌석 경쟁률도 높았으리라. 데이트를 즐기려는 젊은 대학생들에다, 아들이나 딸을 학교에 보내놓은 마찬가지 처지의 다른 부모님들로 북적대는 카페에서도 늘 내가 앉을자리를 하나 비워두시고는 나를 기다렸다. 가끔 윤하의 오디션 노래가 흘러나올 때마다 혜화동 던킨도너츠 2층에서 무척이나 어색하게 앉아계시던 부모님이 생각난다.
저 빛을 따라가 혜성이 되어 저 하늘을 날아봐
내 맘을 전하게 그대에게 데려가 별을 내려봐
그대가 보이게 더 빛을 태워봐 언젠가 사라져 버린다 해도 내 맘을 줄 거야
윤하라는 가수가 소녀티를 벗어던지고, '메이저리그'로 발돋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주춧돌이 된 노래라고 지극히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일본에서 윤하라는 이름을 알리게 됐던 ほうき星(혜성)을 한국어로 번안해서 낸 앨범의 타이틀 곡인데, 앨범 내 다른 여러 노래 중에서도 번안이 가장 잘 됐던 곡이라고 느꼈다. 앞서 소개했던 노래들이나 비밀번호486, 기다리다와 같은 노래들과는 조금은 결이 달랐던, 그래서 그것이 더욱더 성공적으로 보였던 노래였다. (저는 음악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런 조예가 없습니다.)
2007년 연말에 나왔던 이 노래를 나는 2008년 초부터 엄청나게 들었다. 나도 마치 윤하처럼 부산에서의 학창시절을 뒤로하고, 서울에서의 대학생활에 급속도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대학생활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고, 그냥 술 먹고 노는 생활이라고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자취를 한 덕 또는 탓에 일주일에 3~4번은 정말 밤새 술을 마셨던 것 같다. 오전 수업은 제쳐두고 점심시간이 될 쯤 일어나 해장국을 한 그릇 간신히 먹고 시간을 좀 보내면 다시 저녁 6시가 찾아왔다. 하이에나처럼 서로와 술을 고파하던 친구들은 매번 같은 장소에 모여 또다시 술을 먹었다.
서울에서 부모님과 함께 사는 친구들과는 달리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통금이나 막차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무슨 용기였는지, 그땐 다리를 놔줄 친구 한 명만 있으면 다른 무리의 신입생들과도 거리낌 없이 술을 마시고 놀았다. 눈을 떠 보면 모르는 사람의 번호가 저장돼 있고, 처음 보는 이름으로 일촌 신청이 들어와 있기도 했다. 그땐 그게 잘 살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했다. 그렇게 일촌신청을 하러 들어오는 이들을 맞아주는 한때의 내 BGM이 바로 윤하의 '혜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