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김종배의 시선집중> 6월 23일_내가 기억하고 싶어서 쓰는 리뷰
윤석렬 대통령의 탄핵선고일, 하루 종일 틀어둔 방송에서 의외의 장면을 마주했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대한 현장 브리핑을 하는 다른 정치인이나 관계자들과 달리 한 사람이 영남지역을 덮친 화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내용은 비상계엄 사건도 화재를 진압할 때와 마찬가지로 잔불정리까지 잘해야 한다는 논지였지만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건으로 자연재해를 당하고도 메인 뉴스 섹션에 충분히 오르지 못한 지역의 문제를 환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 이야기를 듣는 나조차 아니 탄핵 이슈에 왜 화재 이야기를 꺼내나 싶었지만 전 국민의 관심이 쏠려있는 이 현장에서(영남지역민들의 시선 역시 포함되어 있었을) 전국적으로 막대한 손실과 희생을 끼친 화마에 대해 언급하지 못할 것도 없지 않나란 생각이 나중에서야 들었다.
지역과 탄핵 판결을 연결 짓지 못하게 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실상은 나 스스로조차 탄핵을 중앙의 이슈로 산불을 지역의 이슈로 이분화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다 출근길에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인터뷰를 들었다.
역시 대체로 탄핵 판결을 내기까지 막후의 이야기들에 관심이 많았지만 문형배 재판관은 지역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 아니 사실 언뜻 보면 지역과 별 상관없어 보이는 이슈들의 이면에 사실은 모든 것이 서로 긴밀하게 엮여 있는 문제라는 것을 일관된 시각으로 설명했다. 쉽게 정리하자면 비상계엄은 서울만이 아니라 지역의 모든 국민들의 삶에 밀접한 영향을 미치는 '민생'의 문제였고 그렇기에 위헌에 대한 판단은 전 재판관이 이견없이 동의했다는 것이다.
그는 명료하고 깔끔하게 지역과 헌법 그리고 국가의 관계와 역학 그리고 본질에 대해 설명했다. 평소에는 난잡하게 분리되어 사열 오열 진보니 보수니 이념적으로 찢어져있는 것처럼, 그러니까 분열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문제들을 단아하게 한 실로 꿰어 그러니까 이것은 이런 문제입니다라고 정리할 수 있는. 답변이 너무 쉽고 명쾌해서 시간을 들여 (클로바노트가 아니라) 손으로 직접 타이핑을 하며 필사가 아닌 채록을 했다.
그의 답변은 크게 네 가지의 키워드로 정리된다. 바로 지역, 민생, 통합, 그리고 대화다.
문형배 재판관은 국가를 지역의 연합으로 본다. 중앙과 지역을 수직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수평관계로 보는 거다. 그는 서울 방송에 고정 출연을 해달라는 사회자의 요청에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부산에 살며 서울에 오려면 정말 힘듭니다. 그것을 생각해서라도 지역을 좀 더 많이 고려해야겠다 싶습니다. 방송 한번 오는 게 일입니다. 일. 어느 곳에서는 9:30에 오라는 겁니다. 부산에서는 그 시간에 올 수가 없습니다. 이분은 당연히 상대방이 서울 산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서울 중심의 사고란 그런 겁니다. 저는 방송을 안 할 생각이지만 해도 지역에 있는 방송에 나갈 생각입니다.
서울 중심의 사고는 지금의 한국을 왜곡된 의사결정 구조 안으로 몰아넣고 있다. 국가의 인구 절반 이상이 의사결정 권한으로부터 심각하게 배제되어 있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거나 삶의 문제를 이슈화하는데도 차별적인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비대칭적 권력구조를 지적하며 좋은 판결을 위해서는 재판관의 사회적 배경을 다양화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오스트리아처럼 수도인 빈이 아닌 지역의 법관을 반드시 할당하도록 해 지역의 비중을 늘려야 한다는 말이다. 서울만의 문제가 아닌 국가 전체 국민들이 영향을 받는 문제들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끼리 모여 소수의 이익을 위한 결정을 하거나 좁은 시야로 인해 잘못된 판단을 하는 집단사고의 오류가 발생할 경우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다양한 관점에서 쟁점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필요하다. 지역과 서울은 삶의 조건이 매우 상이하니까.
오스트리아는 판사 10명 중 3명 이상을 수도 빈 외 거주자로 임명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판사조차도 어느 지역에 주로 근무했느냐가 그 사람의 가치관과 경험에 영향을 미친다고 봅니다. 서울은 지금 집이 없어서 난리 아닙니까 지방은 분양이 안돼서 난립니다. 그리고 그게 기본권을 제한할 정도가 됐다고 봅니다. 어떤 인간도 개인의 경험을 초월하기는 어렵습니다...... 판사의 세계와 국민의 세계는 다를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대한 다양한 삶의 경험과 관점을 지닌 주체들에 의해 중요한 결정들이 내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이 정해졌다면 다음은 무엇을 결정할지가 중요하다. 그는 이후 가장 시급한 과제를 이념적 투쟁이 아닌 민생으로 생각한다. 문형배 재판관은 비상계엄 사건도 결국 민생의 문제였다고 정리한다. 시민들이 학교를 갈 수 있느냐, 직장에 나갈 수가 있느냐 하는 개인의 기본권이 침해당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 그는 탄핵 선고가 나오던 날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이를 시청하게 한 각 학교의 결정에 대하여 중립성의 훼손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정치적 중립에 대한 오해가 큽니다. 정치적 내용을 언급하지 않는 게 중립이 아닙니다. 비상계엄에 대해서는 초등학생도 알 수 있는 거죠. 이것에 대해서 토론하는 게 어떻게 정치적 중립의 위반입니까. 비상계엄으로 초등학생도 학교에 갈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 삶의 문제인 겁니다. 자기 삶의 문제를 토론하지 못하는 게 말이 되나요?
민생의 문제인 국민의 기본권이 침해를 당했으니 지금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 역시 바로 민생의 회복이다.
그렇다면 민생은 어떻게 살릴 수가 있는가. 바로 통합을 통해서다. 그는 2시간 정도 되는 인터뷰 중간중간 이것을 매우 중요하게 강조하며 여러 차례 언급했다. 사실상 헌법재판소의 판결 과정에서 재판관들은 전원합의를 가장 중요시했는데 선고 이후 수갈래로 갈라질 민심에 대한 강한 우려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재판관들은 전원 합의라는 태도를 통해 추후에 발생할 분열을 최대한 막고 이번 비상계엄이 위법이었다는 사실을 명료히 하고자 했다. 그토록 많은 시간을 상호 이견을 좁히는 데 사용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문형배 재판관은 통합에 이르는 가장 빠른 방식은 결단이 아니라 대화와 자제라고 여러 차례 강조한다.
서부지검 폭동 사건에서는 참담함을 느꼈습니다. 그게 제가 지금 퇴임 후에 사회통합을 외치는 이윱니다. 그것은 선을 넘은 겁니다. 선을 넘은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게 저는 사회통합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권은 조심스럽게 말하지만 (선거는) 51%만 넘으면 되는 겁니다. 하지만 51%의 지지율 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과제가 많지 않습니다. 민생 회복, 사회통합 이런 걸 51% 가지고 어떻게 해결합니까. 제가 그래서 자유로워지면 이걸 강조해야겠다.
결단을 너무 자주 해요. 논의를 하다 보면 길이 보입니다. 아까 우리 사회가 다양하다 말을 드렸는데 제가 보수 진보 많이 만나봤습니다. 끝에 가면 다 똑같습니다. 내 말이 그 말이다. 표현이 다른 거다. 내가 당신에 대해서 오해했다. 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우리 사회에 부족한 것은 대화입니다.
우리 사회는 이미 선진국이기 때문에 결단으로 해결할만한 과제가 없습니다. 저출생, 기후위기 다 알지 않습니까 어떻게 할 거냐고요 ‘어떻게’가 어떻게 결단으로 되겠습니까. 충분히 대화를 해야 사람들이 그 결정을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자기가 참여한 결정에 대한 승복률은 높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화를 생략하고 결단을 내리고 당신들은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문형배 재판관은 정치권의 성급한 결단들이 오히려 사회통합으로 가는 길을 우회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지역의 사람들이 소외되지 않고 참여하며 국가의 주요 의사결정을 해야 하듯이 개개인이 바닥에서부터 주체가 되어 자신이 참여한 타협의 결과에 대한 책임감을 갖게 하는 것, 그리고 스스로의 삶의 조건을 자기 자신의 손으로 결정하게 하는 경험들이 더디게 보일지라도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하고 갈등을 방지하기에 가장 빠른 길이 된다는 설명이다.
너무도 간단하고 명료해서 수많은 소음 속에서 고민했던 것들이 모두 정리가 되는 것만 같던 시간이었다. 헌법은 각 지역에서 다양한 개인들의 삶을 통해 차곡히 쌓아 올린 공통의 가치다. 이것은 함께 살아가면서 지키자고 합의한 최소한의 규범이며 이를 통해 국민들은 어디에 살든, 어떤 모습이든, 어떤 형태로 살아가든, 무슨 일을 하든(범법이 아닌 경우에) 차별받지 않고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결정들에 참여할 권리를 보장하는 받아야한다.
지역, 민생, 통합, 그리고 대화는 다양한 개인들의 삶이 타협과 동의를 통해 존중받을 수 있는, 거대한 공동체를 운영하는 가장 기초적인고 중요한 요소인 셈이다. 헌법은 이 네가지를 뿌리로 두고 태어난 나무다.
문형배 재판관은 헌법을 넘어 국가의 존립 근거가 바로 국민들의 생활을 더 나아지게 하는 것, 이념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현실과 매우 밀접하게 맞닿아있는 삶의 조건들을 개선시키는 데 있다고 말한다.
민생회복 사회통합은 우선순위가 아니라 국가의 존재 이유입니다. 이것을 제발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쉽게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게 어떻게 쉽게 되겠습니까? 진보 정권 때 어떤 정책이 합의가 되면 (정권이 바뀌어도) 계속 가는 겁니다. 의료 정원 문제도 그냥 결단을 내린 거 아닙니까. 의료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남의 이야기가 이제 아닙니다. 자신의 이야기로 여겨야 합니다.
어렵고 멀게 느껴지는 헌법과 정작 내 삶이 어떤 방식으로 엮여있는지를 이보다 더 명쾌하고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시간이 있는 분들은 꼭 방송 전문을 들어보시길 권유한다. 가치 있을 것이다.
https://www.youtube.com/live/Zhorx-rM5Fk?si=dY3ICTBRHVB5HSHh
*본문 따옴표 안 채록은 개인적으로 참고하기 위해 빠르게 작성한 거라 100% 정확하지 않습니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 원본을 확인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