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One Cut

영원한 이방인, 슈퍼맨

타자성이 격파하는 휴머니즘

by soulblue

[One Cut] 한 컷으로 이야기하는 짧은 리뷰

슈퍼맨은 인간과 다르다. 전혀 다르다. 그는 인간이 아니기에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인간의 생명보다 낮게 여기지 않는다.


히어로마다 어울리는 수식어들이 있다. 이를테면 배트맨은 고독, 캡틴 아메리카는 자유, 스파이더맨은 책임, 토니스타크는 의무와 희생처럼. 그렇다면 먼 행성에서 지구에 불시착한 이 히어로에게는 어떤 수식이 필요할까? 바로 슈퍼맨 말이다.


이방인


개인적으로 슈퍼맨을 수식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단어는 역시 이방인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존재로 슈퍼맨을 기억하는 데다 그리스 조각상이 떠오르는 완벽에 가까운 비율과 외모 때문에(안경을 벗었을 경우!) 인간 사이에 가장 이질감 없이 스며들 수 있는 존재로 생각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가 인간과는 가장 거리가 먼 히어로라고 정의하는 편이다. 슈퍼맨은 인간이 가장 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 관념들을 모아둔 총체, 이데아이기 때문이다.


이데아는 환상이다. 가장 이상적인 존재지만 역설적으로 그래서 우리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러니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이라는 개념은 조금 바꿔 말하자면 절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실패의 상에 더 가깝다. 그러니 슈퍼맨은 우리 인간이 인간됨에 실패한 모든 파편을 절망과 비관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 올린 휴먼의 안티테제에 가까운 셈이다. 그렇다 안티테제. 그는 절대 인간이 될 수 없다.


SF를 좋아하는 데다 슈퍼히어로물도 취향이라 마블 광풍이 사그라든 뒤에도 여전히 관련 콘텐츠들을 찾아보는데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이 대개 그러하듯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주제인 경우가 많다. 내가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는 부분은 대체로 이런 장르가 인간다움을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선망하는 가치로 두고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인간적인) 친절함이 세상을 구한다랄지, (인간의) 사랑만이 멸망으로부터 지구를 구한다랄지 하는 결말로 도달하는 과정들 말이다. 이 모든 서사의 중심이 되는 것은 단언컨대 '휴머니즘'이다. 세계를, 심지어 우주를 인간의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거다. 그래서 이런 장르의 주요 내용은 로봇이 인간의 형상을 선망한달지(프로메테우스, 블레이드 러너) 인간다움의 필수 조건으로 도리어 유한한 생명과 같은 소멸성을 들며 최종적으로는 인간찬가의 결말로 돌진한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사실상 조금만 들여다보면 로봇이나 히어로들은 인간의 인간됨을 선망할 여지가 조금도 없지 않은가.


파괴되기 쉬운 신체, 유한한 생명,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만의 생존을 위하는 이기적인 존재에게 방대한 네트위크에 접속해 우주적인 사고가 가능한 존재(공각기동대)나 이론상 무한한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로봇(프로메테우스)이 닮고자 하는 유인이 있다는 설정은 실제로 개연성이 거의 없는 것은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슈퍼맨 역시 그가 인간을 닮아가고자 한다는 분석은 어딘지 좀 괴상하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철저히 인간과는 다른 신체와 정신을 지닌, 인간으로부터 가장 이질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가장 인간적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질성


슈퍼맨의 이 인간됨에 대해서는 제임스 건이 리부트 한 슈퍼맨이 개봉하면서 더 흥미로운 주제가 되어가는 것 같다. 기존 DC 시리즈에서 잭스나이더가 지나치게 절대적인 힘을 지닌 고능한 존재로서의 고독과 그렇기에 신성과 휴머니즘 사이에서 갈등하는 초인의 모습을 그려냈다면 제임스 건이 리부트 한 슈퍼맨은 신적인 존재라기보다는 도리어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슈퍼히어로를 그려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만이 아니라 다람쥐와 같은 동물들을 구해내고 심지어 도시를 파괴하고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 외계 괴물을 진압하는데도 그 생명체가 다치지 않도록 신경 쓸 정도로 다정하다. 그리고 슈퍼맨의 오래된 팬들은 아무래도 제임스 건의 버전이 코믹스에서 그려진 슈퍼맨의 원형에 더 가깝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휴머니즘은 철저히 인간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프리즘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생존과 번영 그리고 편의를 위해서 자연을 개발하고 이용하고 착취해 온 인류의 역사는 휴머니즘적인 시각에서 정당성을 획득한다. 인간이 인간의 존속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인간 사회에서의 선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이러한 인본주의적 시각은 눈부신 발전을 이뤄낸 동시에 많은 모순과 파괴적인 결말을 함께 예비하고 있다. 전쟁, 기후위기, 폭력과 착취의 문제는 자연계에서는 발생하지 않는 철저히 인간의, 인간으로 인한 문제들이다. 이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내던져진 이 이방인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다른 생명체들로 인한 문제를 해결해내야 할 위치에 서게 됐다.


제임스 건의 슈퍼맨은 인간에 의해 자행되는 전지구적 문제들 한가운데 슈퍼맨을 밀어 넣는데 망설임이 없다. 국제 전쟁, 좀 더 엄격히 말하자면 일방적 학살의 현장으로 제3 자라고 할 수 있는 (슈퍼맨은 외계인이기 때문에 정말 말 그대로 제 3자다) 슈퍼맨을 끌어들인 감독의 선택은 슈퍼맨이 지니고 있는 가장 비인간적인 속성을 정면으로 드러낸다. 그것도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이 슈퍼맨은 잭 스나이더의 슈퍼맨처럼 신적인 영역에서 인간들의 죄를 단죄하는 역할이 아니라 인간들이 저지르고 있는 폭력에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대응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는 렉스 루터와 인간들이 초래한 대멸망을 저지하면서도 그 어떤 생명체도 희생시키지 않는다. 내란과 내전, 폭력과 공작으로 얼룩진 가장 인간적인 해결방식은 슈퍼맨의 몫이 아니다. 실질적으로 렉스 루터의 음모를 파쇄하는 역할은 로이스 레인과 그의 동료 기자들, 그리고 내전과 같은 분쟁의 저지는 다른 동료인 그린랜턴 등에 의해 수행된다.


슈퍼맨은 그의 또 다른 내면이라고 할 수 있는, 더욱이 그것이 인간에 의해 창조되어 인간으로 성장한 존재와 거울상을 이루며 대적한다. 자기 자신 안의 (폭력적인) 인간성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또 다른 존재는 슈퍼맨을 구성하고 있지 않은 실패한 휴머니즘의 총체다. 무지성적이고 폭력적이며 사유하지 않는다. 이 폭력적인 존재의 정반대의 위치에서 슈퍼맨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이상의 지향점을 향한다. 영화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의 근원인 탐욕과 이기심, 질투와 시기 같은 인간적인 욕망들은 그 대척점에 존재하는 이타심과 애정, 포용과 화합이라는 이데아로 변화되어 슈퍼맨의 내부에 자리 잡는다.



영화 내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세상의 배척을 받으며 지친 몸을 이끌고 로이스 레인의 집에 잠시 들른 슈퍼맨이 작은 의자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는 모습이었다. 곧이어 그의 연인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아주 짧은 그 찰나는 전 우주에 이제 몇 남지 않은 멸망한 종족의 마지막 생존자로서 지독하게 외로울 수밖에 없는 그의 처지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는 지구에 존재하고 지구인들과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지만 실은 서로 다른 존재이기에 필연적으로 완전히 이해받을 수 없는 영원한 이방인이다. 외면적으로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그것도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그의 신체는 인간과는 전혀 다르게 구성되어 있고 그렇기에 인간과는 전혀 다르게 사고할 수밖에 없다.


타자성


슈퍼맨은 인간과 다르다. 전혀 다르다. 그는 인간이 아니기에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인간의 생명보다 낮게 여기지 않는다. 아이를 다람쥐보다 먼저 구해야 한다던지, 괴수는 인간을 해치기 때문에 살상해야 한다는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슈퍼맨이 행하는 선행들은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 그가 인간이 아니기에 할 수 있는 것들로 이해하는 쪽이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는 인간들이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저지르는 폭력과 갈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렉스 박사가 열등감과 질투심에 사로잡혀 내지르는 열기를 그는 아마 평생(크립톤인의 수명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공감할 수 없을 것이다. 보라비아가 전쟁을 일으키는 이유를, 미국이 이를 용인하는 이유를, 인간이 다른 생명체를 착취하고 죽이는 이유를, 스스로의 공동체를 파괴하고 다른 존재들을 억압하는 이유를 아마 슈퍼맨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로이스 레인의 집에서 창 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스카이 라인을 배경으로 의자에 앉은 슈퍼맨의 모습은 (그가 자신의 연인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외로워 보인다. 이기심, 탐욕, 저열한 욕망, 억압과 착취, 파괴와 단절과 같이 인간을 구성하는 요인들이 탈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인간이 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슈퍼맨을 구성하는 것은 이것들을 정확히 반전시킨 속성들이다. 이타심과 고결함, 해방과 자유, 평화와 연대과 같은,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이 매번 도달하기에 처절하게 실패하고 마는 가치들의 총합이 슈퍼맨을 이루고 있다. 우리가 가닿고자 했으나 결코 성취하지 못하는 가장 인간적인 가치들이(혹은 우리가 인간의 가장 고결한 속성이라고 믿고 있는) 슈퍼맨의 내부에서는 이미 획득되어 기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이상적인 인간상의 구현은 슈퍼맨의 가장 큰 특성인 '타자성'에 의해 무리 없이 연결되어 작동한다. 슈퍼맨이 외계인이라는 설정을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는데 그가 인간이 도달하는데 실패한 가장 인간적인 이데아에 도달하는 데 성공할 수 있는 가장 큰 요인이 바로 이 타자성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인간 히어로가 자기중심적 사고, 즉 휴머니즘의 그물에 사로잡히는 반면 슈퍼맨은 철저히 외부에서 온 존재로서 인간 아님의 속성을 유지한다. 슈퍼맨의 이 독특한 위치성은 그가 행하는 모든 선행에 당위성은 물론 개연성을 부여한다. 그는 외부자이기에 인간의 관점으로부터 자유롭고 자유롭기 때문에 모든 생명체를 소중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인간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적이 없기에 오히려 가장 인간적인 이데아로 존재하는 데 성공한다. 무리에 받아들여지지 않은 철저한 비주류로서, 공동체에 소속되는데 매번 실패하는 외부인으로서, 내부의 이익에 복무하지 않는 비관계자로서, 이런저런 연에 매여있지 않는 비연루자로서 외계인이자 이주자이자 이방인이자 타자인 그는 인간이 도무지 획득할 수 없는 '타자성'을 내면에 품고 있는 존재로 행동한다.


이 타자성 덕분에 슈퍼맨은 자기중심적으로 나르시시스틱 하고, 내부와 외부를 가리며 소속감을 찾는, 그렇기에 타자를 착취하고 말살하고자 하는 인류의 원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그는 인간과 전혀 다르게 감각하고 사고하고 사유한다. 지구인과 연애를 하든, 결혼을 하든, 가정을 꾸리든, 신문사에 취직을 하고 직업을 가져도 그는 아마 영원히 지구 어딘가에 귀속될 수 없을 것이다. 이 귀속불가능성이, 결코 내부자가 될 수 없는 존재의 속성이 우리가 슈퍼맨을 가장 인간적인 존재로 착각하게 만드는 마법의 원천이다. 잭 스나이더가 신성으로 묘사하는 슈퍼맨이나 제임스 건이 인간보다 인간적인 존재로 그려내는 슈퍼맨 모두 외피로 드러나는 모습은 다르지만 그 코어에는 바로 이 타자성이 존재한다. 가장 신에 근접하게 만드는 속성도, 가장 인간에 가깝게 만드는 속성도 모두 '타자성'덕분인 셈이다. 어쩌면 신과 가장 인간적인 인간이라는 개념으로 서로 맞닿아있는 한 개념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인간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날 때에만 신성을 획득한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해탈이라고 하고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희생이라고 이야기한다. 자신 안의 타자성을 깨닫는 것은 인간 개인의 이기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이타적인 행동을 수행하도록 하는 가장 근원적인 요건인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도달하고자 했으나 매번 실패하고 만, 우리 스스로가 비대한 자의식으로 가장 인간적이라고 규정하며 찬양하는 이타심과 자기희생과 같은 고결한 속성들은 실은 자신 안의 타자성을 감각할 수 없는 인간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신성에 가까운 것이며 그렇기에 인간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회의할 수밖에 없는 이데아의 구현인 셈이다. 그리고 나는 이게 바로 슈퍼맨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신으로, 때로는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존재로 오해받는, 영원한 이방인말이다. 먼 행성으로부터 지구에 불시착한.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