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 좋은 영화관이 없어서요.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할 어그로지만 사실 정말로 저렇게 생각한다. 애초에 케데헌이 미국 이주 2세대, 3세대들이 외부자의 시각에서 한국문화를 들여다보고 만든 작품이라는 점은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 질문은 왜 좋은, 아니 더 정확히 정리하자면 더 재밌는 작품들을 한국에서 만나보기 힘든 것인지에 대한 답으로 이어진다. 그렇다. 사람들은 좋은 콘텐츠보다 재밌는 콘텐츠를 좋아한다. 언제나 좋은 콘텐츠가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데이터를 살펴보면 결국 인기 있는 콘텐츠는 재미있는 콘텐츠다. 그것이 꼭 좋은 콘텐츠는 아님은 물론이고.
어찌 됐든 기본적으로 재미라고 하는 것은 다양한 창의성에서 비롯된다. 욕으로 뒤덮인 콘텐츠든, 교훈적인 콘텐츠든 서로 달라야한다. 어슷비슷한 콘텐츠는 매력이 없다. 다루는 소재가 같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변주하느냐가 중요하고 재미는 그런 참신함에서 비롯된다. 문제는 다양한 콘텐츠가 등장하기 위해서는 제작자 풀이 다양해야 한다는 점이다. 김태호 PD가 열개의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보다 수많은 PD들이 이런저런 , 심지어 아니 저런 걸 만들었어? 싶을 정도의 제작물이 쏟아져 나와야 씬이 풍성해지고 각기 다른 재미들이 생겨난다. 본인이 직접 제작을 하지 않는 한, 우리는 기다릴 수밖에 없다. 수많은 씨앗을 뿌려둬서 무엇이 자라날지 모르는 정원을 돌보는 것처럼 여기저기서 싹이 트는 모종들을 지켜보고 그것이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길 기대하는 정원사의 마음으로. 혹은 어드벤트 캘린더처럼. 다 똑같은 선물만 들어있다면 얼마나 지루한 일이야.
문제는 다양한 창작자를 길러내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거다. 이건 정말 무작위의 주사위 게임과도 같다. 주식도 아니고 우량주만 골라서 지원할 수도 없는 일이다. 창작이라는 것은 수능과 달라서 정답만 적는다고 높은 점수를 성취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학교에 잘 적응을 못하고 겉돌더라도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대인관계가 어렵더라도 좋은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있다. 모범생이 아니더라도, 아니 오히려 모범생이 아니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것을 예술로 연결시키고 발산하게 하는 힘은 도식적인 루트로는 도저히 길러낼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래서 씨를, 무엇이 자라날지 모를 씨를 널리 뿌려야 한다. 좋은 토양을 마련해서. 수많은 유명한 작가와 감독들이 누군가의 등을 보며 자라났음을 상기한다면 규율이나 규칙으로 육성할 수 없는 자유로운 개인들이 자신의 주변에서 영감을 받고 길을 찾을 수 있도록 길을 넓게 펼쳐둬야 한다.
종종 지역에서 드물게 열리는 영화제와 출판 관련 행사들을 찾을 때마다 이런 생각들을 한다. 비록 이 도시들은 가난하지만 적어도 아이들은 영화를 보면서 성장해 가는구나. 전주의 크고 작은 시네마테크들과 그 장소에서 상영해 주는 괴이하고 아름답고 즐겁고 슬픈 작품들을 마주할 때마다, 낡고 낡아서 마치 고대 신전처럼 느껴지는 광주극장의 허름한 좌석에 앉아 벌벌 떨면서도 (이곳은 겨울에 춥기로 유명하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펼쳐내는 고색창연한 이미지들과 이해하기도 어려운 고다르의 괴상한 필름을, 저 멀리 아프가니스탄에서 어느 젊은 여성 감독이 보내는 메시지들을 마주치며 이 영화들과 함께 성장해온 아이들은 어떤 창작자로 자라나게 될까를 생각하면 마음이 두근두근 해지는 거다. 책과 영화에서 등장하는 시네마 키드들이 별 다를 게 있나. 여기서 지금 이런 영화를 함께 보는 괴짜들을 말하는 거잖아. 소년은, 소녀는 각자의 방식대로 이상한 거장들의 등을 보며 자라난다. 언젠가는 나도 저런 작품을 만들겠어. 부끄러워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그런 꿈들을 지니고.
그렇게 다양한 성장과정, 다양한 경험, 다양한 사고를 하는 각기 다른 존재들이 자신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같은 소재를 보고도 다른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작품들은 욕을 먹거나 범작이라고 지워지거나 이해받지 못한 채 사라지겠지만(그것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중 몇몇은 살아남아 대중의 간택을 받게 된다. 케데헌처럼. 그러니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2의 케데헌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지금 우리가, 당신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인 것이다.
아이들이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며, 그가 어떤 환경에 처해있든, 성장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문화공간과 이벤트가 필요하다. 잘 사는 가정이라 부모가 데리고 다니는 클래식 공연이나 뮤지컬 같은 거 말고도 많은 아이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영화관이나 시네마 테크, 도서관 같은 곳들 말이다. 이 아이들이 조금 더 자라나 직접 제작을 하고 싶어질 때 그것을 지원해 줄 수 있는 장비와 시설을 갖춘 공간들도 필요하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좋은 문화정책의 방향이다.
언제 수확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더군다나 이 토양에서 자라난다고 해도 어느 하나 성공할지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의 텃밭을 꾸준히 갈고 물을 주고 지켜보는 것, 이 지루하고 태가 잘 나지 않는 일이야말로 문화정책이 수행해야 하는 업무의 본질이다. 손해 보는 장사.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남이 버는 그거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문화정책은 언제나 성과에 목을 맨다. 아이들과 지역에 투여하는 지원을 아까운 것으로 생각한다. 심지어 이것은 문화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도 감지되는 경향성이다. 될 놈만 키우자는, 지극히 한국적인 마인드 셋으로는 무수히 많은 시도를 무수히 많은 실패로 등치 시킨다. 그리고 실패했으니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한다.
최근(이것도 이제 다소 흘러지나 가는 타이밍이 되어버렸지만) 한국 영화가 높은 평가를 받았던 시점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박찬욱, 봉준호 감독을 위시해 수많은 거장들이 청년이었을 당시 문화정책으로부터 받은 지원들이 겹겹이 쌓여있다. 더 멀리 거슬러가서는 수많은 영화인들이 시위에 동참했던 '스크린 쿼터제'라는 인위적인 보호막도 작동했었고. 지금의 수확은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에 뿌려둔 씨앗이 드디어 발아하고 성장하여 꽃을 피워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 남아있는 것은 꽃이 핀 이후에 그것이 다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가의 문제다.
수많은 문화지원 정책들이, 특히 지역을 향한, 실효 없음과 성과 부족으로 평가절하를 당한다. 지원을 하면 당장 몇 년 안에 케데헌 같은 대형 흥행이 있어야 할 것처럼, 기다리는 법 없이, 투자하는 것 없이 결과물을 뽑아내길 열망한다.
무엇이 재미인가. 다양한 시선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무엇보다 우리는 새싹들을 길러낼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보다도 결과를 뷰수와 돈으로만 환산하려 하는 방법으로는 결코 가닿을 수 없는 망상을 꿈꾼다.
작은 마을의 아이들이 어렵게 수입해 온 영화를 관람할 수 있을 때, CGV니 메가박스니 하는 대형 프랜차이즈 영화관만이 아니라 크고 작은 시네마테크에서 이름도 발음하기 어려운 괴상한 감독들을 마주할 수 있을 때, 남이 만든 것을 소비하는 것만이 아니라 나도 만들어보고 싶다는 열망이 눈을 뜰 때 이 작고도 거대한 세계는 와글와글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떤 기이한 작품이 탄생할지 모른다는 설렘과 두려움, 기대와 불안을 모두 담고서.
그제야 우리는 비로소 재미를 손에 쥐게 될 것이다. 정말로 확실한 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