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CIN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ulblue Jan 23. 2024

나의 올드 오크(2024), 켄로치

가장 사적이면서 가장 공적인 켄로치의 방

글을 공유하거나 인용시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길 원합니다. 자유롭게 활용해주세요. 다만 상업적 이용일 경우는 별도로 문의 바랍니다. 언제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은 공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본에 밀려 조금씩 사라지다 이제는 거의 자취를 감춘 ‘모두의 공간’에 대한.

길을 걷다 보면 문득 머물러 있을 곳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주 어렸을 적 동네 주민들이 소소한 일상을 나누던 시장 좌판, 큰 나무 아래면 어김없이 놓여있던 시골 작은 누정들, 가게 앞이나 심지어 개인 집 앞에도 느닷없이 놓여있던 나무 의자나 조그마한 테이블 같은 것들, 숲길, 정원, 그리고 공원처럼 사유지가 아닌 공공의 공간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공간이 사람의 생활습관을 결정짓고 더 나아가 의식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물리적 공공 공간의 소멸은 공공의 개념이 우리의 의식 안에서도 밀려났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공간의 죽음은 개념의 죽음이기도 하다.


공공의 공간은 공공의 문제를 탄생시킨다. 인간은 고립된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며 세상과 상호작용을 한다. 서로를 스쳐 지나가도록 일자로 도로를 디자인하더라도 길을 벗어나 여울이나 웅덩이처럼 고여있는 잉여의 공간을 찾아내고 머무는 존재이며 그렇게 서로를 발견하는 동물이다. 어울려 다니며 의미 없이 함께하는, 우리는 무리 짓는 생명체다.


이유 없이 오다가다 모여서 자신의 근황과 문제를 이웃과 공유하다 보면 결국은 교차되는 공동의 문제를 찾아낼 수 있다. 그렇게 서로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던 습속들이 모이면 ‘운동(movement)이 된다. 그리고 문제를 찾아내고 해결하는 주체들을 활동가라고 한다. 마을의 작은 운동은 이런 식으로 조직되고 성장하여 조합이 되고 단체가 되고 끝내는 사회의 움직임이 된다.


오래된 시네마 작가이자 활동가인 켄로치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올드 오크는 이러한 운동의 본질을 사라지는 공공의 공간을 통해 조명한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올드 오크는 마을의 활동가로 또 노조원으로 그리고 긴 시간을 운동가로 살아온 TJ가 운영하는 술집이자 마을에 남은 마지막 공공의 장소다.

광산의 광물이 주요 수입원이었던 과거에 광부들의 마을에는 공공 공간이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영화의 인물들이 지적하듯이 특정인이 사유하지 않는 광장이나 종교 단체가 운영해 온 공유 공간들은 산업이 쇠락하자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자본과 함께 폐쇄된다. 광산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난 후 마을은 빠르게 퇴락하기 시작하는데 가장 먼저 사라진 것들은 마을 사람들을 위한 복지였고 가장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임대업이었다.


더 이상 돈이 되지 않아 방치된 마을에 남은 마지막 돈줄을 뽑아가는 게 폐가로 변해가는 오래된 거주지들을 헐값에 사들이는 거대한 부동산업체였다는 점은 황폐화된 공간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조리 착즙 하고자 하는 자본의 집요하고 세밀한 속성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에 스산하다.


자본이 없는 곳에는 교육도 붕괴된다. 공공의 장소가 사라지자 아이들은 방치되어 거리에서 굶고 실업자들은 마지막으로 남은 작은 사유지에 매여 이주하지도 그렇다고 정착하지도 못한 채 자신이 안전하게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 떠돈다. 그리고 가장 저렴한 거주지가 있는 이 마을로 시리아 난민들이 들어온다.


돈이 있는 자들은 그들의 곁을 난민들에게 내어주지 않는다는 마을 사람의 불만은 그런 점에서 신랄하다. 자본은 공간을 사적인 것으로 포장해 가장 비싼 값에 팔아먹고 돈이 되지 않아 성가시지만 소멸시킬 수 없는 존재들인 실직자나 난민들은 가장 가치 없는, 그러나 결코 공짜는 아닌 사유지에 몰아넣는 방식으로 처리한다.

마을의 마지막 공공의 공간으로 남아버린 TJ의 올드 오크 역시 사유지라는 것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역설적으로 올드 오크는 이 마을이 자본과의 전투에서 장렬히 패배했음을 알려주는 상징공간이다. 마을 사람들이 유일하게 안전하게 모일 수 있는 마지막 장소조차 실은 상업공간이라니.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지.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게 공공의 공간이라면 가장 나중에 사라지는 것은 사유지일 수밖에. 그렇게 올드 오크는 사적인 공간이지만 주인인 TJ덕분에 공공의 기능을 일정 부분 수행하는 공간으로 남는다. 갈 곳 없는 주민들은 TJ의 올드 오크에 모여 (비록 그것이 난민들의 침입에 분개하는 불만이라 할지라도) 서로의 생각과 고민을 나누며 공동의 의견을 구한다.


사유지로 내몰리는 사람들은 공공의 공간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함께 모여야 하고 모일 수 있는 공간은 요원하다. 올드오크의 뒷방은 그런 의미에서 좋은 공공 공간의 가능성을 지녔다. 무엇보다 넓고 사람들이 정주할 수 있는 의자들이 있으니까.  이 공공의 공간을 둘러싸고 이제 변화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두 세력이 충돌한다. 마을에서 난민들을 축출하고자 하는 노동자들과 난민들과의 연대를 통해 마을을 되살리고자 하는 활동가들의 공간 쟁탈전이 영화 올드 오크의 주요 줄거리다.

영화를 따라가며 올드오크의 뒷방은 어쩌면 켄로치가 닫아 둔 마음의 공간이기도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영화를 통해, 또 삶을 통해 치열하게 공공의 것들을 지키려는 싸움을 해왔지만 대체로 패배해 왔던 켄로치 개인 역사의 기록들이 광부들의 사진처럼 액자에 걸려있는. 자신 안의 공공 공간이 축소되고 뒤로 밀리면서도 고집스럽게 남겨두었던 켄로치의 마지막 작은 방. 배선도 낡고 누군가를 안전히 담아내기에는 위험할 정도로 손질되지 않은 방이지만 끝내 포기하지 않고 마음 한 구석에 남겨놓은 그의 공유 공간에 켄로치는 마지막 손님으로 난민들을 초대한다.

켄 로치의 대부분의 영화가 그러했지만 올드 오크에서, 그러니까 이 오래된 감독으로부터 발견한 가장 놀라운 점은 그가 보여주는 이 마을의 이야기들이 결코 영국의 어느 먼 마을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지금 한국에서, 나의 도시, 나의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이 그의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쇠락한 지역의 마지막 자금까지 빨아들이는, 이 기업이 세상에 어떤 좋은 영향을 미치는 지도 알 수 없는 국적불명의 임대업 회사들, 방치된 마을과 공교육의 부재, 관리되지 않아 거칠어지는 이웃들, 그리고 고급 주거지와 달리 밀집해 있기에 이웃 간에 빈번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생활분쟁들, 무너지는 공동체의식과 노동조합 정신, 그리고 수많은 이유로 국제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난민들까지.


이웃 개의 공격, 거리를 나도는 청소년들, 굶주림과 빈약한 장애복지, 폐허가 되어가는 빈 주택들과 떨어지는 집값, 인구 감소와 모자라는 병원, 의사, 교통의 문제들, 제주도로 들어온 예멘 난민들. 지금 우리가, 서울에서 멀면 멀수록 먼저 겪고 있는 주요한 문제들이 보편성을 획득한 채 스크린 안에서 재현된다.


켄로치는 우리가 봉착한 동시대의 문제를 현재의 감각으로 포착하는데 탁월하다. 그는 결코 지난 이야기에 머물거나 앞으로 도래할 문제를 예견하지 않는다. 켄로치의 관심사는 언제나 변함없이 현재라는 타임라인에 고정돼 있고 나는 이걸 정말로 드물고 소중한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함께 먹을 때 더 단단해진다.


켄로치 자기 자신이기도 한 TJ는 어머니가 했던 말을 야라에게 전해주며 자신의 마지막 방을 모두에게 개방한다.


힘껏 애썼으나 승리하지 못한, 작은 개 마라까지 이웃에게 잃고서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에게 있는 마지막 자산을 새로운 투쟁을 준비하고 있는 어린 활동가에게 건네며.

오래된 감독들의 마지막 작품을 엿보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들의 이야기에 짙게 묻어나는 일종의 무력함과 패배감을 읽어내지 못했다는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다. 긴 시간 동안 진심을 다했으나 충분히 보상받지 못한 그들의 뜨거운 마음 안에 자리 잡은 꺾인 정신의 상흔과 무력함들, 그리고 다소의 불신과 시니컬함. 그러나 이 모든 좌절들은 오히려 치열했던 그들의 전투를 오래도록 기억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싸워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비관과 낙관이 있다. 야라의 말처럼 희망이야말로 고통스럽기 마련이고 가장 큰 희망만이 가장 큰 좌절로 이어지므로.


그래서 TJ는 마지막 방을 걸어 잠그고 소중한 정신들을 창고처럼 쌓아둔다. 열정적이었던 청년시절과 다르게 일정한 선을 긋고 적당한 참여를 유지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국에 켄 로치는 다시 이야기한다. 자신 이후에도 지속될 어떤 싸움들을 응원하며 마지막 남은 그의 사유지를 활짝 열고 노동자와 난민과 이웃들과 우리를 초대한다. 나의 시간은 끝나가고 있고 분투했으나 여기까지였다고. 남겨진 이들에게 이곳을 부탁하면서.


그런 점에서 올드 오크의 마지막 방은 TJ와 켄로치가 어렵게 지켜온, 역설적으로 그들의 성취이자 자랑스러운 유산이기도 하다. 그들은 패배했으나 전부 빼앗기지 않았고 결국은 자신은 물론이고 타자들을 위한 공간을 결정적으로 지켜내 온 셈이니까. 물려줄 자산. 넘겨줄 레거시. 전승되는 정신이 그에게는 여전히 남아있다.


인종과 국적, 문화와 계급. 분열로 이르기 쉬운 수많은 차이들 속에서도 끝끝내 상실에 애도하고 타인의 고통에 감응하는 인간 보편의 공통점을 길어 올리며 야라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마을 사람들의 제례를 통해 그는 말을 건넨다. 연대라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대단한 교육이나 운동을 통해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함께 모여 밥을 나누고 이야기를 하며 서로 공유하는 것들을 늘려가며 쌓여가는 과정 그 자체라는 것을.


조금 오래전에 정치를 하겠다는 한 사람에게 했던 말이 있다. 당에 영입되는 것보다 자신의 가장 가까이에서 운동을 통해 기반을 쌓고 그 힘을 통해 당을 바꾸고 정치를 바꿨으면 좋겠다고. 그 반대는 아무런 힘이 없을 것이라고. 수많은 청년들이 새로운 정치를 명분으로 내세우는 당에 스카우트되고 그걸 새로운 스펙으로 휘두르는 세상에서는 켄로치의 운동이 가리키는 지점을 아마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함께 부대껴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것들, 수많은 강의나 유려한 글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감각이야말로 연대의식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모든 정치의 근원이라는 것을.


더 정교하게 공간을 분리하고 더럽고 추하거나 약한 것들을 가장 저렴한 공간에 밀어 넣어 없는 척하려 드는 세상에서 켄로치는 그의 가장 사적이면서 동시에 공적인 공간인 영화 안으로 모두를 불러들인다. 문을 활짝 열고 인종과 계급을 너머,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당신을 초대한다. 그리하여 그의 영화 올드 오크는 가장 개인적인 기록이었던 야라의 기록 사진으로부터 첫 장면을 시작하여 종국에는 모두의 공간인 거리를 마을 사람들이 점유하는 (비록 시위가 아닌 축제였지만) 퍼레이드를 다큐멘터리처럼 기록하며 마무리한다.

가장 개인 적인 것을 가장 공동의 것으로 확장해 나가는 것, 그리하여 한 사람의 시점이 모두의 시점으로, 한 사람의 뷰파인더가 모두의 영화로, 매체가, 세상이 그렇게 확장되어 가는 흐름을 보며 무척 켄로치답다고 그래서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영화란, 시네마란 당신에게 그런 것이었구나.


언제나 영화 그 이상의 세상을 이야기하고자 했던, 나의 소중한 감독을 기억하며 부디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남겨진 사람들이 사유지에서 벗어나 공공의 공간을 지향하기를 기대한다. 거창한 것이 아니라 단지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운동은 시작된다. 마음의 움직임이 시작된다.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공공의 것을 포기하지 않기를. 지금 이 순간, 함께, 이 곳에서. 이 오래된 운동가의 바람대로.


strength, solidarity, resistance.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보다 더 큰 세상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