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있습니다. 꼭 영화 보시고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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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컬트 물의 외피를 벗겨내고 <파묘>를 식민지배로 인한 우리 내부의 상흔을 파올리는 대속 작업으로 이해할 때 작품 속 캐릭터들은 한층 더 풍부한 의미를 얻는다.
영화에 대한 개괄적인 감상에서도 전술했듯이 (https://brunch.co.kr/@soulandu/95) 장재현 감독은 <파묘>를 일제를 겨냥한 민족주의적 칼날로 사용하기보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 땅에, 그러니까 우리 안에 깊이 묻어버린 어떤 것들을 파 올려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다. 감독의 이런 바람은 모든 사건이 끝나고 난 직후 4명의 주인공들의 신체에 나타나는 이상 현상으로 연결된다. 항일이라는 키워드로만 영화를 이해한다면 사족같이 느껴지는 장면들일 것이다. 장재현 감독은 단순히 일본의 사악한 지배행위에 대한 비판을 넘어 그것이 여전히 우리에게 미치고 있는 영향과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아직은 우리가 통과해내지 못해 미결로 남은 과제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필연적으로 우리 땅을 연구해 온 풍수사여야 한다. 땅을 안다는 것은 그곳의 특성만이 아니라 그 공간에 누적되어 온 역사와 사연을 안다는 의미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고 미래를 점치는 풍수사는 등장인물 그 누구보다 이 땅의 내일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험한 것을 피해 가자는 말에 상덕은 앞으로 이 땅 위에 태어나 살아갈 후손들을 이야기하며 그들을 위해서라도 땅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사람들을 설득한다. 풍수사로서의 그의 정체성은 상덕으로 하여금 다음 세대가 맞이할 새로운 땅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한다. 미래라는 영역에 험한 것을 묻어 보낼 수 없다는 의지가 영화 후반부 그를 움직이는 주요 동력이다.
그러나 애초에 이 사건을 물어오는 것은 화림이다. 화림은 4인 중 유일하게 여성이다. <파묘>를 식민지배와 그 피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읽을 때 우리는 자연적으로 화림을 통해 일제 강점기 하에 가장 처참하게 유린당했던 당대의 여성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녀에게 깃든 신의 존재를 상기해봤을 때는 더더욱. 주체성을 강탈당하고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던 존재들. 안타깝게도 <파묘>는 일제강점의 흔적을 극복하고자 하나 역설적으로 그 어떤 영화보다 더 강력하게 일제의 존재감이 느껴지는 작품이기도 한데 문제의 그것을 대면하고 화림은 말한다. 이상한 일이라고. 령은 결코 피와 살을 지닌 존재들을 이길 수 없는 게 순리인데 어째서인지 이것은 피와 살이 있는 존재들을 해친다고.
"령은 결코 피와 살을 지닌 존재를 이길 수 없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메타포다. 피와 살이 있는 존재들. 그것은 산 사람들을 말한다. 산 사람을 과거의 망령이 해할 도리가 없건만 <파묘>에서는 그것이 일어난다. 영화 상에서는 그것이 인간의 령이 아니라 이와는 다른 정령이라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실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살아있는 자들이 살아있는 자로 기능하는데 실패해 왔기 때문이다.
모든 결자해지에는 타이밍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누군가에게 잘못을 한 경우 사과는 적절한 시기에 이뤄져야 한다. 해방 이후 우리는 최선을 다해왔건만 제대로 된 해법을 내놓지 못했다. 위안부와 근로 정신대 문제는 많은 수의 피해자들이 바라던 결론을 기다리다 유명을 달리하고 있다. 이미 사후로 떠나 령이 된 존재들이 아닌 피와 살을 지닌 살아있는 존재로서 동료 시민들의 오랜 바람은 의식 저편으로 묻히다 못해 오랜 기다림 끝에 한이 되어간다. 살아있는 자들조차 건사하지 못한 우리들의 부채의식은 긴 시간 동안 모른 척 잠들어있다 이따금 파묘와 같은 제의 속에 간헐적으로 되살아난다. 3.1절이나 광복절 같은 특수한 기간 동안 긴 바람들은 지면 위로 떠올랐다 또 사라진다. 살아있는 자들의 슬픔과 분노 그리고 한이 누적되어 온 땅에 미래는 있는 가.
대통령의 염을 하는 이름난 장의사 영근, 대기업이나 건설사 건축물의 풍수를 봐주는 상덕, 이름난 무당인 화림 모두 우리처럼 각자의 현실에서 세속적인 삶을 그럭저럭 잘 유지해 온 인물들이다. 수익과 배분을 셈하고 가정을 꾸리고 자녀의 결혼을 목전에 둔, 평범한 사람들. 문제의 묘를 파헤치기 전까지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가장 주요한 동기 역시 돈이었다. 해방 이후 다시 찾아온 비극적 내전과 이로 인해 과거를 바로잡기보다 살아남는데 급급했던 생존의 기억들. 그 사이 뿌리째 뽑혀나간 토대와 기반 위로 빠르게 내려앉은 근대화 작업들.
실은 겹겹으로 한이 쌓인 우리의 땅 위로 아무 문제없다는 듯이 층층 쌓아 올라가는 대형 건물들. 빠르게 올라가는 건설 현장을 돌아보고 평온한 묫자리들을 지나치며 상덕은, 영근은 그리고 화림은 오늘을 살아간다. 이 일상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 것은 화림이다. <파묘>의 문제를 가장 주체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캐릭터가 풍수사 상덕이듯이 화림이 오래 잊힌 문제를 수면 위로 끄집어내는 역할이라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화림은 죽은 자들의 은원을 다루는 무당이다. 그녀의 직업적 시간은 주로 과거에 머물러있고 그녀가 해결하는 일 또한 과거의 것들일 수밖에 없다. 또한 상덕이 땅의 정기랄지 우리 민족의 미래랄지 하는 다소 모호한 것들을 중시한다면 화림은 살아있는 인간들의 구체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다. 상덕이 사건의 까다로움에 손을 털려하자 '아기가 아프잖아요.'라며 그를 설득하는 것도 화림이다. 물론 절반 이상은 거액의 보수를 노렸던 거였겠지만 실제로 살아있는 인간의 괴로움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역시 그녀다.
더욱이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화림의 지주신인 백의의 할매가 상징하는 바는 더욱 극명해진다. 장재현 감독이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많은 관객들은 '험한 것'을 거대한 느티나무를 배수에 두고 직접 대면한 할매의 장면에서 느껴지는 정서를 은연중에 이해하고 있다. 그녀는 우리 땅의 상징 그 자체이자 수탈당한 토지의 이미지다. 그녀는 여성이고 할매고 화림 개인이자 집합적인 기억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영화 중후반부를 지나 어차피 이 코드라면 이 문제의 대면 씬이 더 극적이길 바랐다. 차라리 사천왕처럼 그것의 목을 할매가 콱 맨발로 밟아버리길. 물론 그랬다면 영화는 정말 짜쳐졌을 것이다..)
한국 민속신앙에서는 거대한 느티나무가 매우 영험한 존재로 여겨진다. 마을과 마을의 땅을 지키는 수호신. 그러나 <파묘>에서는 화림의 지주신이 느티나무 신령인 것처럼 적을 속일 뿐 실제로 느티나무에 깃든 신은 아니었다. 해방 이후 단기간 전쟁과 성장이라는 급격한 변화를 겪으며 민속신앙은 과학의 이름 하에 근절되어야 할 습속으로 점차 사라져 갔다. 나무에 신이 깃들 여력도 없이 그렇게 빠르게 개발되어 온 땅. 텅 빈 나무에 화림이 대신 앉아 그것을 대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화림은 영화 내부에서 상당히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준다. 가장 극렬하게, 그리고 가장 처음으로 험한 것에 맞서는 대상은 바로 봉길이다. 젊은 청년. 역사라는 과거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어린 존재가 그것에 가장 먼저 저항하는 셈이다. 수많은 청년들이 일제 강점기에 무용한 죽음으로 내몰렸다. 전쟁에 징집되고 강제 징용에 끌려가고 독립운동을 하다 고문을 당하고 생체 실험체로 고통스럽게 생을 마감했다. 가장 어린 존재들부터 수탈의 대상이 되었고 동시에 가장 어린 존재들이 끊임없이 독립운동에 맥을 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화림이 공격을 당하자 봉길은 가장 먼저 이를 제지하기 위해 목숨을 내건다. 화림은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봉길의 희생을 지켜봤다는 사실에 고통스러워한다. 그것에 빙의된 봉길은 일제 강점기 당시 청년들이 그러했듯이 신민으로서 주인을 섬기는 구호나 인사를 외치며 발작을 한다. 가장 탐나는 자원으로서의 여성과 청년들. 가장 끔찍하게 유린되었던 두 주체들은 험한 것 앞에 가장 먼저 피해를 받는다.
그렇기에 결국은 상덕이다. 역사에 가장 가까이 위치한 존재로서, 자기 땅의 주체로서 기능하지 못했던 비참함으로부터 가장 가까이 있는 어른인 상덕은 회의적이던 전반과 달리 영화 후반에 이르러 가장 처절하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상덕과 영근은 그래서 필사적으로 묘를 판다. 분명 그 원인이 이 어딘가에 있을 텐데 좀처럼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형체를 찾으며 처음에는 삽으로, 나중에는 맨 손으로 땅을 미친 듯이 파낸다. 특히 중간에 삽을 던져버리는 영근과는 달리 상덕은 마지막 순간까지 집념을 잃지 않는다. 시간을 끌던 화림이 그것을 놓치고 4인의 계획을 눈치챈 험한 것이 상덕을 향해 돌진해 올 때 상덕은 피하지 않고 그것을 붙들어 맨다. 가장 후회하는 존재로서, 그리고 가장 큰 부채감을 느끼는 존재로서, 더 나아가 결자해지를 해내고자 하는 가장 주체적인 존재로서 상덕은 끔찍한 훼손을 당하면서도 젖은 나무 막대를 결코 손에서 놓지 않는다. 전쟁과 폭력을 상징하는 금속의 칼날은 그렇게 대지와 생산을 상징하는 물과 나무에 의해 파훼된다. 너무 늦어버린, 피와 살이 있는 존재들의 분노와 한을 살풀이하듯이 그렇게 상덕은 대속하며 일시적으로나마 문제의 근원을 파묘하고 문제를 제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두 번째 문단에서 전술했듯이 영화는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이야기를 매듭짓지 않는다. 다시 건물이 올라가고 자녀가 결혼하는 등 일상으로 돌아온 4인의 신체에는 극명한 트라우마가 남아있다. 눈을 감으면 되살아나는 악몽, 끔찍한 이미지들을 넘어 상덕의 징후는 더욱 상징적인데 아물어야 할 상처에서 그치지 않고 다시 배어 나오는 피는 이것이 지나간 사건에 대한 예후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인 문제에 대한 은유임을 알게 해 준다.
수많은 광복일을 맞이했건만 우리의 곁에는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벗어나 주체로 다시 서기 위해 존재를 걸고 싸움을 이어나가는 동료 시민들이 존재한다. 길고 긴 지난한 시간 동안 회복하지 못한 우리의 영토는 지리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땅은 돌아왔건만 진정으로 주체성을 박탈당했던 끔찍한 경험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우리의 문제를 우리의 손으로 결자해지 해야 하는 제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전범국의 사과가 있든 없든 우리 내부에서라도 우리의 문제에, 고통받는 동료 시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파 올려 대면할 수 있어야만 한다.
장재현 감독이 깊은 땅 속으로부터 끌어올리고자 했던 것은 그래서 일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자신에 가깝다. <파묘>는 그렇기에 식민지배라는 비정상적인 역사적 상흔의 심부로 들어가 문제의 원인을 찾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긴 영화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너무도 오랜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여전히 깊은 땅 아래 묻힌 채로.
이 모든 슬픔과 분노가 한이 되어.
p.s
1. 이런 의미에서 <파묘>를 단순한 항일 영화로 보는 건 좀 아쉽다고 생각한다.
2. 아니 생각해보니까 최민식은 이순신이었잖아…?
2-2.
상덕을 생각하면 최민식 배우 전작들이 묘하게 오버랩핑이 되서 좀 웃었다. 많은 분들이 초반은 <범죄와의 전쟁> 최익현을 떠올리던데 후반은 그야말로 <명량>이 아닌가 ㅎㅎ
최익현+이순신=김상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