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ulblue Apr 12. 2024

과정의 윤리

정치에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

사내에도 정치란 것이 있다. 온갖 사람들이 모이고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추구하다 보니 다툼도 생기고 방향도 제각 기다. 그리고 아쉽게도 (아마 회사생활하는 모든 분들이 고개를 끄덕거리겠지만) 정말 엉망인 사람들이 의사결정권을 가져가는 경우가 많다. 대체로 어느 회사나 그렇듯이 형님 동생 하면서 잘 모이고 라인을 잘 타는 사람들의 정치력은 실무 능력을 압도한다. 그리고 그렇게 올라가서 그게 실력이라고 주장하곤 하는데 그게 꽤 잘 먹힌다. 그러니


그 사람 능력 좋아.


라고 말할 때 반드시 따라붙어야 할 질문이 바로 이거다. 그러니까 어떤 능력?


능란하게 분열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회사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때는 기회가 돌아가지 않을 마이너들이 주로 쓰는 전략이다. 안정적인 전체 판을 흔들어야 틈이 생기고 그 틈이야말로 비집고 들어가야 할 공간이다. 그래서 흔든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나아가야 할 방향이 괜찮은 지 아닌지를 떠나 자신의 입지를 더 유리하게 창출해 내기 위해 전체를 조각으로 나누는 작업.


한 번 틈이 벌어지기 시작하면 공동체의 붕괴는 굉장히 쉽다. 혁신보다 혁명이 쉬울 수 있다는 게 이런 말이다. 내부의 룰을 존중하면서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정말로 지난한 작업이다. 하지만 박살 난 판을 새로 올리는 과정에서는 빈자리들이 넘쳐 난다. 어디든 하나 주워가져 가는 게 이득인 사람에게 공동의 목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선거가 끝나고 이제 과정의 윤리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화술이 능하고 합리적인 논리를 펼치는 기술이라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 능력으로 지향하는 가치가 중요한 것일 때에나 소중하다. 크고 작은 토론들을 보며 드는 피로감은 그래서다. 무엇을 위한 언변인가 보다 언변 그 자체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사회적 소수자들을 그 누구보다 강력하게 배제하고 자신의 입지를 마련하기 위한 제물로 돌려왔던 사람들이 합리적이라는 미명으로 용인되는 영역. 정치는 기술과 공학이 집권을 위해 중요하다지만 정치의 본질을 묻는 다면 과연 같은 평가를 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승리일까.


시대가 빠르게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수많은 담론과 운동의 흥망성쇠, 신자유주의의 침투와 다양한 주체성을 살해당하고 소비자로서의 정체성만 겨우 남아있는 앙상한 시민의 형상까지. 기업이나 기관의 소유 구조를 분석하고 자본이 이데올로기에 미치는 영향을 비판하던 정치경제학, 운동권의 구심점이었던 맑시즘 같은 거대 담론들이 현실로부터 멀어지면서 시민과 시민사회의 정체성도 동시에 변화해 갔다.


중요하게 다뤄지던 것들이 작은 문제가 되거나 아예 인식의 틀에서 삭제되고 있다. 마치 거대한 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처럼 과거의 사상과 실험과 운동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사회적 약자를 포괄하는 복지, 차별에 저항하는 운동, 혐오를 용납하지 않는 문화가 능력주의, 갈라 치기, 반 PC운동으로 대체된 사회에 공동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갈기갈기 찢긴 잔해 위에서 어떻게든 연결되려는 사람들은 바닥을 기고, 조롱당하고 공권력에 연행된다.


진보의 패배를 비아냥 거리는 사람들이 많다. 무능력하다고. 수많은 정치적 오판들, 제대로 가 닿지 않은 전략들, 내부 갈등과 피치 못할 분열들. 그러나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아있는 마을이 없고 없는 마을을 다시 만들어 올리는 것은 지난한 작업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들이 감당했어야 할 대상은 단순히 정적이나 다른 당들이 아니라 거대한 시대의 조류였으며 그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작업이었다. 정희진이 지적했던 신자유주의에 대한 페미니즘의 투항 이전에 이미 수많은 정치사상들이 먼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사멸됐다. 승리해 본 적 없는 싸움을 가장 오랫동안 쥐고 있었기에 이들은 시대착오적이고 어리석다는 오명을 뒤집어쓴 셈이다.


열악한 상황에서 상황이 더 악화되지 않기 위해서 버티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수고가 필요하다. 사회 자체가 거대한 비탈길이 되어 내리막으로 치닫는 와중에 가장 아래에서 그 선이 더 후퇴하지 않도록 버티고 선 사람들의 어깨 위에는 어떤 하중들이 실려있었던 걸까. 어느 한 정치인의 은퇴 소식을 들으며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혁신, 그러니까 진보.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간다는 것은 평탄한 바닥에서 시작해도 어렵다. 작은 일이라도 해본 사람들은 공감하겠지만 정말 작은 개선 하나 이루기 위해서는 전 조직의 일원들을 움직여야 한다. 게다가 조직이 속한 판이 기울기 시작하면 단지 더 이상 망가지지 않기 위해 버티는 것만으로도 총력이 필요하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논리를 요구하는 시장을 이길 수 있는 회사는 많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은 기업이 아니라 정당이다. 정치란 시장의 뒤틀림을 수정할 수 있어야 하는 존재고.


20여 년의 긴 시간 동안 그들이 그 자리를 유지해 왔기에 막을 수 있었던 퇴보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시장이 돌아보지 않는 곳들은 정말 빠른 속도로 황폐화되기 시작했다. 공공의 공간이 사라지고, 돌봄의 영역이 좁아들고, 모든 권리에 가격 태그가 붙기 시작하면서 소비자가 아닌 거의 모든 시민 주체는 무시당하고 묵살되고 있다. 오직 소비자만이 필요한 관심을 받을 수 있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자본이 관심 없는 영역에 속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완벽히 지워지는 세상 속에서 시대착오적이라고 조롱당하는 가치들을 움켜쥐고 버티던 그 사람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본다.


능력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무엇을 위한 능력인 것인가. 혐오의 언어로 지지자를 결집하고 그것으로 세를 만드는 것이 능력이라면, 그것도 실력의 일부로 인정해야 한다면 오늘날 우리가 정치에 무엇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일까.


퇴보를 막기 위해 버티는 시간들이 카운트되지 않는다면, 혐오의 언어를 배격하고 쉬운 방식을 경계해 온 그 고뇌의 과정들이 중요하지 않다면 우리에게 정치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과정의 윤리라는 것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우리는 점 점 더 중요한 것들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치의 본질에 대해서. 본분에 대해서.


그러니 나는 계속해서 다시 묻고 있다.


무엇을 위한 능력인가.


작가의 이전글 우정의 이름으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