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임이라는 제3의 언어.
제목과 함께 올라간 사진을 보면 대체 이게 무슨 그림인가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내 동생이 보고는 '고대 정령 소환진이냐'라고 했던, 저것보다 더 복잡한 사진을 올리고 싶었지만 사진 크기 때문에 잘 안 보여서 관뒀다. 그러나 아쉬운 마음에 원래 올리려던 사진을 첨부하겠다. 그리는데 엄청 고생하기도 했으니까. 고대 정령 소환진!
판타지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이 괴상한 '소환진'이 무엇인지부터 말하자면, 저것은 '모티프(Motif)'라고 부르는 일종의 움직임 기록법이다. 우리의 움직임을 악보처럼 기록한 것으로, 각 기호들이 저마다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심벌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알파벳 C 위에 막대기가 붙어있는 기호는 머리를 뜻한다. 그리고 까만 점 두 개가 붙어있는 네모 안에 든 머리 기호는 눈(eye)이다. 라바노테이션(Labanotation)이라고 하는 무보(무용 악보)에서 파생된 기록법인데, 라바노테이션은 시시콜콜 하나하나 세세하게 기록한다면(보면 기염을 토하리라 자신한다. 바로 위의 사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집요함의 끝을 보여주는 복잡함을 자랑한다!) 모티프는 이와 다르게 움직임의 하이라이트 내지는 엑기스만 기록하는 방식으로, 움직이는 사람(mover), 즉 '관찰 대상'의 두드러지는 특징과 패턴을 기록하기 위한 보다 실용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것이 사랑하는 나의 '제3 외국어'이다.
움직임 분석이라는 장르 안에 생각보다 많은 분야가 존재한다. 흔히들 알고 있는 프로파일링, 행동 심리학이 전부가 아니다. Kestenburg Movement Profile(KMP), Action Profile, Signature Analysis 등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은, 잘 알려지지 않은 분야가 상당수 있다. 그중 내가 다루는 움직임 분석 도구는 '동작 관찰 분석(우리나라에서 사용되는 정식 명칭)'으로, '라반 움직임 분석'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영어로는 Laban Movement Analysis, 통칭 LMA이다(편의를 위해 향후 LMA라고 부르겠다). 그리고 약간의 KMP 지식을 갖고 있고(LMA와 꽤나 관련이 있어서 분석가 과정 중반에 이에 대해 배운다), 마지막으로 요즘 한창 공부 중인 마이크로 익스프레션(Micro Expression), 즉 미세 표정 분석이다. 마이크로 익스프레션 같은 경우에는 훈련 과정을 하나하나 이수해가고 있는 중이다.
LMA에 대해서는 추후에 따로 다룰 예정이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움직임의 의미를 파악하고 인식하기 위해 고안된 분석 프레임워크'로, 움직임의 특징, 패턴과 변화를 식별할 수 있는 포괄적인 어휘를 제공한다. LMA를 도구로 사용하는 분석가를 Certified Movement Analyst(CMA)라고 부른다. 굳이 해석하자면 '공인 움직임 분석가'인데 우리나라 정식 명칭은 '동작 관찰 분석가'로, 이 역시 '라반 움직임 분석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CMA 양성 기관은 뉴욕 브루클린 소재의 Laban/Bartenieff Institute of Movement Studies, 통칭 LIMS이다. CMA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전 세계에서 이 학교 하나뿐인데, 내가 '평생 해외 땅 한번 밟아본 적 없는 희한한 영어 선생' 딱지를 떼게 된 곳이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쓸데없는 뉴요커 자부심도 덤으로 얻었다.
마이크로 익스프레션(Micro Expression)은 인간의 미세한 표정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분야이다. 쉽게 말해 순간적으로 스치는 표정을 잡아내고 그 감정의 정체를 파악하는 분야이다. 이 '스치듯 안녕'하는 표정은 짧게는 0.2초 만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이 역시 추후에 따로 다룰 예정이다. 마이크로 익스프레션에 대해 궁금한 사람들은 미국 드라마 '라이 투 미(Lie To Me)'를 보면 잘 알게 될 것이다. 그냥 드라마로서도 상당히 재미있으니 한 번 보시길 권한다.
나를 소개할 때 CMA라고 하지 않고 움직임 분석가라고 하는 이유는 생각보다 별것 없다. 우선 본고장인 미국에서 조차도 '나는 CMA야'라고 말하면 '그게 뭐냐'는 질문이 돌아온다. 그래서 Certified Movement Analyst라고 풀어 말하면 역시 '그게 무어냐'는 질문으로 받아친다. 이건 뭐 쇠귀에 경 읽기도 아니고 질문의 무저갱도 아니고 이거야 원. 결국 했던 말 하고 또 하기 싫어서 움직임 분석가(Movement Analyst)라고 나를 소개하기 시작했는데, 그제야 '그게 정확히 뭘 하는 건데?', '어떤 움직임을 분석하는데?', '행동 분석 같은 거야?' 등의 질문이 나오기 시작했다(참고로 행동 분석과 다르다). 한국에 들어와서도 계속 움직임 분석가라고 얘기하는데 그냥 단순히 '동작 관찰 분석가'라고 하기 귀찮아서다. 입에 잘 붙지도 않고 귀에 쏙 들어오지 않아서기도 하다. 또 한편으로는 LMA도 마이크로 익스프레션도 하나의 큰 그림으로 보면 결국 움직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움직임을 다루는 분야를 공부할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양한 분석 도구를 사용하는 움직임 분석가가 목표인 셈이다.
내가 움직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금은 극복해 낸 제법 아픈 과거가 있어서다. 이 시리즈에서 언젠가 다룰 예정이다. 마음의 준비 같은 건 이제 필요 없을 정도로 말하는 데에 거리낌은 없지만, 뭐 일종의 드라마틱한 효과를 위해서랄까, 그런 것도 있고 무엇보다 맥락과 흐름에 있어서 아직은 언급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해서다. 어쨌든 그 시기에 나를 대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다. 그러다 보니 살아남기 위해서 감각이 발달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은 우리의 입은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몸은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이크로 익스프레션에서 '내추럴'이라고 부르는 유형의 사람들이 있는데, 번갯불에 콩 볶듯이 나타났다가 게 눈 감추듯 사라지는 미세 표정을 훈련 없이도 잘 보는 사람들을 말한다. 나 같은 경우는 원체 예민한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생존 본능이 만들어낸 내추럴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상처가 결국 훈장이 된 셈이다. 여하튼 내가 보는 몸의 신호들을 보다 정확히 파악하고 싶었고, 내가 보는 것들의 신뢰성과 타당성을 위해 학문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움직임을 공부하게 된 점도 있다. 이왕 보이기 시작한 김에 개발하고 싶기도 했다.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맥락을 보고 상황을 판단하라.
움직임에 대해 공부하면서 생긴 깨달음이자 좌우명이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라'는 말이 떠오르게 만든다. 상처 투성이었던 시절의 나는 사람을 싫어했다. 그 세 치 혀가 그들의 몸과는 다른 말을 하는 게 너무나도 싫었다. 그들 앞에서 '너 사실은 이렇잖아!'라고 말할 깡은 없었지만 속으로 비웃기도 하고 경멸과 조소를 날렸으니 나도 꽤나 못됐다. 그렇다고 은둔형 외톨이를 자처한 적은 없다. 잘 지내는 친구들도 있었고 제법 사교성도 좋은 편이었으니 나도 참 아이러니한 인간이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결국 나는 사람을 싫어했지만 꽤 좋아하기도 했다. 사람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들 속에서 살아남아 스며들고 싶었달까. 그들과 친해지면서 함께하고 싶었달까. 그래서 항상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사람들의 움직임을 관찰했던 것 같다. 특히 얼굴, 제스처와 걸음걸이를. 잠깐 딴소리를 하자면 그 덕에 안 보는 척하면서 보는 기술이 늘었고 좁지만 알짜배기인 인간관계를 자랑한다.
나는 움직임을 통해 사람과 세상을 이해하게 되었다. 내 인생이 '움직임은 언어'라는 것의 방증이 된다.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이니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이니 하는 멋진 말을 굳이 할 필요는 없다. 앞서서 사람이 싫네 좋네 했지만 결국 나도 사람이고 그들과 다를 바 없다. 어쩌면 '나는 그들과 다르다'는 허세를 부렸던 걸지도 모르겠다. 하등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만용일지도.
이 시리즈는 움직임 분석가 JC의 눈으로 바라보는 삶의 한 조각이며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맥락을 보고 상황을 판단하라'는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과 그 이후에도 계속되는 여정에 대한 기록이다. 스쳐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 하는 나지막한 탄성 한 번만이라도 자아낼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