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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세상에 결혼이 없다면

비혼주의자 못된 아들

by 캉생각

어렸을 때, 나는 결혼을 '어른이 되면 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마치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중학교에 가듯,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을 하듯, 어른이 되면 당연히 결혼을 하는 줄 알았다. 주변의 모든 어른이 그랬고, TV 드라마도 그랬고, 심지어 동화책도 그랬다. "그들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문장으로 모든 이야기가 끝났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결혼을 '자연스러움'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밥을 먹고 숨을 쉬는 것처럼, 인간은 원래 그렇게 사는 줄 안다. 사춘기가 지나면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람과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 이것이 인간 삶의 정상적인 궤도라고 믿는다.


하지만 조금만 멈춰서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결혼은 정말 본능일까?

호랑이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아도 짝짓기를 한다. 새들은 법원에 가지 않아도 둥지를 함께 튼다. 그런데 왜 인간만 사랑을 하는 데 서류가 필요할까? 왜 관계를 시작하는 데 증인이 필요하고, 끝내는 데 재판이 필요할까?

답은 명확하다. 결혼은 본능이 아니다. 자연도 아니다. 그것은 인류가 고안해 낸 발명품이자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시스템을 발명했을까?

나는 이것이 사랑이 넘쳐서가 아니라, 불안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내 것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 내 자식임을 증명받고 싶은 불안. 늙고 병들었을 때 버려질지 모른다는 공포. 혹은 재산과 가문을 이어가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 이렇듯 결혼은 애초에 사랑의 서약이 아니라, 그 모든 불안에 대한 사회적 담보 계약이었다. 혼인신고서를 보면 상속권, 부양의무, 재산분할등 이 모든 것은 감정이 아니라 법률의 언어로 쓰여 있다.


흥미로운 건, 결혼의 형태가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는 것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결혼이 재산 계약에 가까웠다. 아내는 남편의 소유물이었고, 이혼은 남편의 일방적 선언만으로 가능했다. 중세 유럽에서는 교회가 결혼을 성사로 격상시키며 신 앞에서의 서약이라는 종교적 의미를 부여했다. 이때부터 이혼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조선시대의 결혼은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었다. 배우자는 선택이 아니라 배정이었다. 호주제 아래에서 아내는 남편의 가족에 편입되는 존재였다. 그때는 여성이 경제활동을 할 수 없었다. 혼자 살아갈 방법 자체가 없었다. 결혼은 여성에게 생존의 문제였고, 남성에게는 가사와 출산 노동력을 확보하는 문제였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연애결혼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그 시절의 한국에서는 중매결혼과 연애결혼이 공존했고, 점차 개인의 선택이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평생직장이 있던 시대였다. 한 회사에 입사하면 정년까지 다녔고, 한 번 결혼하면 죽을 때까지 함께였다. 이혼은 사회적 낙인이었고, 재혼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평생이라는 전제 위에 모든 시스템이 설계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여성도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다. 1인 가구 또한 이미 가장 보편적인 가구 형태 중 하나다. 평생직장은 사라졌고, 이직은 당연해졌다. 사람들은 더 이상 한 곳에 '평생'을 걸지 않는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사랑은 변한다. 사람은 변한다.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고, 10년 후의 나는 또 다를 것이다. 그러다 현대에 들어 결혼은 '사랑하는 두 사람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옷을 입었다. 하지만 옷만 바뀌었을 뿐, 시스템의 본질은 그대로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라는 중세의 서약을 강요받는다. 그 서약하나에 나의 재산권, 의료 결정권, 장례 참여권. 이 모든 것이 배우자라는 법적 지위에 묶여 있다. 20년을 함께 산 연인보다, 혼인신고 한 지 일주일 된 배우자가 더 많은 권리를 갖는다.

이게 21세기의 제도로 합리적인가?


그렇다면 결혼이라는 제도가 없다면 어떨까?

먼저, 관계가 더 정직해질 것이다.

"이혼하면 재산을 나눠야 해", "세상이 뭐라고 할까" 같은 외부의 압력 없이, 오직 '우리가 함께 있고 싶은가'만을 기준으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의무가 아니라 선택으로. 계약이 아니라 의지로.

사랑이 식었을 때, 법적 절차와 재산분쟁 때문이 아니라 순수하게 이별의 슬픔만을 감당하면 된다. 역설적이게도, 떠나는 게 자유로울 때 머무는 것도 진심이 된다.


둘째, 다양한 관계 형태가 존중받을 것이다.

지금은 결혼한 부부와 자녀만이 정상 가족으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결혼이 필수가 아니라면?

오랜 친구들과 함께 사는 삶, 연인과 따로 살면서도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삶, 혹은 누구와도 결속하지 않고 혼자 온전히 존재하는 삶. 이 모든 선택이 실패가 아니라 다양성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나에 대한 의료 결정권이나 세금 혜택이 '배우자'라는 법적 지위가 아니라 당시 내게 가까운 사람에게 주어진다면?


셋째, 삶이 더 온전해질 것이다.

지금의 결혼 제도는 두 사람을 하나의 단위로 만든다. 부부는 함께 다니고, 함께 먹는 것을 넘어, 세금 신고도 함께 하고, 집도 공동명의로 산다.

하지만 아무리 사랑해도, 우리는 각각 독립된 존재다. 서로 다른 취향, 다른 속도, 다른 꿈을 가진 개인이다. 결혼이라는 울타리가 없다면, 우리는 서로를 '

나의 일부로 흡수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당신은 당신대로, 나는 나대로 살되, 우리는 함께 있기로 선택했다."

이게 더 성숙한 관계 아닐까.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나는 결혼 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의미 있는 선택일 수 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당연한 것', '자연스러운 것'으로 착각하는 순간,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강요가 된다.


지금 우리는 다시 한번 '결혼'이란 단어 앞에 섰다.

결혼이 정말 사랑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불안을 숨기기 위한 것이었을까.

스마트폰으로 전 세계와 연결되면서도, 관계만큼은 여전히 마차 시대에 만들어진 규칙을 따르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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