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주의자 못된 아들
최근 친한 친구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반사적으로 축하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그 축하가 진심이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분명 탄생은 축복이라고들 한다.
없던 것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무한의 가능성에 하나의 우주를 던지는 일.
그들에게 기쁨과 슬픔과 불안과 희망과 죽음을 선사하는 일.
그런데 이것은 누구에게 축복일까?
그건 철저히 탄생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태어나는 존재에게 "너 태어나고 싶니?" 묻지도 않고 일을 벌린다.
요즘은 반려동물 하나를 들일 때도 여건과 환경을 따지고 고민한다.
그리고 그 작은 생명조차 감당하지 못해 파양하는 일들을 본다.
강아지마저 신중하게 고민하면서, 아이는 "결혼했으니까" 낳는다. "때가 됐으니까" 낳는다.
그런데 감히 인간을? 지난 시대는 모두를, 가장 무거운 것에 가장 무감각하게 만들어 버렸다.
나는 사람이 사람을 길러야 하는 이 '당연함'이 못마땅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 작은 스트레스에도 몸이 아프고, 돈 걱정에 밤잠을 설치며, 관계에서 상처받는다. 누군가는 평생 감당 못 할 슬픔을 짊어진 채 살아간다. 그것은 자신의 죄가 아니었는데도 고통받아왔다. 그런데도 아무 일 없다는 듯, 불완전이 불완전을 복제하는 세상을 원래 그런 것으로 계승하는게 나는 두렵다.
물론 완벽한 준비도, 완벽한 세상도 없다.
맞다. 하지만 그 불완전함을 아는 호모 사피엔스라면, 그래서 더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인류가 번식의 본능으로 자신을 유지해 온 건 안다. 하지만 그 본능을 의식하는 순간부터는, 더 이상 본능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가 된다. 지금은 그 자각의 시대다. 그 선택에는 아주 치열한 윤리가 필요하다.
진정 이 세상은 살 만한 곳인가?
우리는 반드시 계속 살아가야 하는가?
정작 우리 자신도 다시 태어나고 싶냐는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하면서.
많은 부부들은 행복을 위해 아이를 낳는다. 오래된 습관처럼, 때로는 삶의 '당연한 다음 단계'처럼. 하지만 그 목적이 식어가는 사랑을 증명하거나 관계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면? 그게 정말 아이를 위한 일일까. 아니면 어른들의 결핍을 메우기 위해 고른 도구일까.
아이를 낳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한 번 결심했다면 자식의 행복이 부모의 행복보다, 거의 무한대에 가깝게 앞서야 한다고 믿는다. 그저 '우리의 일부'로 곁에 두는 삶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가 가진 한 생을 통째로 떠맡는 일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너무 큰 부담을 주는 것 아니냐고?
하지만 자식은 '태어남'을 당한다. 우리는 그 행위자다. 그러므로 부모가 된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서약이 되어야 한다. 고작 나이가 됐다고, 결혼했다고, 주변이 다 낳는다고, 외로워서 아이를 쉽게 낳지 않기를 바란다.
이런 고민에 닿아, 나는 부모가 될 자신이 없다.
그 무게를 감당할 자신도, 그 책임을 끝까지 다할 확신도 없다.
나는 오늘도 묻게 된다.
이것이 비겁함일까? 아니면 정직함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