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Zoe 쏘에 Dec 20. 2020

자신의 작품을 내보이기가 꺼려지는 예술인에게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 (존 말루프 감독, 2015)


그녀가 찍은 사진이 너무 좋다는 건, 그 사진을 보는 사람은 누구라도 인정할 것이다. 그녀가 사각 프레임 안에 담은 세상 이야기가 참 재미나고도 쉽게 읽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사람들의 살아있는 표정만 봐도, 그녀가 왜 그 순간 그 사진을 찍었는지 이해가 간다. 


그런데 과연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그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까. 그녀도 여러 예술가들처럼 한 명의 천재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건, 특별할 것 없는 것을 특별하게 만들어버리는 재주가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보는 시선이 따뜻하고 관찰력이 남다르며, 찰나의 순간을 기막히게 잘 포착한다. 순발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과감함도 겸비했다.


그 좋은 사진들을. 그녀는 살아생전에 세상에 내놓지 않았다. 그녀가 그 사진들에 자신이 없고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사진이 좋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살면서 어마어마한 양의 사진을 찍었을 게다. 아마도 그녀는 입주 유모라는 하층민으로 살면서 예술가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을 리 만무하고, 사진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거다. 그냥 사진 찍는 것을 낙으로 삼고 그것만으로 만족하며 살았을 뿐.


하지만 그것도 내 생각일 뿐이다. 

이 다큐멘터리가 너무나 안타까운 것은. 그녀가 죽은 후, 그녀를 알던 몇 안 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그 삶을 추론하는 것이라서, 그녀 본인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어서, 남들의 그녀에 대한 얘기가 왜곡된 기억인지 아닌지 진위를 가릴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그녀를 잘 알고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이 아니다. 대부분이 유모로서 일할 때의 가족인데, 그들은 그녀의 가족도 친구도 아니다. 그런 이들에게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끌어 내 뭐하며, 그녀를 사랑하는 이 하나 없는 이 세상에 그녀에 대한 추측성 이야기들을 풀어내서 뭐하나. 한 친구(그나마 그녀를 사랑했다고 생각되는)도 인터뷰에서 말했지만, 정말 그녀는 자신의 삶이 이런 식으로 밝혀지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늘에서 가슴을 치고 있을지 모른다.


물론 그녀의 사진을 우연히 손에 넣고, 그 훌륭함을 알아보고 빛을 보게 한 존 말루프가 대단한 것은 인정한다. 이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데 보인 집요함과 열정도 인정한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에는 그녀가 어두운 사건의 기사를 찾아다녔고 남자들을 혐오했다는 것으로 그녀가 어릴 적 남자에게 학대를 당했던 경험이 있을 거라는 추측, 유모로써 하지 말아야 하는 아동 학대를 했다는 인터뷰 등 굳이 세상에 알리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들이 속속 등장한다. 이런 부분이 그녀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만들어 예술의 가치를 더 높이고 싶은 의도는 아닌지 의심이 되고 불편했다. 그녀를 변호하고 보호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큐 발표 이후, 한 번도 그녀와 만나본 적도 없는 먼먼 친척이 그녀 사진에 대한 저작권 소유를 주장하기까지 한다. 도대체 무슨 권리로!   


그녀는 외롭게 살았다. 아무도 그녀가 사진을 찍는 것에 관심이 없었고 도와주는 이도 없었다. 고흐만해도 동생 테오가 있어서 아무리 가난했어도 예술가로서 살도록 도움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녀가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루트만 알았다면 혹은 도와주는 이가 있었다면 어쩌면, 살아있을 때 작품을 발표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다큐를 보면서, 그녀의 이야기가 흥미롭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개인사가 세상에 알려지는 게 달갑지 않았다.

그녀는 진정 작품 활동을 즐겼다. 무슨 사정으로 죽을 때까지 혼자 외롭게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사진을 찍으면서 스스로를 위로했고 삶을 즐겼다. 가난했지만 돈을 모아 사진을 찍으러 몇 개월 동안 미지의 나라로 여행하기도 했고. 그것만 보아도 사진이 그녀를 살게 하는 원동력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녀는, 살아있을 때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더라도, 대중이 혹은 평론가가 자신의 작품을 좋아하는지 좋아하지 않는 지로 휘둘리지 않았을 것이다. 


비비안 마이어가 사진을 찍었던 활동들과 그녀의 작품을 보면서 난 참 뜨끔했다. 난 내 작품에 자신이 없고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면 더 자신이 없다. 그로 인해 스트레스도 받고.


그녀는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사랑받기 위한 작품 활동이 아니라 자신에게 기쁨이 되기에 치유되고 위로되는 행동을 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렇게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던 것.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참 좋겠네. 그녀처럼.

작가의 이전글 가족의 골칫덩이라 느끼는 이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