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일 이야기 1
졸업을 앞둔 대학교 4학년 2학기에는 대부분 취업을 위한 험한 길에 오른다. 매일 채용 공고를 찾아보고, 수십 개의 지원서를 제출한다. 회사마다 다른 요건을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 시험을 치르고, 자격증을 준비하고, 포트폴리오를 만든다. 서류에 합격하면 회사별 필기시험도 준비해야 하고 그다음에는 면접 준비까지 해야 한다. 이 길에서 가장 힘든 점은, 이렇게 철두철미한 준비를 해도 취업을 확신할 수는 없다는 불확실성이다.
이렇게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치는 4학년 2학기, 형일은 이미 취업에 성공해 회사에 다녔다. 4학년 1학기를 마친 뒤 방학 기간에 열린 취업 박람회에서 작지만 건실한 한 회사의 채용 설명 부스가 형일의 눈에 띄었다. 중소기업이지만 국내 1위 엔지니어링 기업이라는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부스에서 상담해 본 결과 채용 상담원이 아주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다음날 바로 지원서를 낸 형일은 1개월도 되지 않아 최종 합격했다. 그래서 4학년 2학기는 학교에 취업계를 냈고, 조금 이른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2년이 조금 안 되게 지났을 8월의 무더운 여름, 수요일 오전 11시라는 조금은 뜬금없는 시간에 준호는 형일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아~. 부산 사나이, 오랜만이야.”
“사나이는 빼주라…. 부산의 국밥 쟁이 정도로 하자.”
“아 하남자가 된 거야? 그래, 무슨 일이야 부산 하남자.”
“나 주말에 수원 갈 건데, 가면 한잔하냐?”
“오랜만에 올라오네. 내가 간다고 할 땐 바쁜 척 엄청나게 하더니.”
“바빴다고 진짜….”
형일이 취업한 회사는 부산에 있었다. 그래서 취업 직후 부산에서 자취 생활을 시작한 형일은 집들이 차원에서 친구들을 한번 부른 뒤로는 2년이 다 되도록 부산에서 회사 일에 빠져 지냈다. 간혹 태영이나 준호가 연락하면, 바쁘다 힘들다 하고는 이야기가 짧게 끝나기 일쑤였다. 그마저도 최근 반년가량은 연락 한번 없이 지나갔다. 그랬던 형일에게 갑자기 만나자는 연락이 오자, 그것도 형일답지 않은 기운 빠진 목소리로 오자 들어줘야 할 이야기가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약속한 주말, 준호는 태영과 함께 수원의 한 고깃집으로 형일을 보러 나갔다. 세 사람이 자주 모이던 곳이었다. 형일은 미리 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고, 준호와 태영이 중간에서 만나 함께 들어갔다.
“아, 오랜만이네. 형일.”
“야 진짜 오래간만이다. 부산에서 보고 처음 보는 거 아니야?”
“부산 사나이가 바쁘신데 어떻게 자주 보겠어.”
“너네는 뭐 한가하고 판판했냐. 그럼 좀 부럽긴 하다.”
1년 만에 만난 형일과 다른 두 사람은, 맛있게 익어가는 고기와, 오늘따라 달달한 소주에 각자의 근황 이야기를 곁들였다. 형일이 부산에서 일을 하는 사이, 준호는 프리랜서 개발자로 일을 시작했다. 1년 반 동안 4건의 프로젝트를 계약한 준호는 본격적으로 SI 업체 설립을 계획 중이었다. 하지만 맡은 프로젝트가 워낙 많다 보니 진전은 없는 듯했다. 태영은 수학과를 졸업하고 수학 강사로 알바를 하고 있었다. 제법 큰 규모의 학원에 들어간 태영은 벌이에는 만족했지만, 적성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준호에게 도움을 받아 가며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공부 중이라고 한다.
친구들의 근황 이야기가 끝나자, 이제 형일의 차례가 되었다. 몇 점 남지 않은 고기와 반쯤 남은 찌개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안주로 먹기 딱 충분할 만큼 남아있었다.
“그래서 너는, 부산은 행복해?”
태영이 물었다. 형일은 잠시 태영을 빤히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고 나서 말을 이었다.
“에휴. 나 부산 사람 그만할까 봐.”
“왜 뭐, 퇴사 각이야?”
“어, 이제 진짜 못 다니겠어.”
“왜 왜, 뭔데.”
“일단 한잔하자.”
“오케이. 이거 마시면 알려주는 거다.”
얼큰하게 취한 형일이 짧지만 흥미로운, 그렇지만 자신에게는 아주 심각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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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사원이 처음 출근한 날의 인상은, 편견이라고 해도 될 만큼 회사 사람들에게 오래 남는다. 아무리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어도 첫인상에 뺀질거리는 인상이 남으면 그 인상을 고치기 위해서는 제법 긴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첫날에는 무조건 빳빳한 정장을 입고, 긴장한 티가 나도 상관없으니 그저 빠릿빠릿함을 손끝 발끝까지 탑재하고 가라고 흔히들 말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점은, 회사의 인상도 신입사원에게 오래 남는다는 것이다. 보통은 회사에서 이 점을 간과해 신입사원을 놓치곤 하지만, 형일의 경우에는 그 영향이 정반대로 나타났다.
형일이 출근한 회사의 첫인상은, 형일이 기대했던 그 이상이었다. 처음 출근한 자신을 반겨주었던 팀장은 사람 좋은 40대의 표본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팀장이 안내해 준 형일의 책상에는 박스도 뜯지 않은 새 컴퓨터와 모니터가 있었고, 자리는 모니터 2대를 올려두어도 충분할 정도로 넓었다. 회사 사람들도 인사하러 온 형일을 진심이 가득한 웃음으로 반겨주었으며, 다른 팀의 팀장이나 높은 직급의 사람들도 권위적이거나 무거운 인상을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회사의 대표님도 잘생긴 신입이 들어와서 기분이 좋다며 악수했다. 형일의 첫 회사 생활이 아주 훌륭하고 순조롭게 시작됐다.
수습 기간동안 형일은 같은 팀의 대리와 함께 간단한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했다. 큰 프로젝트는 아니었지만, 학교에서 공부하던 것을 실제로 현실에서 사용한다고 생각하니 걱정과 함께 설레는 마음이 크게 자리했다. 중요한 의사결정은 함께 진행한 대리가 맡아 팀장, 수요기관과 의논하며 진행했고 형일은 진행 방향이 정해지면 실무를 맡아 진행하는 식이었다. 3개월 동안 진행한 작은 프로젝트는 별문제 없이 잘 진행되었고, 그렇게 무난하게 수습 기간을 지나 정식 직원이 되었다.
이후에도 형일의 업무는 수습 기간에 한 일들과 비슷했다. 작은 프로젝트는 대리와, 조금 규모가 있는 프로젝트는 팀장까지 함께 진행했으며 형일은 항상 실무를 맡아 진행했다. 정규직 전환 후 6개월이 지났을 즈음엔 이런 반복되는 업무에 익숙해졌고, 그렇게 1년이 지나서야 의아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형일이 맡은 프로젝트의 개수는 점차 늘어만 갔다. 2~3개의 프로젝트를 맡으며 시작한 업무가 1년 새 점차 늘어 이제는 6개씩 맡고 있었다. 그렇게 해야 할 일이 계속 늘어가는 형일은 야근이 없으면 주어진 업무를 절대 끝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반적인 퇴근 시간은 9시였고, 그도 모자라 새벽까지 근무해도 마무리하지 못하는 일이 생겨났다.
그에 반해 팀장은 출장으로 자리를 비우기 일쑤였다. 어디서 자꾸 생기는지 알 수 없는 연차와 사내 회의까지 합치면 자리에 있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확실한 건, 야근을 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였다. 대리는 형일이 입사한 초반에는 아주 바쁜 사람이었다. 그래서 형일이 조금씩 바빠지며 함께 야근하는 일이 잦아졌다. 하지만 형일이 바빠지면 바빠질수록 대리가 야근하는 날은 줄어들었다. 그렇게 1년 동안 서서히, 형일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금씩 팀의 업무가 대부분 형일에게 집중되었다. 형일이 말했던 싸한 느낌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