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일 이야기 2
형일이 무엇인가 부조리함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다른 팀 사원과 친해진 이후였다. 대리는 언제부터인가 퇴근 시간이 되면 곧장 퇴근했고, 팀장은 여전히 자리에서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팀에서는 혼자 남아 일을 해도 다른 팀에서 늘 야근하는 사람이 있었다. 형일보다 6개월 먼저 들어온 바로 옆 팀의 막내 사원인데, 친분은 없었지만, 그 사람도 늘 늦게까지 일한다는 것은 형일도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성호가 메신저를 통해 형일에게 저녁 식사를 제안했다. 메뉴는 언제나 든든한 부대찌개였다.
“형일 씨도 요새 바쁘시죠? 맨날 야근하시던데 거의.”
“네 거의 맨날 야근해요. 성호 씨도 그렇지 않아요? 저희 거의 야근 메이트잖아요.”
자리에 앉자마자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형일은 타지에 홀로 있었기 때문에 회사 이야기를 할 사람이 없었는데, 성호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형일 씨 팀도 업무 다 몰아줘요? 하긴 그러니까 맨날 혼자 야근하겠죠.”
“실무를 제가 다 맡아서요. 할 일이 많긴 해요.”
“그러니까, 그거 좀 너무하지 않아요? 팀장님은 그냥 출장 가서 회의하다 퇴근하는데 저는 보고서에 설계하고 테스트하고 다 하거든요. 다 해서 보고하면 이거 고쳐라 저건 다시 해라 시키기만 하고, 그리고 나 빼고 다 퇴근하고. 말하다 보니까 화나네. 저희 맥주 한잔할래요?”
신랄한 신세 한탄이었다. 하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형일의 상황과 완전히 똑같았다. 식사 후에 회사로 돌아가서 할 일이 있었지만, 성호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맥주를 주문했다. 술이 한잔 들어가니 말이 점점 잘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제가 팀장님한테 업무가 너무 많아서 힘들다고 하니까, 원래 그런 거래요. 그렇게 배워야 뭐 나중에 진급해서 편한 거고 관리 업무도 제대로 할 수 있는 거래. 그 주에 제가 3일 동안 집에 못 가고 회사에서 자고 그랬거든요? 그런데도 그럴 수 있다, 다 그렇게 배우는 거다, 자기도 그랬다 어쩌고저쩌고. 힘들면 말하라 해놓고 말하니까 자기 얘기만 실컷 하더니 결론은 그냥 열심히 하래요. 신입일 때만 할 수 있는 특권이래 이게. 형일 씨는 그런 얘기 한 적 있어요?”
“아뇨 저 아직…. 성호 씨한테 듣고 보니까 저도 말해볼까 봐요. 와 듣고 보니까 화나네. 저랑 진짜 똑같네요. 상황이?”
“그러니까요. 회사 방침인가 이렇게까지 똑같지, 어떻게?”
“저 진짜 회사 처음 와서, 이 회사 오길 잘했다 싶었거든요. 회사 분위기도 좋고, 윗분들 성격이 진짜 좋아 보이잖아요.”
“그게, 그 사람들이 일을 안 하니까 그렇죠. 윗분들이 아니라 대리나 과장님들을 봐야 했어. 첫날 인사도 팀장님들한테만 했죠? 그거 다 전략이라니까.”
짧은 식사 자리 후에 형일은 다시 회사로 가 할 일이 많았지만, 도저히 업무를 할 기분이 들지 않아 집으로 향했다. 은연중에 느끼던 것들이 수면 위로 모두 떠오른 느낌이었다. 알고 있었지만 외면하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정말 속고 있었는지 몰라도 배신감, 허탈함, 막막함 등 부정적인 감정이 몰려왔다. 연이은 야근에 몸은 피곤했지만 잠은 오지 않는 날이었다.
다음날, 형일은 성호와 얘기한 대로 팀장에게 고민이 있다며 면담을 요청했다. 형일의 이야기를 들은 팀장은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입을 뗐다.
“형일씨, 고생하는 건 알고 있어요. 업무량이 어떻게 되는지도 알고. 나도 처음 입사했을 때 그렇게 했거든. 그땐 밤새워서 보고서 쓰고 팀장님한테 보내잖아? 그럼, 바로 욕부터 날아온다? 이 새끼 저 새끼 이걸 보고서라고 썼냐, 뭐냐. 회사 사람들 다 있는 데서 소리를 소리를 지르더라고. 그런데 그렇게 버티니까 결국 진급도 하고 그렇게 되더라고요. 나중에 팀장 달고도 보고서 쓰고 그 캐드 만지고 있을 거야? 아니잖아. 신입 때는 신입 때 배워야 할 게 있어요. 열심히 하는 만큼 배우는 거지, 안 그래요?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도 신입 때밖에 못하는 거라니까.”
형일을 잘 구슬리기 위한 팀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제 성호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성호가 이야기한 레퍼토리와 팀장이 하는 말이 정말 똑같았기 때문이다. 더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겠다고 판단한 형일은 우선 얌전히 면담을 마쳤다.
그래도 면담의 효과가 있었는지, 그 이후로 담당 프로젝트의 개수는 조금 줄어들었다. 하지만 약간의 변화는 다시 큰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대리가 퇴사를 한 것이다. 줄어든 형일의 업무는 대리에게 옮겨갔는데, 이에 불만을 가진 대리는 곧바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렇게 조금 줄었던 형일의 업무는 대리의 업무까지 더해져 두 배로 돌아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형일의 야근 메이트 성호까지 얼마 후 미안하다며 빨리 도망가라는 말을 남기며 퇴사했다. 두 사람 몫의 무게를 동료도 없이 버티고 버티던 형일은 2년 만에 친구들에게 앓는 소리를 하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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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끝낸 형일에게 태영이 당황과 걱정이 섞인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걸 지금 2년을 버티다가 얘기하는 거야? 너도 좀 대단하긴 하다. 아닌가 둔한 건가?"
“근데 그 정도면 퇴사가 되긴 해? 너 절대 안 놓아줄 것 같은데.”
“그러니까. 퇴사는 무슨 휴가도 못쓰게 하거든. 나 여기 3일 연차 쓰고 온 건데, 입사하고 처음 쓴 거다? 작년에 휴가 한 개도 못 썼는데, 이월도 안 되고 돈으로 주지도 않아. 그냥 없어졌어! 휴가가. 그래서 올해는 2월쯤에 휴가 쓰겠다고 했는데, 꼬치꼬치 엄청 캐물어 보더니 결국 반려시키더라.”
“이번에는 그러면 어떻게 말하고 왔어?”
“팀장이 뭐라고 하던 귀 닫고 무조건 쓰겠다고 했지. 그러니까 얼굴 벌게지더니 엄청 선심 쓴다는 듯이 다녀오래. 대신 뭐 3일 동안 일할 거 다 하고 가라고. 그래서 2주 동안 주말에도 출근했다.”
형일이 아직 분이 안 풀린 듯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퇴사하겠다는 거지 그래서? 아직도 고민 중인 거면 희대의 호구 같은 느낌인데.”
“하긴 할 건데, 그다음을 고민해 봐야지. 막상 퇴사하려니까 무작정 퇴사하는 건 좀 불안하더라고. 야 이직 준비는 어떻게 하는 거냐?”
“이직해 본 사람한테 물어보자. 회사원도 너 하나다 여기.”
“역시 도움이 안 되네. 아주 든든해.”
형일은 2년간 부모님께도 말하지 못하고 쌓아둔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다 하고 나니 속이 후련해졌다. 그렇게 술자리가 끝나고 형일은 입사 후 첫 휴가를 즐기다 부산으로 돌아갔다.
더위가 조금 가시고 9월이 시작될 무렵, 형일은 이번에도 아무런 예고 없이 단체 채팅방을 만들어 태영과 준호를 초대했다.
“야 우리 여행 가자. 이렇게 살 바에는 그만두고 여행이나 가고 싶어졌어.”
“그래그래, 진정하고 너의 계획을 더 말해보렴.”
뜬금없는 메시지에 태영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내년에 퇴사하기로 했어. 5월쯤 퇴사하고 돈 모은 거 써서 해외여행 갈 거야.”
“좋아, 설명이 조금 늘었어.”
“퇴사 하기로 했어? 회사랑 얘기된 거야? 보통 한 한 달 전에 말하지 않냐?”
“그러게, 무슨 퇴사를 1년 전에 말하냐.”
준호와 태영은 여행보다는 퇴사 여부를 궁금해했다.
“나랑 얘기가 됐어. 내가 하겠다 하면 하는 거지.”
메신저의 글자에서 느껴지는 당당함은 모든 일정이 결정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형일의 다짐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다짐에서 평소의 형일이 느껴졌기 때문에 준호와 태영은 적극적으로 형일이 말한 여행에 관해 관심을 가졌다.
“그래 퇴사는 회사랑 이야기하고, 여행은 어디 가게? 언제?”
“퇴사하자마자 바로 내년 5월에 가는 거야. 어때? 성수기는 아니니까 사람 좀 적고 날씨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맞지.”
“일단 어디 가려고? 가고 싶은 데는 있어?’
여행 시기에 이어 가장 중요한 질문이 태영에게서 나왔다. 준호는 물어야 하나씩 정보가 나오는 것이 답답해 우선 단체 채팅방을 닫았다.
“캐나다랑 미국!”
“와, 스케일이 좀 있네. 미국은 그렇다 치고 캐나다는 뭐가 있는데?”
“내가 또 기가 막힌 데로 찾아봤지. 일단 곧 추석이니까, 연휴에 만나서 일정 한번 싹 짜보는 거야 어때? 시간 돼?”
“어, 난 연휴 때 쉬니까. 첫날 만날까?”
“너무 좋아. 준호는 되겠지? 자유로운 준호씨.”
“안되면 말하겠지. 그럼, 그날 낮에 그 카페에서 보자. 우리 맨날 가던데.”
“오케이. 아 이런 호쾌한 수락 너무 좋아. 역시 너희한테 말하기를 잘했다.”
“우리 말고 친구 없어서 그런 거 아니야?”
“알면 조용히 해.”
그렇게 추석 연휴 첫날, 어느 한 카페에서 세 사람의 캐나다와 미국 여행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