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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를 Feb 08. 2021

심벌즈 연주자는 한 순간을 위해 서 있는다

넷플릭스 <블링블링 엠파이어>의 어떤 순간을 보고

넷플릭스 시리즈 <블링블링 엠파이어>는 범작이다. 베벌리힐즈에 사는 어마어마한 아시안, 주로 중국계 부자들의 삶을 다룬 이 쇼는 화려하고 볼거리 넘치는 전형적인 여느 미국 리얼리티쇼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다른 컨텐츠들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도 좋은 점이 있는데 그것은 이 쇼의 내레이터이자 메인 캐릭터 중 하나인 케빈과 그의 양모 서사다. 사실 서사라기에는 다소 거창한데, 이 두 캐릭터가 만들어낸 굉장히 인상적인 씬 하나가 있다. 


케빈은 캘리포니아로 이사온 뒤 우연히 부자인 중국인 친구들을 사귀게 된 한국계 미국인이다. 모델 일을 하고 있는 그는 어릴 때 백인 부모에게 입양되어 길러졌고 그의 친구들과는 달리 필라델피아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인물이다. 그리고 이 쇼는 유전자 검사를 받는 등 자신의 생부모를 찾기 위한 노력에 나서는 케빈의 현재를 보여준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을 길러준 백인 엄마를 캘리포니아로 초대해, 생부모를 찾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전하기로 마음 먹는다.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부터 이 모자 관계가 유독 돈독하고 친구처럼 편안한 사이라는 사실은 이내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키워준 엄마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긴장하며 어렵게 말을 꺼낸 그의 앞에, 엄마는 표정이 굳고 이내 입을 연다. “나도 널 낳으신 분들을 늘 찾고 싶었다.” “그래요?” 의외의 반응에 놀란 케빈 앞에 엄마가 말을 이어간다. “그런데 너무 이기적인 이유라 그 동안 참은 것뿐이야. 네가 얼마나 멋진 사람이 됐는지 그 분들에게 보여드리고 싶었기 때문이지. 그 분들은 엄청난 기회를 놓치셨잖니. 훌륭한 아이를 키울 수 있는 기회 말야.”


입양한 아이를 최선을 다해 키워낸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과 동시에 아들에 대한 사랑이 드러나는 말이다. 그 동안 케빈에게 좋은 엄마였음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 자체로 일견 훌륭한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인물의 인품보다 배움을 남기는 것은 바로 화법이다. 당연히 좋은 말이란 좋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기 마련이지만 말의 기술도 중요하다. 내 앞에 있는 상대방의 입장을 최대한 배려하면서도, 막을 수 없는 일에 대해 미련을 갖거나 찜찜함을 남기지 않는 쿨한 화술. 키워준 엄마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 덕에, 낳은 엄마를 만나나더라도 케빈이 건강하게 그 경험을 소화하게 될 것임은 이 대화가 낳은 실질적인 득이다. 하지만 동시에 케빈의 엄마가 이렇게 쿨하고 멋진 말을 잘 내뱉을 수 있었던 건, 언젠가 맞닥뜨리게 될 대화임을 미리 예상하고 평생 동안 이 순간을 준비해 온 덕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종종 인생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해야 할 말을 마음 속으로 여러 번 시뮬레이션해보며 미리 준비한다. 면접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질문을 들었을 때 던질 회심의 한 마디, 많이 사랑했고 좋았던 연인과의 이별이 다가왔을 때 헤어짐을 장식할 말, 오래 아팠던 환자가 눈을 감기 직전에 고생한 가족들에게 남길 인사 같은 것들. 그런 순간에 필요한 화술은 오히려 대단히 심플하다. 내 앞에 주어진 상황을 합리적으로 판단하면서도, 이 말을 듣는 사람의 마음이 가장 편안할 수 있게 배려하는 것. 케빈의 엄마가 선택한 대화법 같은 것이다. 심벌즈 주자는 한 순간을 위해 서 있는다. 적재적소에 완벽히 계획된 박자를 제공하면서, 청중 앞에 주변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가장 아름답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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