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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dodok Apr 27. 2022

말이 안 되는 것이 좋은 언어다.

문창과에서는 무엇을 배우나 10

말이 안 되는 것이 문학적 언어가 된다


문학을 문학답게 만드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낯익은 언어로는 감동을 이끌어 낼 수 없다. 문학적 글쓰기는 소위 낯선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산문이든 운문이든 문학적 글쓰기에서 낯선 언어 사용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만 모국어를 사용하여 자연스럽게 말하고 글을 쓰는 훈련을 제도권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십수 년간 받아온 우리다. 모국어로 한국어를 배우다 보니 한국어 문법에 익숙해져서 남들과 비슷한 천편일률적인 언어를 재사용한다.


우리는 평소에 모국어인 우리말에 너무 익숙하다. 그 결과 낯선 문장을 보면 자연스럽게 거부반응이 일어난다. 낯선 단어나 문장을 내 마음으로 수용하기가 매우 어려운 심성을 내 안에 가지고 있다. 따라서 표현의 한계에 갇혀서 파격적인 표현을 못하고 주춤거린다. 오늘은 낯선 언어를 스스로 창조하여 문학적인 글을 찾아가는 수업을 해보자. 기존의 글이 가지고 있는 익숙함으로부터 탈피하는 훈련이다. 세상 만물에 대한 주관이나 선입견을 버리고 나만의 글을 찾아가는 훈련을 해보자.  


1) 본인이 소유한 메모지에 단어(명사)를 5개씩 순서대로 적는다.(주변 사람에게 글자를 보여주지 않는다)  

2) 메모지의 글자가 보이지 않게 반으로 접어서 옆 학우하고 교환한다.

3) 상대 메모지를 건네받은 학생은 명사가 적힌 메모지를 펼쳐보지 않는다.

4) 받은 메모지에 자신이 생각하는 동사나 형용사를 5개씩 순서대로 적는다.

5) 메모지를 펼쳐서 학우가 적은 명사와 내가 적은 동사나 형용사를 순서대로 연결해 본다.

6) 친구가 쓴 명사와 연결된 동사나 형용사를 이용하여 한 문장으로 완성시켜 본다.


말이 안 되고 엉뚱한 표현들이 많을 것이다. 평소에는 전혀 사용하지 않던 말과 글이 튀어나와서 당황스러울 것이다. 이것이 글이 될 수 있을까 고민스러울 것이다. 그런 고민은 지금 만나는 문장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낯선 언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결한 문장 중에는 묘하게 중의적으로 해석되는 문장도 있을 것이다. 음미하면 음미할수록 문학적인 문장으로 새롭게 다가오는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표현, 그런 문장을 이제는 스스로 찾아가야 한다.


문학적 언어는 근본적으로 낯설게 하기다. 운문이든 산문이든 누구나 쓰는 일상 언어를 가지고 문학적 감동 주기는 불가능하다. 문학은 마냥 편안함을 주기 위한 단순한 언어의 나열이 아니다. 즉 모든 예술의 본질은 낯섦에 대한 여정이다. 색다른 표현의 언어를 써야 한다. 문학의 언어는 내가 새롭게 발견해서 써야 하는 것이다. 대중가요보다 클래식 음악이 구상화보다는 추상화가 이해하는데 시간이 당연히 더 든다. 창조적 예술이란 이미 생성되어 활용된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독자들은 어디에서 본 듯한 쉽게 이해되는 예술을 원하지 않는다.


낯설게 하기는 단순히 문학 언어 사용의 일탈이나 기교와 형식의 차원에서 한정하여 이해할 것이 아니라 더욱 넓은 범주에서 이해 가능하다. 의식의 관습적이고 일상적인 범주에 충격을 줌으로써 이데올로기나 은폐 작용을 폭로할 수도 있고 거짓 신화를 벗겨낼 수도 있다. 예술적 충동은 관습적이고 일상적인 질서 속에서 고정될 수 없다. 새로운 생성과 해석만이 의미 있는 예술로 살아남는다.


깊게 들여다보니 보이더라 또는 아니까 보이더라 라는 말을 적용하고 싶다. 문학을 포함하여 예술의 속성은 대상이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단순하게 모방하거나 반복하는 게 아니라 다른 것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예술의 존재론적 지위는 바로 이와 같은 '다른 것에 대한 생성 욕망'으로 인해 격상된다. 낯설게 함으로써 형식을 어렵게 하며 어려움을 지속 증가시키는 기법이다. 작품을 읽고 나서 대체로 모호하고 불투명한 의혹이 생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학의 언어 자체가 소모적, 은유적, 움직이는 생성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낯섦은 주제에 대해 즉각 이해를 못 하게 지연시킨다. 낯선 표현이 우리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언어 표현과 대상 사이에 괴리가 생긴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원심력을 벗어나고 너무 가까이 있으면 언어는 더럽혀진다. 결국 언어는 사물을 표현하는데 불완전한 매체이다. 즉 평소 쓰는 언어인 '장미는 아름답다' 가지고는 장미의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드러내지 못한다. 단단한 상투적 외피에서 탈피하여 낯설게 해야 일단 주의가 환기된다. 즉 누구나가 낯선 길에서는 정신을 차리고 길 찾기에 집중한다. 통상 '해가 기울었다'는 표현에는 그냥 무심코 지나치지만 '해가 시들었다'라고 표현하면 독자가 긴장하며 화자에 집중한다.


가령 동서고금을 통해 다뤄온 '사랑'은 모든 예술작품의 소재로 언제나 활용되고 또 소비되는 주요 소재다. 빈번하고 진부한 주제지만 그것을 매번 '다른 것'으로 재현하기에 생명력을 얻고 새롭게 다가온다. 이것이 바로 예술이 갖는 창조성의 힘이다. 심지어 대중가요도 사랑을 줄기차게 노래하지만 노래마다 가사는 다 다르다. 지겹도록 사랑 타령을 해도 매번 우리가 들어주는 것은 기존 사랑타령에서 벗어나서 낯설게 노래하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한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우편배달부 '마리오'는 어부의 가난한 삶을 '그물이 서글프다'라는 언어로 창조했다. 일상 언어생활에서 우리는 '그물이 서글프다'라는 말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물이 서글프다'라는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언어생활은 표시적인 기능의 언어 사용과 내포적인 기능의 언어를 사용한다. 과학에서의 언어 사용은 주로 표시적인 기능으로 이루어진다. 즉 과학은 어떤 사실에 혼란이 없도록 명확하며 단일한 의미를 가진 기호를 추구한다. 표시적 기능의 예를 들면 예를 들면 물은 산소와 수소의 결합이다. H2O는 과학 언어이고, 1+1=2는 수학용어다. 일상생활이나 문학에서의 언어는 이러한 표시적 기능과 함께 주관적이며 다양한 의미를 지닌 내포적 기능도 함께 사용한다.


결국 언어는 사물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불완전하다. 구체적이고 생생한 질감을 드러내어 존재의 본질을 구현하는데 오히려 장애가 되기도 한다. 문학에서 언어 사용은 이러한 불완전한 언어를 사용하여 존재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드러내려는 시도다. 그렇다면 언어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용해야 한다. 일상의 언어는 사물을 지시하고 의사를 전달하는 기능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반해 문학의 언어는 그러한 일상적 기능에 의존하면서도 그 규범에서 일탈함으로써 독특한 구조물을 구축한다. 문학의 언어는 결국 일상적인 언어로부터의 일탈을 통해 독자들에게 이해를 지연시키고 주의를 환기해야 한다.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 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이탈한 자가 문득/김중식의 시집 '황금빛 모서리' 문학과 지성사>


이 세상의 모든 예술은 남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시다. 즉 궤도 이탈을 부추기는 시다. 그 말이 가진 위험성이 분명 존재한다. 다수는 성공 못한다. 결국 대다수는 문학도 사랑도 일상도 남들이 갔던 길을 따라간다. 이 시에서는 두 가지 삶을 이야기한다. 하나는 평범한 삶이고 두 번째는 궤도를 벗어나는 삶이 있다. 그러나 궤도를 벗어나는 삶이라야 캄캄한 밤하늘에 획을 그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궤도 벗어나기가 여러분이 앞으로 해야 할 문학적 글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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