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츠페터 국제보도상'을 기념하며
1980년 광주 시민은 국가의 보호는커녕, 국가의 공권력에 철저히 짓밟혔다. 폭동이다, 북한의 지령이다. 배후 세력이 있다 등 루머와 거짓된 진실만이 다른 도시로 퍼져나갔다.
힌츠페터.. 일본에 머물던 그는 광주의 소식을 듣고 선교사로 위장해 광주로 들어온다. 영화 '택시 운전사'를 보면 실제 모델 김사복 씨와 끈끈한 우정을 쌓아가며 우여곡절 끝에 광주로 들어가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가 없었다면 광주의 무차별적인 폭력과 지옥으로 변한 선량한 도시는 세상에 외면받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국내 언론은 공권력에 저항하지 못했고, 기자 정신은 총부리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던, 그 당시 한국의 신문과 방송이었다.
결국 군사정권은 8년간 더 이어져야 했지만, 그때의 광주의 눈물과 피와 한은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가 좀 더 깊고 빠르게 심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시절 광주는 힌츠페터의 필름에 담겨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언론의 사명은 '민주주의 실현과 수호'이다. 정치권력을 비판하고, 자본에 굴하지 않고, 소수 힘 있는 자들을 감시하는 것, 모두 민주주의라는 대의 안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 민주주의 상징인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은 그 어떤 논리로도 폄하되어서도 안되며, 대한민국의 시민이라면 그 당시 광주 시민들에게 마음의 빚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본다.
푸른 눈의 목격자로 불리는 '위르겐 힌츠페터'는 그 푸른 눈동자에 광주의 빨간 피를 담아 전 세계에 광주의 진상을 알렸다. 그가 없었다면, 그냥 도쿄 특파원으로서 주어진 취재만 했더라면, 그에게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기자 정신이 없었다면, 80년 광주의 모습은 몇 장의 사진과 텍스트로만 우리의 기억에 흐릿하게 남아 있었을 것이다.
힌츠페터라는 인물을 대중들은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를 안다 하더라고 그의 직업을 단순히 ‘기자’로 알고 있을지 모른다. ‘기자’라는 직종을 대중들은 뉴스에서 마이크를 잡고 리포팅하는 사람이거나, 신문에서 기사를 작성하는 사람으로만 인식하는 경우가 많으나, 힌츠페터는 비디오 저널리스트, 우리말로 ‘영상기자’이다(얼마 전까지 카메라기자, 촬영기자로도 불렸다). 카메라를 펜대 삼아 사건 사고와 정치 경제의 중요 순간을 담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참고로 80년대 미드 ‘브이’에 나왔던 도노반의 직업도 영상기자였다. )
그 고난과 억압의 시간을 광주시민과 함께 해서였을까. 힌츠페터는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형 판결 소식을 접하고, <기로에 선 한국>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광주 시민들에 대한 애정과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담았을 것이기에 그의 작품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러 힌츠페터는 86년 또 서울로 날아왔다. 그리고는 광화문 시위 현장에서 경찰에게 맞아 목과 척추를 다치는 중상을 입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잊혀지게 마련이거늘, 그의 가슴속에 광주의 저항은 선명해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렇게 30년 넘는 세월 동안 광주와 518을 잊지 못했던 힌츠페터는 2016년 세상을 떠났고, 생전에 남겼던 유언에 따라 그의 손톱과 머리카락은 광주 망월동 5.18 묘역에, 그의 카메라 속에서 민주주의 외쳤던 희생자들과 함께 묻혔다.
한국영상기자협회는 5.18 광주민주항쟁을 전 세계에 알린 독일 영상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의 기자정신을 기념하고, 당시 언론인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진실을 외면했던 한국 영상기자들의 반성과 언론자유에 대한 다짐을 담아, 518기념재단과 전 세계 영상기자들을 대상으로 '힌츠페터 국제보도상' 시상한다고 한다.
40여 년 전 탄압과 폭력의 현장이었던 우리나라에서, 이제 전 세계 영상기자를 대상으로 민주주의, 인권, 평화를 향한 시민들의 숭고한 투쟁을 영상으로 담아낸 그들에게 더 큰 자긍심을 심어주는 장이 열린다고 하니,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위르겐 힌츠페터.. 그가 광주와 대한민국에 심었던 밀알이 전 세계 수백수천 명의 '세상의 진실을 밝히는 눈'이 되어, 세상의 어두운 곳을 계속해서 비추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