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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아 Apr 19. 2022

개명한다는 것

어찌 됐든, 내가 내 이름을 선택하는 것


  탑골공원에서 서쪽으로 건너길에 종각역에서 안국역으로 향하는 인사동 길목에는 사주풀이를 하는 어르신들이 있다. 엄마는 무엇이 그리 궁금하셨는지 이따금씩 입소문이 난 사람을 찾아 사주를 보러 가곤 했다. 엄마가 수년 전에 찾아간 분은 그 인사동 길목에서 사주를 제일 잘 본다고 소문이 난 80세 넘은 할아버지였다.

  항상 본인의 사주풀이는 뒷전이고 그날도 역시 자식들 사주를 보고 오신 엄마는, 내 사주에 남자가 없다는 말을 들으셨다. 그날의 이야기는 꽤나 흥미로웠다.


1. 사주에 남자가 없다.

2. 이름에 남자가 있으면 사주를 보완할 수 있다.

3. 이름을 한 글자만이라도 바꾸어줘라.


  한 글자만 개명을 하면 될 것이라서, 엄마는 바꾸면 괜찮을만한 한자까지도 추천을 받아서 집에 오셨다. 나는 이에 대한 배경설명없이 다짜고짜 '개명하자'는 엄마의 말에 반기를 들었는데, 엄마는 내가 정말 결혼을 못 할까 봐 걱정된다며 밤에 잠을 못 주무시는 날을 반복했다.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셨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인지 자초지종을 들어봤더니 저런 이야기였다. 그동안 사주를 몇 번 봤지만 사주에 남자가 없어 결혼을 못 한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같은 사주를 보고 왜 그런 해석을 했을까. 엄마는 그 말을 무시하지 못하셨고 내 이름을 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글은 놔두고 한자만 바꾸거나, 또는 한 글자만 다른 글자로 바꾸자는 것이 엄마의 의견이었다.


  신빙성을 확신할 수 없는 사주풀이 때문에 갑자기 내 이름이 위협받는 건 굉장히 불쾌했다. 엄마는 내가 결혼을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다. 환장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개명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순전히 엄마가 잠을 못 주무시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어디서 듣고 온 말이 있으니, 그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개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알아보니 한자만 바꾸더라도 개명절차는 이름 자체를 바꾸는 것과 똑같은 절차가 필요했다. 이름은 그대로면서 한자를 한 글자만 바꾸었다고 그것도 개명이라고 하려니 운명을 대하는 태도가 정말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개명을 할 거면 작명소에서 좋은 이름을 받아와서 개명하는 게 낫겠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엄마는 누군가 추천해준 강남역 7번 출구의 작명소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했다. 특이한 점은 전화예약 당시에 내 출생정보(사주)를 말해주었다고 한다. 엄마 손을 붙들고 작명소에 갔더니, 예약시간에 맞춰서 미리 준비된 이름 다섯개가 종이에 프린트되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이때 작명소는 잘못 골랐다고 생각하고 있다. 딱 봐도 미리 받아둔 출생정보를 작명 프로그램에 돌린 티가 났기 때문이다. 이름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요즘 신생아들 사이에 유행하는 이름 같았다. 애초에 출생정보를 전화로 미리 요구한 것도 이상했다. 나는 방문을 하면 나 보는 데서 이름을 바로 지어주는 것인 줄 알았지. 그래도 작명소에서 다섯개의 이름을 볼 때부터 눈에 들어왔던 이름이 있었다. 생소한 이름이지만 세련되어보였고, 신생아 이름으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결국에는 첫눈에 들어왔던 그 이름을 고르게 되었다. 그게 '리아'였다.


  어린 시절부터 불려왔던 이름이라 마치 주어진 성(family name)처럼 이름도 내게 주어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이름은 바꿀 수 있는 것이었다. 보통은 주어진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가지만, 나는 그래도 작명소에 직접 가서 받아온 이름으로 내가 앞으로 살아갈 이름을 직접 골라서 법원에 개명사유서를 적어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은 '나는 내 이름도 내가 정했어.'라는 자부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굳이 내가 원해서 바꾼 이름은 아니지만, 그 경험을 나는 이렇게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이렇듯 나의 개명에는 내 사주와 나의 결혼에 대한 것, 그에 대한 엄마의 걱정이 담겨있다. 개명 후에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그래서 남자친구는 생겼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 질문에 나는 1년여간 '아니'라고 대답했다. 개명 후 1년이 지나자 이제는 남자친구 생겼냐고 물어보는 이도 없었다. 연애를 하지 않는 삶은 그렇게 몇 년을 더 이어갔다. 개명 후 4년 2개월이 지난 여름날, 마침내 남자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새집으로 이사오기 일주일 전, 근처 동네에 사는 오랜 친구 혜진이와 함께 각자의 어머니를 모시고 넷이서 만나 이야기꽃을 피웠다. 혜진이 어머니께서는 '결국 사주대로 살아왔더라'면서 일이 잘 안풀리거나 궁금한 것이 있으면 사주를 보러 다닌다고 하셨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내가 사주 때문에 개명을 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혜진이 어머니께서는 내게 '개명을 해서 지금 남자친구를 만났나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렇게 보기엔 너무 오래 걸렸어요. 개명을 2017년 5월에 했는데.. 4년도 더 걸렸어요."

  내가 이렇게 대답하자, 혜진이 어머니는 개명 후에 바뀐 이름으로 충분히 불려야 그 효과가 난다는 말을 하셨다. 아주머니께서도 어린 시절에 잠깐 이름을 바꾸어 불린 적이 있었는데, 이름의 효과를 빠르게 내기 위해 아버지께서 바뀐 이름을 5천번 쓰도록 시키셨다고. 아마 이름이 5천여 번을 불리기까지 4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고, 그래서 그제야 이름이 효력을 발휘해 인연을 만나게 되었으리라고 말씀해 주셨다.


  귀가 얇은 우리 엄마는 그날 집에 들어오자 내게 '너도 종이에 이름을 5천번 써라'라고 하셨다. 황당했다. 나는 쓰기가 힘드니 엄마한테 그만큼 나를 불러달라 말할 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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