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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쿰쿰 May 07. 2022

머리를 했다

의도치 않은 만남

2020년의 애쉬 염색은 나에게 큰 희열과 동시에 성가심을 남겼다. 실컷 탈색하고 나니 예쁜 애쉬색이 나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대관절 그 애쉬라는 녀석은 유지기간은 짧고 수습기간은 말도 안되게 긴 녀석이었다. 대략 1:5의 비율로 시간이 들어간 듯. 짧고 굵은 만족 이후 긴 시간을 수습하느라 펌이 들어가지 않은데다가 색깔까지 2등분인 너저분한 숏컷으로 살았고, 드디어 저번달부로 모든 탈색모가 잘려나갔다.


휴직으로 인해 시간이 많아지면서 과거 사진들을 보면서 회상에 젖는 일이 많았다. 긴 생머리였을 때도 있었고, 긴 머리 펌이었을 때도 있었고, 단발이었을 때도 있었고, 숏컷이었을 때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그다지 맘에 들지 않았던 헤어스타일들을 한 세월 건너 살펴보니 나에게 뭐가 더 어울리고 뭐가 덜 어울리는지 확연하게 보였다. 그렇게 내가 픽한 머리는 숏컷+볼륨펌의 조합이었다.


그 사진을 들고 가서 이대로 해 달라고 했다. 높은 확률로 구현이 가능했다. 왜냐, 그 당시 그 머리를 해 준 그 미용실 그 원장님에게 다시 갔으니까. 그 곳은 나의 오랜 단골집이다. 원장님, 사모님 두분이서 운영하는 크지 않은 미용실인데, 유쾌하고 실력 좋은 원장님과 친절하고 따뜻한 사모님이 맞아주시는 한결 같은 곳이다. 참고로, 우리 남편의 단골집이기도 하다. 우리 남편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가고 나서도 그 곳에서 맘에 드는 미용실을 못 찾아 한달에 한 번 한시간 반 걸리는 이곳에 와서 머리를 깎을 정도다.


원장님은 그 당시의 내 머리 시술기록을 꼼꼼히 살피시더니 당시 했던 시술 그대로 구현해 주셨다. 역시 믿고 맡기는 신의 손. 완성된 머리는 내 예상보다 더 맘에 들었다.




그 미용실은 내가 다니는 직장이 있는 동네에 있다. 그 동네가 크지 않은 우리 도시 안에서도 약간의 폐쇄성을 지닌 지역이라 내 제자들을 만날 확률이 높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몇 년을 다니면서도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 방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날도 코로나 이후 익숙해진 생얼+편한 옷 조합에 마스크를 장착하고 미용실에 들어섰더랬다.


미용실에는 손님이 한명 더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안내한 옆 자리에 앉아서 근황 토크를 주고받고 있는 그때, 갑자기 그 옆자리 손님이 말을 걸어왔다.


"ooo선생님...?"


이럴 때 정말 난감한 것이-바야흐로 교사생활 년수가 두자릿수가 넘어가니 졸업생들이 헷갈린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얼굴은 알겠는데 이름이 기억이 안 난다. 근데 요즘엔 다들 마스크를 쓰고 다니니 이제 얼굴도 얼핏 봐서는 모르겠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 아이도 그랬다. 빼꼼 내놓은 눈만 봐서는 누군지를 도통 모르겠다!!


"어머! 너 이름이...?"


어떤 선생님들은 그럴 때 자신이 그 아이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숨긴다. '아이고 잘 지냈어?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고?' 정도로 반응하면 자연스럽게 그 사실을 숨길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싫어하는 데다가, 어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약 2시간의 시술 시간동안 계속 시공간을 공유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래서 이름을 물었고, 그 아이의 이름을 듣는 순간 그 아이의 마스크 아래 얼굴이 기억이 났다. 잊을 수 없는 아이였다. 나 좋다고 쫓아다녔던 몇 안되는 아이였는데, 그 아이가 줬던 사심 가득 애정 가득 편지를 받고 기쁜 마음을 티는 못내고 몰래 몇 번이나 읽어봤던 기억이 생생한데!


10여년간 학생들에게 받은 편지가 한가득인데, 그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몇개 중 하나인 그 아이가 준 편지


이제는 어엿한 대학생이 된 그 아이는 여전히 생기발랄했다. 고등학교 생활이 힘들었을 텐데, 그 과정에서도 그 싱그러움을 잃지 않아준 것이 고마웠다. 종알종알 자신의 대학생활과 친구들의 근황을 이야기해주는 것도 고맙고 귀여웠다. 사실 제자와 그렇게 장시간을 공유할 일이 많지 않기 때문에 시술시간이 내심 걱정이 되었었지만, 그 아이의 종달새 같은 종알거림에 어색함이 날아갔다.


반가운 마음에 밥이라도 사 주고 싶었지만, 제자에게 그런 말을 하기가 영 쑥쓰럽다. 다행히 그 아이가 먼저 시간 내주세요 라는 뜻의 말을 해 줘서 시간을 맞춰보았지만, 이번에는 맞지 않아서 따로 밥을 사주지는 못했다. 너 방학 때 보자꾸나, 라고 말해 두었는데, 진심으로 보고 싶지만 내 쑥쓰러움이 그때까지 극복이 될 런지...그 아이가 먼저 연락해주기를 바라는 못난 스승의 마음이 부끄럽다.




뜻하지 않는 만남에 지루한 시술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반가운 제자도 만나고, 머리는 예쁘게 나왔고. 집으로 오는 길이 상쾌했다. 행복이 뭐 별건가, 이런 게 소확행이지. 진심으로 반가웠어 ㅇㅇ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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