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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넬리, 오랜 여행을 함께 하자.

<바빌론>(Babylon, 2022)

* 이 글에는 영화에 대한 직접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0.

헐리우드판 <물랑루즈>로 알고 갔는데


알고 보니


0-1.

개츠비의 <라라랜드: 절망 편>, 흑화한 <라라랜드>


혹은


0-2.

영화 10덕이 영화 5덕에게 출제한 10덕 승급 시험




1.

고등학교 시절, 나와 친구들은 시험이 끝나면 시외버스를 타고 인근 도시로 향했다. 점심으로 카레맛이 섞인 떡볶이를 먹고는 순위를 뒤에서부터 매겨야 할 것 같은 포켓볼 혹은 볼링을 쳤다. 저녁에는 같은 건물의 뷔페에 가서 등을 펴지 못할 정도로 과식을 했고, 그로 인해 택시나 버스 타기를 포기하고 터미널까지 걸어가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날에는 영화관에서 꼭 영화 한 편을 보았다. 그것이 우리만의 의례였다. 내가 살던 시골에는 영화관이 없었다.


첫 휴학 때 나는 다시 고향에 내려가 일 년을 보냈다. 그때의 나는 매주 월요일 아침이면 종점이 우리 동네였던 옆 도시의 시내버스를 타고 조조 영화를 보러 갔다. 배차 간격이 넓어 하루에 버스가 몇 번 오지 않기에 꼭 첫차를 타야만 했고, 불이 꺼져있다시피 한 영화관에 덩그러니 앉아 발권과 입장 안내를 기다려야 했다. 첫차의 출발은 빨랐고 첫 영화의 시작은 늦었기에 나는 늘 한참 일찍 영화관에 도착했다.


영화를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다시 학교로 돌아오고서부터였다. 조금 걷거나 조금 많이 걸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종류 별로 있었다. 불현듯 영화가 보고 싶어도 결심과 계획을 하고서야 영화관에 향할 수 있었던 이전과는 달리, 그곳에서는 신발을 신는 것 말곤 준비할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몇 발자국 되지 않는 영화관을 두고, 서울로, 인천과 부천으로, 전주로, 부산으로 방방곡곡 향하곤 했지만.


그 시간들을 지난 지금의 나는 한 달에 한 번도 영화관에 가지 못하곤 한다. 이 영화조차 이번 달 들어 처음으로 본 영화였다. ‘나는 정말 영화를 좋아하는 것인지’, ‘이런 걸 보고 ‘영-태기’라고 말하는 것인지’ 묻곤 하지만 확신에 찬 답을 내릴 순 없었다. 일 년에 네 번은 영화관에 가는 것이 왜 어린 나의 의례였는지, 일 년 내내 좁은 방을 벗어난 적이 없을 만큼 의욕 없던 내가, 월요일이면 첫차를 타야 했고 조조영화를 보아야만 했던 그때의 내 감정은 무엇이었는지, 무엇보다 지금의 나로부터 지난 6개월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오늘의 내가 어떤 이유에서 2시간 69분 동안 G열 7번 좌석에 앉아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지를, 영화 스스로가 주저하는 나를 대신해 확신 밖에 남지 않은 답을 대변했다.



0-1. > 2.

<라라랜드>의 절망 편이라 칭해본 것은 엠마 스톤과 마고 로비의 싱크로유ㄹ… 때문(만)은 아니고, <라라랜드>를 데칼코마니 한다면 이 모습이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원본에서 보지 못한 존재의 이면이 대상의 좌우를 반전시키고서야 드러나듯, 인물과 서사와 감정을 위아래로, 좌우로 종종 뒤집어 양면을 교차시켜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보는 이의 방향만 바뀌었을 뿐, 존재의 정체성은 동일하다. 화면 가득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영화의 오프닝(코끼리 똥 말고요)에서부터 러닝타임 내내 흐르는 재즈, 미아와 셉, 넬리와 매니가 가진 꿈과 고민을 지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이상을 압축한 비현실적 상황으로 에필로그를 띄우고, 모든 시간을 사랑한 존재에게 영원히 부치는 눈동자로 끝을 맺는다.


두 영화 모두 우퍼를 두드리는 재즈 사운드, 현란한 색채와 인공광이 눈길을 사로잡지만, 관객 모두는 영화의 상징적 순간이 그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피아노와 두 사람의 목소리로만 진행되는 ‘City of Stars’가 <라라랜드> OST의 타이틀인 것처럼, <바빌론>의 진정한 시작이자 상징은 매니의 첫 고백에서부터라 생각한다. 저택의 웅장함도, 천장과 벽면을 화려하게 장식한 금빛 조명도, 고막을 쉴 새 없이 두드리는 음악소리도, 어스름한 새벽녘의 태양이 선사하는 자연광과 모든 것이 억압된 저택 밖의 광활하고 텅 빈 벌판을, 그 공허와 고요 속에 홀로 자리한 매니의 감정을 대체할 수 없다. 그 넓은 대지가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음에도 두 눈에는 넬리가 꾸는 꿈 밖에 담을 수 없었다.


LA는 꿈과 사랑을 이분할 수 없는 이들의 도시인가 보다.



3.

이전에 <아바타>를 감상하고 작성했던 짧은 글이 있다. 우연찮게도 그 글에 담았던 이야기들이 이 영화에 고스란히 등장했다. 하나의 컷으로만 만들어질 수 있었던 영화에 편집이라는 개념이 생겼고, 무성 영화의 빈자리를 소리가 채웠으며, 흑과 백으로 채워졌던 스크린에 문을 열어젖히니 총천연색의 시대가 펼쳐졌다. 프레임에 한번 새겨진 순간은 다른 순간이 대체할 수 없기에, 순간마다 공을 들일 수밖에 없었던 필름 영화는 디지털 영화로 대체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고, 3D 디지털 영화는 여전히 영화사의 전환점으로 남을 수 있을지 그 시험대에 서있다.


안주와 변주를 동시에 원하는 인간이기에, 유성 영화, 컬러 영화, 3D 영화의 등장은 이전 시대의 인물들에게 달가울 수 없었다. 새로운 기술은 관객에게 닿기 이전, 창작자의 손을 거쳐야만 했다. 그들이 오랜 시간 구축한 업적이자 명예인 기성의 문법은 새로운 기술에 의해 뒷전으로 밀려날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시대의 완강한 거부 속에서도 기술이 스크린에 안착하기 위해서는, 신기술만이 변주할 수 있는 새로운 문법을 구축하고 선보여야만 했다.


잭 콘래드의 시대도 그렇게 대체되었다. 인간에게 변주로 등장했던 잭이 안주로 남을 때, 잭의 시대에는 종말이 고해졌다. 종말이 고해진 존재의 말로를 생생하게 지켜본다면 비참하게만 보일 것이다. 그러나 50년이 지난, 잭의 시대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꼬맹이들은 잭을 통해 영화를 보고 배우며 사랑한다. 사랑하는 이의 모든 면면을 알고 싶어 하듯, 영화를 사랑하는 현재의 모든 이들에게 잭은 영화의 일부이자 곧 영화이다. 역사는 당대가 아닌 후대에 의해 정의된다. 지금의 모든 안주는 변주에서 비롯되었다. 고루한 고전영화를 교과서로 삼는 것은 내가 본 모든 영화들이 고전을 답습했기 때문일 것이다. 변주가 안주로 남는 순간은 그 변주가 모두의 꿈이 될 때 찾아온다. 잭도 모두의 꿈이 되었다.



0-2. > 4.

저 10덕은 5덕들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똥이 잔뜩 발린 칼을 5덕의 눈앞에 겨누며 “이래도 좋아?”라고 몇 번이고 묻는데, 이건 분명 아니라고 말 못 할 5덕들을 예상하고 벌인 짓이다. 뒤에서 변태 같이 웃고 있을 듯. 사실 5덕이 부정하고 싶은 것은 ‘10덕보다 한참 모자란 내 덕력’이라는 것이지 않을까.


좋은 말로 물어보면 될 것을…


(근데 이게 시… 싫다는 건 아냐……)


입덕은 빠를수록 좋다.



5.

스티븐 스필버그가 <레디 플레이어 원>을 통해 대중문화에 찬사를 보낸 것처럼, 데미언 셔젤 또한 <바빌론>으로 자신이 사랑해 온 영화의 역사에 찬사를 보낸다. 다만 그 찬사는 영화의 역사에 남겨진 굵직한 획이면서도 오점이자 필연이었던 저속한 기반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그 저속함에 버티고 굴복하며 스스로 영화의 자양분이 되어준, 영화가 곧 꿈이었던 이들과 눈앞을 가리는 저속함을 걷어내고 그 꿈의 순수함을 어떻게든 발견해 내는 나와 내 옆자리의 관객들을 향한 것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대중을 대상으로 했기에 <열차의 도착>이 세계 최초의 영화라 일컬어진다. 영화의 기술도, 문법도, 예술성도 관객에게 설득되어야만 했고, 열차의 동력은 관객으로부터 공급되어 왔다. 결국 영화와 관객은 필연이자 서로에게 주체였다. 넬리는 스스로 자신의 성 Roy에 ‘LA’를 더했다. 넬리는, 영화는 태어날 때부터 라라랜드의 왕(Roi)이자 스타였고, 매니와 관객은 곧 스타가 뜻하는 바였다.


영화의 주체들에게 앞으로도 변함없이 영화를 함께 사랑하자는 어느 10덕의 꽤 저돌적인 러브레터.



6.

잭 콘래드, 모든 영화의 꿈으로 남은 채 잊히지 못할 영화의 역사

시드니 팔머, 허영과 선민의식에 감춰진 본질, 그들에게 과분하고 일렀던 영화의 미래

맥케이의 배우, 자본과 정치에 의해 자극과 쾌락만이 남은, 영화가 가장 밑바닥에 위치했던 순간

넬리 라로이, 모두가 사랑한 영화의 본질


 

7.

데미언 셔젤과 저스틴 허위츠는 이제 엠마 스톤, 마고 로비, 사마라 위빙을 데리고 <라라랜드: 연옥 편>을 내놓아라. (이왕이면 버디 무비도 좋을 것 같다. 재즈도 언제나 환영이다.) 만약 이 요구에 응하지 않을 시, 나는 당신들을 코끼리 화장실에 가둔 후, 감금 내내 영화 관람을 금지하는 엄벌에 처하겠다. 진심이다. <클레멘타인>도 기대하지 마라. 당신들은 그조차도 영화라고 설렐 테니까.

 



그렇게 영화는 먼 나라 프랑스에서 출발해 개츠비의 똥밭을 구르며 100년 넘게 달려 내 앞에 다다랐다. 부실한 레일을 무릅쓰고, 저만의 방법으로 먼 길을 돌아 나를 찾았다. 내가 여기 서있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영화는 이곳에서 나를 태워 다시 얼마가 걸릴지 모를 시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달리고 있다. 한껏 오물을 뒤집어쓴 이 모습에 나와 모든 관객을 향한 진심이 보이고, 그 오물조차 이미 중요치 않다는 나 또한 영화에 얼마나 진심인지.

넬리는 내가 유일한 친구라고 말하지만, 나는 넬리가 늘 나와 함께였기에 이곳에 버티고 서있을 수 있었다.



넬리, 오랜 여행을 함께하자.
열차의 엔진에 무한한 동력이 공급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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