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딸공 생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딸공 Oct 07. 2020

그럴 때가 된 것 뿐이지.

[일일딸공] 삶에도 주기라는 게 있더라고. 

인터넷을 떠돌다가, 살아온 이야기를 주로 글로 쓴다는 어느 작가의 인터뷰를 읽었다. 어떤 때에는 글이 참 잘 써지다가도 또 어떤 시기가 되면 글이 너무 안 써지곤 하는데, 그럴 땐 ‘내가 지금은 살아갈 때 구나!’ 생각한다고. 살며 글쓰며 반복하다 보니 또 한동안 살다 보면 글이 써진다고. 그러니 글이 잘 안 써질 땐 지금이 글 쓸 때가 아니라 살 때인가 보다 생각한다는 말이 어쩐지 모르게 위로가 되었다.      


나의 삶에는 뚜렷한 주기가 있다. 몇 년을 바짝 공부하면 그 뒤 몇 년은 집중력이 느슨해지고, 몇 년 바짝 부지런을 떨고 나면 그 뒤 몇 년은 지쳐 나가떨어지는 식이다. 나의 생애 주기 어느 시점에서 만난 사람인지에 따라서 나를 판단하는 시선도 달라진다. 세상에 어쩜 그렇게 부지런하냐, 네 하루는 48시간이냐 묻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렇게 뭐든 대충하고 살면서 생각보다 잘 사는 게 신기하다는 시선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이 주기란 것이 내 뜻대로 조정해서 세팅하는 것이 아니라서, 대입이나 취업 진학 등 삶의 중요한 시기 앞에서는 바짝 몰아치고 뒤에는 훅 나가떨어진다. 달릴 땐 좀 길게 달리고 쉴 땐 좀 짧게 쉬었으면 좋겠지만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타고난 기질이 평생 꾸준히 열심히 달릴 만큼 성실하지는 못한 것 같다.      


아이들과 상담을 하면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작년까지는 정말 집중이 잘 되고 너무너무 열심히 했던 것 같은데 오히려 이번 학기에 느슨해졌다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때만큼 못할 것 같은 생각에 더 불안하고 집중이 잘 안 된다고 한다. 조급한 마음에 불안함이 더해져 성적이 자꾸만 떨어진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나도 그랬다.     

 

공부를 한참 하다가 집중력이 떨어질 때, 하던 일이 어느 순간 진척이 없을 때, 갑자기 살이 쪄버렸을 때, 조급한 마음으로 걱정하고 불안해했다. 되지 않는 일을 붙잡고 고민하거나 며칠을 굶다시피 하다가 또 폭식을 했다. 삶에 주기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전까지, 매 순간 최고점만 더듬으며 자신을 다그치거나 괴로워했다. 그러나 살아보니 다 때가 있는 거였더라. 공부가 잘 안 된다면 그냥 좀 쉴 때가 된 거지, 일이 잘 안 풀리면 또 그럴 때가 있는 거지, 살이 좀 찌면 운동할 때가 된 거지, 이제는 한결 맘 편히 생각하게 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나의 부족함 앞에서 여유를 갖게 되는 것일까. 다시 올라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 그래서 포기하지 않는 태도, 그거면 충분하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일 공부 운동 취미, 삶의 각 영역이 각기 다른 주기를 갖는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공부에 미쳐있을 땐 운동에 느슨해지고, 기타에 미쳐있을 땐 일을 좀 대충하는 식으로 산다. 모든 영역이 동시에 최댓값을 가지려면 온전한 멘탈이 붙어 있을 리 없으니 주기적으로 하나씩 대충 해버리는 습성은 뇌가 무의식적으로 택한 방어기제인지도 모르겠다. 구구절절 길게 썼지만 결국 시기별로 쓰고 사는 에너지의 총량이란 게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내가 지난 6개월간 운동을 멀리하고 1일 1맥주를 시전하며 4킬로그램이 몸에 더 붙도록 내버려 둔 것은 그냥 그럴 때였던 것뿐이다. 특별히 내가 더 게을러졌다거나 갑자기 몸을 포기해버렸다거나 그런 것은 전혀 아니었다. (ㅋㅋㅋㅋㅋ)  

   

지난 토요일 새벽, 전날 밤 먹은 치킨이 새벽까지 위에 그대로 남아 있는 느낌에 눈을 떠 관평천으로 달려 나갔다. 며칠 새 부쩍 차가워진 새벽공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 해가 또 기울고 있구나, 이제 다시 운동을 좀 할 때가 됐다. 연초부터 코로나를 핑계로 올스톱 해버렸던 필라테스를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어제 6개월 만에 필라테스를 갔다.      


쫙 달라붙은 필라테스복을 입고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인 곳에 매트를 깐다. 해먹을 걸고 매트 위에 서면 온전히 내 몸을 마주하게 된다. 매일 밤 맥주를 잔뜩 마시고도 옷으로 잘 가린 채 맘에 드는 각도만 골라 기억하던 자신을 여지없이 두드려 패는 시간. 에고, 이제 진짜 운동을 좀 할 때가 되었구나. 그동안 잘 먹고 잘 마셨다. 실컷 반성하며 땀을 뺀다. 뭉뚝해진 동작에서 6개월의 공백이 느껴지다가도 고난도 동작을 몸이 제법 기억하는 게 기특했다.      


운동을 마치고 나오며 아이에게 카톡을 한다. 다시 올라갈 수 있다는 믿음, 그래서 포기하지 않는 태도 그것만 갖고 있으라고. 쏟아지는 과제 틈에서 조급하고 불안하겠지만 그럴 때가 된 것 뿐이라고. 최고의 집중력이 나오지 않더라도 하나도 펑크내지 않고 해내고 있는 네가 기특하지 않냐고. 너의 어디가 이상하거나 문제가 있는 게 절대 아니라고. 그러니 힘내자고. 나도 그렇게 하겠다고.      


밤공기가 제법 차갑다. 가을이다. 



토요일 아침 산책길 관평천에서 :) 



매거진의 이전글 누구의 방바닥이 누구의 천장인 채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