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권태> 창간호의, ‘이달의 권태인’ 칼럼을 맡는다는 것은 적잖은 부담감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이는 <월간 권태> 팀과의 논의에도, ‘권태인’이라는 호칭을 정확히 정의하는 것에 대해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의 기저에는 권태를 체험하지 못해 본 것은 아니나, 불청객처럼 들이닥친 권태감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 만큼의 이해는 얻지 못했다는 자각이 깔려 있었다. 그래서 ‘권태인’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권태’라는 개념을 개인의 언어로 정의할 필요가 있었다. 권태의 사전적인 정의는 어떤 일이나 상태에 시들해져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이다. 이 거시적인 정의는 다소 모호하게 다가왔는데, 그것은 권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작용보다도 내면에 숨겨져 있는 작용점에 주목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복잡한 삶을 살고 있는 현대인의 권태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게으름과 싫증보다는 무엇이 그들을 게으르고 싫증나게 하는지를 주목하는 것이 더 합당하게 느껴졌다. 삶은 언제 지루해지는가? 구태여 지적하자면 삶은 이래저래 지루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소득만을 위한 직업, 미래의 수확을 위한 끊임없는 자기관리, 더 이상 설레지도 즐겁지도 않은 인간관계까지. 그런 끊임없이 돌아가는 인생의 바퀴에서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아, 대체 뭘 위해서 이러는 거지. 대체 뭘 위해서? 그래서 일상에는 몸속에 지방이 달라붙듯 게으름이 달라붙고, 싫증이 난 일상 때문에 자연히 찾게 되는 것은 탈출구다. 술을 진탕 마시거나, 새로운 사람을 소개받거나, 뭔가 재미있어 보이는 곳으로 도피하듯 떠나거나 하는 일시적인 ‘파랑새.’ 하지만 그런 것들은 한 순간일 뿐이고, 이상이 수필 ‘권태’에서 표현했듯이, 다시 떠난 자리로 돌아와 내일을 준비하면서, 이런 날들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다 보면 몸은 ‘오들오들 떨릴 뿐이다.’
결론적으로 현대인의 권태는 각자의 삶에 내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발동되는 것은 순전히 개인의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누구에게나 게으름과 싫증을 유발하는 버튼은 있기 마련이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권태인’이란, 이런 권태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이와 공존해 가면서 본인의 인생의 궤적을 그리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싶다. 순간의 권태에 굴복해 헛된 것에 집착하거나, 권태라는 감정 자체를 제거하려 드는 사람이 아니라, 그 또한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야말로 ‘권태인’으로 정의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수아즈 사강은 완벽한 권태인으로 다가왔다. 사강의 데뷔작 ‘슬픔이여 안녕’에서 사강은 슬픔에게 작별의 인사가 아닌, 만남의 인사를 건넨다. 권태로울 정도로 단조로운 일생에서 처음으로 슬픔을 마주하는 순간, 슬픔에게 인사를 건네는 주인공의 모습은, 출간 이후 사강이 삶에서 겪을 온갖 감정들-기쁨과, 슬픔과, 권태로움과, 외로움 같은-에게 건네는 정다운 인사 같았다. 자신을 권태로 밀어넣을 감정들을 감추거나 없애려는 것도, 혹은 피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라,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찾아오는 감정들에게 인사를 건네겠다는, 앳된 사강의 자세였다. 그리고 이후 작품으로 사강은 자신의 권태와 잘 공존하고 있다는 안부를 전한다. 사강의 대표작인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중년이 된 사강은 잘못된 선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답을 다시 선택할 수밖에 없는 모순에 빠진 주인공을 이야기한다. 그녀는 틀림없이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고, 진정한 사랑은 다른 곳에 있는데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선택하고야 마는, 그런 모순. 모순에 빠져 자신의 불행을 되풀이하는 주인공을 통해 사강은 그런 이야기를 건네는 것 같다. 우리는 작게 보면 불행하고, 크게 보면 권태로운 선택들을 계속 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선택들로 얼룩진 인생까지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이야기. 이는 데뷔작에서 슬픔에게 건넨 인사의 연장선상에서 읽혔다. 처음 건넨 인사만큼 자신의 인생이 평탄하지 못했을 지라도, 그 슬픔과 고통과 권태의 시간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그 인생은 아름다웠음을 보여 준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환갑이 가까워진 나이에 코카인 소지로 법정에 선 프랑수아즈 사강이 한 말이다. 이 문장을 읽고서는 약물과 차량 사고와 결혼과 이혼으로 얼룩진 사강의 인생을 돌아보게 한다. 사강의 인생을 막연히 불행과 기행으로 가득한, 고통 받는 예술가의 삶이었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저 문장은 그 말이 틀렸다고 말하는 듯하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말은 내가 행복할 권리가 있는 만큼 불행할 권리도 있고, 어떤 선택을 내리든지 그것은 그 사람의 선택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말을 함의한다. 자신의 행복, 성공, 불행, 권태와 모든 감정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누구의 첨언도 필요 없음을, 그 선택이 자신의 파괴로 이어질지라도, 파괴될 것은 나의 육신이지 자유로운 영혼이 아님을. 사강은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 안에는 기쁨도, 슬픔도, 외로움도 있었겠지만 그 모든 것은 온전히 사강의 것이었기 때문에 사강은 삶이 주는 권태에 무너지지도, 그것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 모든 것을 생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그랬기 때문에 프랑수아즈 사강을 ‘이달의 권태인’으로 꼽는 데에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그 자체로도 사강은 우리 권태인들에게 하나의 방향성이자, 이정표이기 때문이다.
*월간 권태 2호 텀블벅
http://tumblbug.com/200506?ref=discover 전여운 | 공상하는 것을 좋아하는 경제학도입니다.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깨달음들을 기록하고,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떠오른 이야기들을 씁니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을 생각들과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쓰는데, 그 글이 독자들에게도 재미있게 읽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