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 휴직은 있는데 효도 휴직은 없나요?
"아가타 씨, 잘 있었어요? 둘째 왔어요."
눈이 보이지 않는 86세의 엄마는 초점 없는 눈으로 한참을 응시한 끝에야 겨우 나를 알아보고 환하게 웃으며 맞이한다. 엄마를 86년 동안 살리던 심장이 이제는 '심부전'이라는 폭탄이 되어 가슴에 장착되었다. 이제는 엄마의 심장이 엄마의 삶을 저울질하며 안타깝고도 위태로운 하루하루를 보내게 하는 중이었다. 지나간 30년 동안 본인은 큰 병 없이 잘 지냈다고 하시지만, 실은 좀처럼 조절되지 않는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이외에도 다리가 부러지거나 팔이 부러지고 동시에 부러진 늑골이 폐를 찢어 장 시간 폐 수술을 받는 등 적잖게 자식들의 염려를 끼치셨다. 8년 전 거동불편이 되어 홀로 살기가 어려워진 엄마를 돌보겠다고 이사와 함께 살고 있는 셋째 딸인 동생이 교육을 간 그 일요일 하루를 돌볼 사람으로 내가 동생 대신 엄마 아가타 씨와 일요일 하루를 함께 하게 되었다. 입맛의 기준이 지극히 주관적인 엄마의 점심은, 즐겨 드시기에 준비한 팥칼국수가 아니라 곰탕이었다. 심장이 나대기만 하고 효율이 떨어지니 마치 고산병을 앓는 사람처럼 두통과 어지럼, 흉통과 무기력을 호소하셨다. 못 먹어서 기운이 없다고 생각하시는지 기운 날 만한 음식을 찾으신다. 도가니탕, 곰탕, 추어탕..... 뭘 요구하시든 당장 대령해야 하니 동생이 얼마나 힘이 들지.
딱 한 달 전쯤 새벽 미사를 마치고 나와 휴대폰을 보니 동생에게서 전화가 와있었다. 아침 6시 반인데 그 시간에 전화가 왔다면 분명 사고발생이다.
"언니, 빨리 좀 와야겠다."
동생의 건조한 목소리 너머에서 쉴 새 없이 떠드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도착한 엄마의 집 창문 너머 마당까지 들리는 엄마 목소리는 분노에 차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한눈에 봐도 밤을 새운 듯 동생의 지친 모습, 검게 그늘진 얼굴로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내는 엄마가 대치하고 있었다.
"저 세 모녀가 작당해서 나를 죽이고 이 집을 차지하려고 하니 내가 죽어줄게!"
납득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말에 잠시 어이가 없었다. 두어 달 섬망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쟤가 의사랑 짜고 지어와서 나 먹인 그 약을 다 달라, 한꺼번에 먹고 죽겠다'는 엄마의 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동생 말에 의하면 '그 약'이라는 것은, 며칠 전 신경과에 모시고 가서 검사하고 치매 초기 진단을 받아 타온 약일뿐이었다. 나는 엄마의 두 손을 잡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로 차분하게 엄마를 진정시켰다. '엄마, 같이 기도 해요'
엄마도 나와 같은 가톨릭 신앙인이지만 실명 직전의 시력저하와 보청기에 의지하는 난청 그리고 거동불편으로 인해 성당에 못 나가시는지 6년 정도가 되었고 결국은 신앙을 잊고 지내왔다. 모시고 가겠다는 말도 거절하던 엄마는 완강하게 거절하고 화를 냈다. '얘가 왜 이래, 너 저리 가라'라고 나를 거칠게 밀쳐 냈다. 나는 엄마의 몸을 끌어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싫어, 나 안 갈 거야. 나 엄마랑 있을 거야' 그리고 계속 기도했다. 거부하던 엄마의 몸에서 서서히 긴장이 풀리면서 엄마도 같이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기도가 끝나자 '나 화장실 간다'며 일어나는 엄마.
"나 느이 집으로 가야겠다. 여기 있으면 죽을 것 같아"
엄마는 갑자기 그렇게 말했다. 동생이 함께 살게 된 이후 8년 동안 단 한 번도 오지 않으셨던 우리 집에 가겠다는 엄마를 보며 놀랍고 당황했지만 일단 병원부터 모시고 갔다. 실은 그때까지만 해도 동생의 말대로 섬망과 망상 증세가 있는 듯 보이니 병원에 입원을 시키자는 생각이었다. 나 역시 당장 출근을 해야 하니 엄마를 우리 집으로 모시고는 가도 돌볼 방법은 없었다. 남편이 왔고 함께 병원에 모시고 가서 신경과 진료를 받았다. 의사는 간밤의 사건을 듣고 일단 치매 증상이 아닐 수도 있으니 대학병원 진료를 받길 권했다. 입원에 대해 문의하였으나 입원을 할 수 없었다. 의사는, 입원을 하면 억제대로 묶어 놓아야 하고 강제로 누워만 있으면 진정제 때문에 호흡이 억제되어 위험할 수 있다고 했다. 동생이 받아 온 '그 약'은 안 드시겠다고 하니 약을 다시 타고 우리 집으로 모시고 갔다. 의사 앞에서도 같은 말을 반복하며 몸서리까지 치는 엄마는 계속 동생을 비난하며 '나를 죽이고 집을 차지하려고 한다'는 분한 말을 쏟아내는 엄마는 영락없는 망상증 환자 같아 보였다. 일단 하루 휴가를 내기 위해 진료소로 가는 동안 언니와 통화를 했다. '이참에 요양원으로'라는 언니의 말이 순간은 야속했다. 그러나 치매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 8년 동안 돌본 딸에게 저주를 퍼붓고 악담을 하는 엄마의 비정상적인 모습이 나 역시 자신 없고 겁이 났던 것도 사실이다. 동생의 말대로 한 밤중에 소리를 지르며 '시커먼 게 들어와서 서 있다'거나 '누가 들어오려고 한다'는 등의 섬망 증상으로 날 밤을 새우게 되면 어쩌지? 대소변 실수를 하면 어쩌지? 음식 투정을 하고 까탈을 부리고 고집을 피우며 나를 힘들게 하면 어쩌지? 그런 걱정을 하다가 '이참에 요양원'이라는 말에 몹시도 부끄럽고 심하게 마음이 따가웠다. 비겁한 나도 실은 이참에 요양원을 생각하고 싶었을 수 있다. 그거였다. '나를 힘들게 하면 어떻게 할까' 결국 나는 내가 힘들면 어쩌나 내 걱정이 앞서 있었다. 자식들은 죄다 그 모양이다.....
8년 만에 우리 집에 온 엄마는 우려와는 달리 그냥 예전의 우리 엄마 그대로였다. 섬망이나 인지저하 증상도 없었다. 편안해하시고 정성껏 해드리는 음식들을 다 잘 드셨다. 낮엔 요양보호사가 우리 집으로 와서 식사를 수발들어 드리고, 저녁엔 나와 남편과 셋이 즐겁게 식사하고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TV를 보며 함께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첫날 하루는 휴가를 냈고 다음 날은 엄마를 모시고 출근을 했고, 주말에는 성당에 모시고 갔다. 집을 나온 엄마를 위해 속옷과 시원한 소재의 생활복, 그리고 예쁜 옷도 두어 벌 샀다. 살이 다 빠져 옷들이 죄다 커졌다고 동생이 한 말이 아니더라도 엄마를 위해 지난 8년 동안 못 해 드려 본 효도를 하니 내게도 기쁨이었다. 도무지 그 어떤 불편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고 평화롭고 편안한 하루하루가 엄마에게도 힐링의 시간이 되고 있었고 동생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분노도 점점 사라졌다.
6년 전 엄마의 팔순잔치는, 오 남매와 배우자들 그리고 손자들까지 모두 모여 가까운 펜션에서 1박 2일 가족 행사를 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영정 사진을 미처 준비 못하여 허둥대고 낭패를 보았던 일이 있었기에 팔십 살이 되었을 때 영정 사진을 미리 준비하자는 의견이 있어서 '독사진' 한 장 찍자고 했지만 엄마는 거절했다. 독사진이 영정 사진이라는 뜻일 줄 어떻게 눈치를 채고 죽으려면 아직 멀었으니까 '이담에' 찍겠다고 하셨었다. 그때 이후 내내 엄마는 죽는 것이 두렵고 죽기 싫고 더 살고 싶다고 하셨다.
주일 미사를 가기 위해 아침 일찍 목욕도 해드리고 머리도 곱게 빗고 내가 사드린 새 옷을 입은 엄마는 그날따라 아주 예뻤다. 6년 만에 성당에 가서 주일 미사를 보시니 표정도 편안해 보였고 기뻐하는 모습이 근사했다.
"엄마 오늘 새 옷 입고 너무 예쁜데 사진 한 장 찍을까요?"
"사진? 왜?"
"오늘 너무 예쁜데?"
"에이, 이담에 찍지 뭐...... 그럴까? 오늘 가서 찍을까?"
내심 놀랐지만 내친김에 남동생 친구가 하는 사진관으로 갔다. 몇 번의 촬영 끝에 자연스럽게 웃는 모습의 사진이 눈에 들었다. 심한 포토샾은 거절하고 사진을 출력했다. '어머니, 장수 사진 찍어 놓으시면 100살 넘게 사시는 거 아시죠?'라는 아들 친구 말에 그저 웃으시는 엄마는 사진을 보여달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사진이 나와? 세상 좋아졌네..... 어디 좀 보자"
그리고는 액자에 넣어 나온 사진을 한참 바라보시고는 미소 지으시며 내게 말했다.
"사진 잘 나왔네. 이거 네가 잘 뒀다가 영정 사진으로 쓰면 되겠다...."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영정사진이라는 말이 엄마 입에서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우리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엄마가 내게 말했다.
"셋째가 나랑 같이 사니까 이대로 내가 죽으면 장로교 식으로 초상 칠 것 아냐. 나는 장로교 식으로 하는 건 싫다. 천주교 식으로 장례 미사하고 연도 받으면서 죽고 싶어. 내가 전에 다니던 성당에 구역회비는 꼬박꼬박 냈지만 미사를 안 나가는지 6년이나 됐는데 내가 죽으면 누가 연도를 해주겠어? 그러니까 너 다니는 성당에 다니면서 기도생활 좀 하다가 나 죽으면 네가 맡아서 이러고저러고 알아서 좀 해야지"
"엄마, 유언하는겨?"
나는 애써 농담으로 대답을 대신했지만 두 눈에서 눈물이 철철 흘렀다. 엄마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우리 집으로 오셨다는 생각이 들어 두렵고 아팠다.
"아가타 씨, 저녁은 뭘 잡술까?"
엄마와의 일요일이 천천히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당뇨가 있으시니 시간에 맞춰 식사를 하셔야 했고 매번 본인이 원하는 음식이 아니면 절대로 드시지 않았다.
"가서 떡국 떡을 좀 사와라. 내가 돈 줄게. 막내가 사다 놓은 저 곰탕 국물에 떡국을 끓여서 먹으면 좋겠어"
"갑자기 떡국 떡을 어디서 사요?"
몹시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당연한 표정으로 엄마는 뻔뻔스럽게 대놓고 당당했다.
"떡집 가서 사 오면 된다"
"떡집이 문 열었을까? 다 팔려서 없으면 어떻게 해? 내일 셋째 퇴근할 때 사 오라고 하고 내일 끓여 달라고 하시지? 오늘은 그냥 어제 사온 도가니탕에 쌀국수 넣어서 헌 번 더 드시지?"
"아녀, 지금 사와. 떡국 먹고 싶어"
"하......."
매 끼니 이런 식이었을 테니 동생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다행히 냉동실에 가래떡이 있었고 그걸 녹여서 썰어서 곰탕 국물에 넣어 끓인 떡국으로 저녁을 드시고 일찍 자리에 드셨다. 동생이 돌아왔고 나는 아가타 씨와 하루 온종일 함께하던 일요일에서 겨우 퇴근할 수 있었다. 너무 좋고 기쁘고 뿌듯하지만 몹시 피곤한 것은 나만 그런 건 아니겠지.
심부전이 더 악화되어 폐에 물이 차기 시작했고 그나마 겨우 세 번 나간 성당도 더 이상 못 나가게 되었고 TV로 평화방송 매일 미사를 시청하고 혼자 기도를 하고 한 달에 한 번 신부님이 오셔서 영성체를 받는 것으로 엄마는 조금 더 퇴행되었지만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지 모를 시간이 안타까워 그날부터 매일 아침 출근길에 엄마 집에 들러 식사하시는 엄마 앞에 앉아 같이 식사 기도를 하고 동생과 수다를 떨고 엄마와 포옹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사랑해요'를 말하고 두 손바닥을 부딪치며 파이팅! 을 하고 나온다. 눈이 안 보이는 엄마에게 한쪽이라도 내 눈을 빌려 주고 싶고, 힘겹게 최선을 다하지만 출력이 시원찮은 고장난 심장 대신 내 젊은 심장을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빌려 주고 싶고, 매일 날이 잔뜩 흐려서 캄캄하다는 실명된 엄마를 휠체어에 태워 이리저리 바람이라도 쐬게 해 드리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 애달프다. 육아 휴직은 있는데 이제 가까스로 일이 년 남았을까 말까 하는 병들고 연로한 엄마를 위한 효도 휴직, 경로휴직은 왜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