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과 자유로서의 예술

하나만을 강요하는 세계에 대한 질문

by ART MEETS YOU


초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은 우리에게 토론 주제를 하나 던졌다.

“친구의 생일에 선물이 중요한가, 마음이 중요한가.”


단순한 질문이었다. 네 개의 분단은 두 팀씩 나뉘어 각자의 입장을 맡아 토론을 벌였다. 중요한 건 ‘무엇이 맞는가’가 아니라, ‘맡은 입장에서 이기는 것’이었다. 어린아이들이었지만 그 세계에는 이미 어른들의 논리와 강박이 스며 있었는지도 모른다.

토론은 격해졌다. 선물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아이는상대방의 실례를 들추며 공격했고, 마음이 중요하다고주장하는 아이는 언성을 높이며 반격했다. 누가 친구 선물을 가져왔는지를 두고 고발하듯 말들이 오갔다.


그 당시 내가 어느 편에 서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나는 두 극단 사이의 어디쯤에서, 어느 쪽에도 완전히 발을 들이지 못한 채 생각의 안갯속을 떠돌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선물은 마음의 표현일 수도 있었고, 내 생일날 누군가가 선물은 없이 마음만 전한다고 하면 나는 그 진심을 이해하면서도 왠지 모를 서운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논쟁이 치달을수록 나는 그 사이 어딘가에 분명 조화로운 지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이 토론은 결국 담임선생님 앞에서 누가 이기느냐의 싸움처럼 변해버렸고, 나는 그 두 극단 사이에서 어느 한 편으로도 옮겨설 수 없는 채, 설명할 수 없는 감정 속에 조용히 잠겨 있었다.



성인이 되어 본 영화의 한 장면이 어린 시절의 그 토론 장면을 강하게 되살려냈다. 다만 이번에는 누가 이기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생과 사를 가르는 극단적 선택의 강요로 그 긴장감이 훨씬 더 극적으로 고조되어 있었다. 『소피의 선택』(Sophie’s Choice, 1982)에서 유대인 여성 소피는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나치 수용소에 도착한다. 장교는 그녀에게 말한다. “한 아이를 선택하라. 그렇지 않으면 두 아이 모두 죽는다.” 결국 소피는 눈물 속에서 딸을 내어주며 외친다. “Take my little girl!” 선택하지 않으면 모두를 잃고, 선택하면 한쪽을 직접 죽이는 셈이 되는 그 순간. 이것은 단지 한 어머니의 고통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에게 가해지는 궁극적인 폭력의 형식이다.


『소피의 선택』(Sophie’s Choice, 1982, dir. Alan J. Pakula)
『소피의 선택』(Sophie’s Choice, 1982, dir. Alan J. Pakula)


이 장면은 겉으로는 선택의 자유가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어떤 선택도 옳을 수 없는 상황이다. 자유의지가 오히려 가장 잔인한 구속이 되는 이 구조는 역설, 즉 패러독스다. 동시에, 선택을 통해 구원을 바랐던 이에게 돌아온 것이 절망이라면, 그것은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코엔 형제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 2007)에서도 편의점 주인이 원치 않는 선택의 게임에 끌려들어 간다. 안톤 시거는 조용히 카운터에 서서 동전을 꺼내며 묻는다.


“앞인가, 뒤인가.”(“Call it.”) 당황한 주인이 묻는다.

"도대체 뭘 거는 겁니까?”(“Look... I got to know what I stand to win.”)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 인생 전체를 겁니다.”(“You stand to win everything.”)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 2007, dir. Ethan & Joel Coen) 이미지 출처: © Miramax Films / P


평범한 일상 속에서 죽음의 확률을 강요당하는 순간, 주인은 던지지도 않은 동전의 결과에 운명을 맡겨야 한다. 이 장면은 전형적인 아이러니다. 죽음이 일상처럼 불쑥 들어서고, 평범한 선택이 삶과 죽음을 가른다는 어긋남. 기대와 결과 사이의 이 끔찍한 간극은 아이러니가 폭력으로 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청준 (1939–2008), 소설가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인간 존재의 본질과 윤리적 딜레마, 침묵과 표현의 경계를 깊이 탐구했다. 대표작으로 『병신과 머저리』,



한국 소설가 이청준의 또 다른 소설에도 이와 닮은 장면이 있다. 밤이면 빨치산과 군경이 뒤섞인 시골 마을에 누군가 불쑥 들이닥쳐 전짓불을 켜고 묻는다. “너는 어느 편이냐.” 질문은 단순하지만, 전짓불의 강한 빛 때문에 오히려 묻는 이의 얼굴은 어둠에 묻혀 식별할 수 없다. 불빛 뒤의 인물이 군경인지, 빨치산인지 알 수 없는 그 불확실성은 곧바로 공포로 이어진다. 침묵하면 의심을 받고, 대답이 빗나가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 만약 질문자의 편을 알 수 있다면 그에 맞는 답을 내놓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 판단의 기준 자체가 사라져 있다. 선택하지 않으면 의심받고, 선택하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함정이다. 명백히 선택을 강요당하는 구조 속에서 인간은 침묵하거나 거짓을 말할 수밖에 없다. 이 또한 선택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만든 역설이다.


삶에는 이런 선택들이 있다. 마음이냐, 선물이냐. 아들이냐, 딸이냐. 앞이냐, 뒤냐. 어느 편이냐. 그 질문들은 겉으로는 선택을 주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강요와 폭력을 내포한다. 선택하지 않을 자유가 사라진 자리에서 우리는 침묵하거나 속으로 무너진다. 그리고 아이였던 나는, 그날 마음과 선물 사이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있었다. 그것이 그때 내가 감당할 수 있었던 유일한 선택이었다.




우리는 왜 항상 한 가지 답을 선택하라고 강요받을까. 예술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진실은, 삶이란 본디 다원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선물도 마음도 모두 소중할 수 있고, 어느 편도 아닌 중간의 자리에도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예술은 그 다양한 자리들을 인정할 때 비로소 살아난다. 그러니 우리는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정말 그것밖에 답이 없나요?


예술은 강요나 편견 없이, 다양한 존재들이 함께 살아가는 가능성을 실험하는 공간이다. 단 하나의 정답만을 요구하는 세계에서 예술이 중요한 이유는, 그 세계와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선택의 강요가 아닌, 선택하지 않을 권리와 더불어 다양한 해석과 감정들이 공존할 수 있는 다원적인 시선에 대해 더 이야기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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