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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잡문

필리핀 북토크를 다녀와서

by 황보름

지난 아일랜드 때부터 현지에서 매일 브런치에 하루를 간략히 요약해 올리고 있다. 지지난 해, 지난 해에 있던 일을 기록해두지 않았더니 기억에서마저 흐릿해지는 게 아쉬워서였다. 그날 바로 올리려다보니 문장도 다듬지 못하고 올리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영 안 쓸 것같으니 이번에도 글을 써서 올렸다. 매일 급급해 올리다보니 다 담지 못한 감정이나 경험이 있어서, 조금 더 써보려고 한다.


1. 이번 필리핀 북투어 제안은 작년에 받았다. 1년 뒤에 있을 행사에 일찍부터 초대를 해주신 거다. 아마도 작년 행사를 다른 나라 일정 때문에 참여하지 못했기에, 이번엔 미리 연락을 주신 것 같다. 그러니까 2025년 9월은 필리핀을 위해 비워두라고. 그렇게 근 20년 만에 필리핀에 가게 되었다. (내 첫 해외여행은 필리핀 보라카이였다. 20대 초반에 마닐라 공항에 도착해 마닐라 거리를 차를 타고 달려본 적은 있었기에, 이번이 나의 두 번째 마닐라이다.)


2. 이번 북투어는 주필리핀한국문화원 분들이 아주 많이 애써주셨다. 보통 해외 북투어를 가면 그 나라의 한국문화원과 연이 닿게 된다. 나도 주스페인한국문화원에서 인터뷰와 사진 촬영을 했고, 주브라질한국문화원에서는 북토크도 했다. (가끔은 한국대사관과 연락이 닿기도 하는데, 아일랜드에선 대사관 분들과 만났다.) 이번에도 주필리핀한국문화원에서 첫날 북토크를 했는데, 이뿐 아니라 문화원 분들은 3일 내내 나와 동행해 주셨다. 세 번의 북토크를 모두 문화원에서 지원해 주신 것 같다.


3. 한국에서부터 동행한 클레이하우스 조땡땡 편집자님은 본인이 이별에 취약한 사람이라고 하셨다. 그 마음이 뭔지 알 것 같다. 아무래도 외국에서 며칠을 함께 한 사람들에겐 어떤 다른 종류의 끈끈함 같은 걸 느끼게 된다. 그래도 이번에 문화원 분들과는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에서처럼 식사와 이동까지 모든 걸 함께 한 건 아니기에 정도는 약할지라도, 그래도 정이 든 건 맞다. 나중에 필리핀에 가면 한 번쯤 다시 보고 싶을 만큼.


4. 마닐라엔 밤 11시에 도착했다. 밤 이동을 걱정하는 우리를 위해 문화원 허 사무관님이 공항까지 나와주셨다. 사무관님이 공항까지 나와주신다는 건 출발 전 날 알았는데, 나는 바로 마음이 무거워졌고, 이 감사함과 죄송함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잠시 고민을 하다가 동탄에 본점이 있는 휘낭시에 전문점으로 향했다. 거기서 휘낭시에를 종류별로 사서 공항에서 만난 사무관님에게 건네드렸다. 사무관님은 우리가 보통 상상 속에서 어렴풋이 떠올리곤 하는'키 크고 하얗고 수줍어하길 잘하는 맑은 청년'의 모습을 하고 계셨는데, 3일 내내 그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해주셨다.


5. 북토크를 할 땐 다니엘 통역가님이 함께해 주셨다. 보통 누군가 영어로 길게 말을 하면 대충만 알아들 수 있는데, 내가 한 한국말을 옆에서 바로 영어로 통역을 할 땐 거의 다 알아들 수 있다. 아무래도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아서일 것이다. 그렇게 들은 통역가님의 영어는 정말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한 말의 요지가 영어로 분명하게 옮겨지는 게 느껴졌다. 그 요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 문장의 순서를 뒤바꾸기도 하면서, 통역가님은 나의 말을 최대한 잘 전달하려 애쓰셨다. 그 모습에 나와 편집자님은 통역가님에게 자주 엄지 척을 해드렸다. 통역가님, 정말 최고시다! 필리핀에서 경영(또는 경제) 학으로 석사 과정을 밟는 분이기에 전문 통역가가 아님에도 한국문화원에서 이 분을 자주 찾는 이유는 분명 있었고, 나이 든 사람으로서(나) 젊은 사람이 멋지게 일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아 자꾸 통역가님을 볼 때마다 엄마 미소가 나오게 됐다. 앞으로 잘 되셨으면. (가끔 통역가님도 헤매긴 했지만 그건 나에게 웃음 포인트일 뿐.)


6. 필리피노는 한국을 좋아한다. 이번 북투어에선 이걸 여러 번 느꼈다. 내가 한국인이니까 일부러 더 좋게 말해준 걸 수도 있지만, 내가 만난 모든 필리피노는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과 자신의 가족들이 한국 문화를, 특히 케이팝, 케이드라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즐겁게 표현해 주셨다. 그들은 당연히 한국 여행을 해본 적 있고, 나보다 한국 연예인을 더 많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한국 문화를 좋아하는 마음 중 일부를 떼어내 한국 문학도 좋아해 주시는 것 같다. 필리핀 서점에 가면 한국 소설만 따로 모아놓은 매대도 있다. 우리나라에도 나라별 책만 따로 떼어놓은 매대가 있긴 하지만, 아직 난 어느 나라에서 한국만 따로 떼어놓은 어떤 공간이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7. 필리핀에서 가장 큰 체인을 가지고 있는 내셔널 북스토어 직원분에게 편집자님이 물었다. 왜 필리핀 사람들이 휴남동 서점을 좋아하느냐고. 직원분이 말씀하신 여러 이유 중 하나가 inspirational이었다. 나는 이번 투어에서 이 단어를 자주 들었다. 당신의 소설은 내게 영감을 줬어요. 영감이란 뭘까, 영감이란 어떻게 주는 걸까, 소설의 어느 부분에서 영감을 받은 걸까. 잘 모르겠어서 오늘도 나는 이 단어를 생각하고 있다. 인스퍼레이셔널. 나의 다음 소설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을까.


8. 나와 편집자님이 묵은 호텔이 있던 지역을 BGC라고 부른다. 통역가님은 이곳을 한국의 판교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했다. 직장인들이 직장을 얻고 싶어 하는 곳. 높은 건물, 넓은 차도, 깨끗하고 치안이 좋은 환경. 이 지역에서 우리는 덜 긴장한 채 쇼핑몰이나 식당을 오고 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모든 건물의 출입구엔 가드가 서 있었고, 특히 입구에선 항상 가방 검사를 했다. 입구만 통과하면 우리가 익히 하는 거대한 쇼핑몰 내부가 나온다.


9. 필리핀엔 건물에 들어서는 손님에게 문을 열어주는 문화가 있는 걸까? 호텔에서 그러길래 호텔의 서비스이구나 했는데, 스벅에 들어가는데도 안에서 문을 열어주었다.


10. 여러 사람에게 여러 번 얘기한 적 있다. 나는 편집자님들과 하는 수다가 제일 재미있다고. 아마 그건 책이나 영화 등의 문화생활에 대해 마음 놓고 떠들 수 있는 사람이 편집자란 생각을 해서인 것 같다. 이번 여행에서도 조 편집자님과 많은 얘기를 했다. 이동하면서, 밥 먹을 때, 맥주 한잔 할 때. 출판계에 대해, 소설에 대해, 글쓰기에 대해. 오래 한국 문학을 편집해 왔던 편집자님에게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았고, 또 어떤 이슈에 대해 편집자님만의 의견을 듣는 것도 좋았다. 그렇게 얘기가 재미있다 보니...


11. 나는 지금 쓰고 있는 소설에 대해 편집자님에게 아주 길~게 줄거리를 풀어놓았다. 걱정하는 마음 때문에 8월엔 거의 책상에 앉지 않았다는 말도 덧붙여서. 편집자님은 내 얘기를 흥미롭게 들어주었고, 재미있을 것 같다고 내 자신감을 살살 올려주었다. 주인공 아내가 너무 평범하게 그려지는 것 같다고 말하자, 그 인물에게서 매력적인 면을 찾아주시는 것 또한 해주었고. 암튼, 덕분에 감사함과 감동에 더해 재미까지 더해진 투어였다.


12. 이런 뜻깊고 감동적인 경험을 하다 보면 욕심이 좀 생긴다. 앞으로도 좋은 글을 계속 써서 이런 경험을 계속하고 싶다고. 하지만 이 욕심이 나에게 부담이 되길 원하진 않기에, 나는 되도록 이러한 경험이 주는 그 순간의 의미와 감동을 마음에 깊이 간직해 놓는 데에서 멈추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간직해 놓은 경험은 언제나 꺼내볼 수 있는 추억이 되어주고, 나는 이런 좋은 추억을 몇 개 간직한 사람으로 나이가 드는 것이다. 지금 나에게 벌어지는 일은 지금의 나에게도 의미 있지만, 할머니가 된 나에게도 의미 있을 것이다. 젊을 땐 그런 일이 있었지, 그런 경험도 했지, 나 참 재미있게 살았네, 하고 생각할 수 있는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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