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31, 34, 35, 36, 37, 38, 39...
합하면 족히 200은 넘을 것 같다.
학교를, 교육을 걱정하고 염려하면서 젊은 시절을 함께 보냈던 선생님들의 학교 근무 연수이다. 오랫동안 한 울타리에서 교직에 몸담았던 선배, 동료 선생님들 7명과 함께 2박 3일의 여행을 떠나기로 하였다. 사전 준비만도 몇 시간의 난상토론을 거쳐서 차량 결정, 식사 문제를 결정했다. 이제 떠날 날만을 남겨두고 기대 반 설렘 반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학교를 하나 세울 정도의 열정이 넘치는 사람들이다. 그러한 만큼 현실의 교육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불만과 불평, 비판이 무서운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에게 갑작스레 다가온 코로나 19.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 4관왕이라는 굿 뉴스에 온 나라가 마치 뽕 맞은 듯이 “아~~ 대한민국”을 다시 외칠 즈음에 신종 바이러스가 봉 감독의 ‘기생충’을 다 삼켜버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코로나19, COVID-19, 우한 폐렴 등의 낯 선 이름으로 우리 곁에 갑자기 다가왔다. 마치 중세의 페스트를 연상하면서 때아닌 까뮈의 <페스트>를 다시 꺼내 읽기도 하면서 코로나 상황이 결코 만만하지 않음을 느끼게 되었다.
독존은 공존의 변형일 뿐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라는 놈에 의해 준비되지 않은 독존의 장막 안으로 모두가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사회적 거리두기 3단계’ 21세기 최첨단의 과학 시대에 작은 미생물에 의해 전 세계가 엄청난 변혁의 시대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제 국경은 무너지고, 지도는 찢어졌다고 할 정도로 세계는 하나가 된 시대에서 우리는 도시가 폐쇄되고 국경이 봉쇄되고 이동이 제한받는 환경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언택트 시대, 이제는 사람과 사람이 직접 얼굴을 맞대어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게 되었다. 학교도 문을 닫고, 상점도 문을 닫고, 갑자기 모든 사회적 활동이 멈췄다. 이런 황당함이란. 37년을 아침이면 눈을 떠서 거의 기계적으로 학교로 향하던 나의 생활도 갑자기 뚝.
첫 번째 선물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자그마한 아파트가 나의 모든 경험의 세계 전부가 되었다. 과연 나는 이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지내야 할 것인가가 또 하나의 과제였다. 명절에도 안 만들던 만두를 빚어보고, 빈대떡도 부쳐서 냉동고에 가득 쟁여보기도 하고, 콩을 물에 불려서 두부도 만들어보고, 새싹 보리 키우기, 수채화 그리기, 데생, 캘리그라피 등등....
물론 손안에 스마트폰의 도움이 엄청 컸음에 감사하면서.
두부와 순두부와 비지를 직접 만들면서 그 차이를 분명히 알게 되었고, 새싹 보리를 키우면서 아들딸 키울 때 아이들의 젖 먹던 표정에서 보았던 이마의 송골송골 땀방울과 같은 새싹 보리의 맺힌 이슬방울을 보았다. 그리고는 기본적인 홈가드닝이라는 것에 빠져도 보고.
아이들에게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그리고 현대 윤리학자 피터 싱어를 가르치던 윤리 쌤에게 숨겨져 있던 이런저런 잔재미에 빠져 사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 있었네?
두번째 선물.
이제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았기에 남은 시간들 최선을 다해서 마무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갑자기 다가온 코로나19로 인한 펜데믹. 나의 작은 계획이 하나씩 소리없이무너지고 있다.
퇴직을 얼마 안 남겨둔 시점에서 나는 퇴직 후에 어떤 생활을 하게 될까? 나름 많은 생각과 준비를 했다. 놀 거리, 취미생활, 인간관계, 그리고 재능기부 등등.
이전에는 학교를 그만두면 학교 밖 세상에서 맘껏 자유롭게 살 거라 꿈꿔왔는데, 모든 공식적인 사회적 활동이 셧다운 된 상황에서 나의 작은 꿈들도 궤도 수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사실 두렵다. 평생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살아온 내가 이제는 가르칠 사람도 없고, 가르칠 공간도 없고. 오직 나를 나만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두렵기까지 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나보다 항상 우리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는 나에게 집중하는 삶을 살고 싶다. 너무 이기적인 생각인가?
‘미니멀리즘’, ‘비움의 실천’
요즈음 핫한 이슈이다.
어느 순간 나는 지금까지 꼭 쥐고 있었던 줄을 놓아버렸다. 그 줄이 집착이었고, 미련이었고, 용기 없음임을 깨닫게 되었다. 전에는 나 스스로 그 줄을 놓아버릴 용기와 결단이 없었다. 그냥 외부적인 어떤 상황이 나의 이 줄을 놓게 만들어 주길 바랬다. 남들은 자녀 결혼, 손자 손녀 돌봄, 남편의 퇴직 등등에 의해 스스로 학교를 떠났다. 이제 나는 나 스스로 나의 인생을 미니멀라이즈 하려고 한다. 정년이라는 생물학적 연령에 밀려서 학교를 떠나기보다 스스로 떠날 때를 정하고 싶다.
원격 수업, ZOOM, GOOGLE 등, 플랫폼에 얹혀 가는 삶. 어쩜 이건 3~40년 전에 내가 꿈꾸던 미래 교육의 모습이었을 수도 있다. 난 대학 진학 때도 시청각 교육학과(지금의 교육 공학)에 관심이 많았었다. 그러한 배경 속에서 나는 교육학과를 지원했었고, 대학원을 갈 때에도 교육 공학을 하고 싶었으나 이미 교육현장에 발을 딛고 난 뒤에, 상담에 더 관심이 생겨 상담 심리를 공부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코로나 아래에서 행해지는 교육이 크게 두렵지는 않다. 하지만 주객이 전도되어 교육의 수단인 TOOL이 교육의 목적 자체인 것으로 착각되고 있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좀 안타까운 모습들이다. 학생들 없는 학교에서, 오직 프로그램에 묶여서 효율성만을 중시하는 공간에서의 삶은 나의 교사로서의 자존감이 조금씩 무너져 내림을 느낀다. 평생을 아이들과의 콘택트 속에서 울고 웃고 하던 나였기에, 언컨택 사회에서의 비대면 교육은 크게 매력적이지 않았다. 이 시간을 1년이라도 연장하는 것은 내키지 않는다.
존버? 영끌?
그래서 뭐가 좋은데? 영혼까지는 내놓을 수 없지.
새로운 세상과 부딪쳐보자.
그것 또한 누구나 겪어야하는 일이라면,
굳이 1~2년이 뭐 그리 대수일까?
아자아자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