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샘 Aug 23. 2023

코너링이 진짜 실력이다.


“1년 앞을 내다보는 사람은 밭에 1년 초를 심고,

10년 앞을 내다보는 사람은 산에 나무를 심고,

100년 앞을 내다보는 사람은 인재를 키운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모교 **여고에 교사로 부임했다. 의사가 육체적 질병을 치료한다면, 교사는 정신적 질병을 치료해 주는 직업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나는 교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학생으로 교복을 입고 매일 아침 다니던 청와대 뒷길 좁은 골목길을 교사가 되어 출근하기 시작했다. 첫 출근 날의 옷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나의 작은 키와 갓 졸업한 애기 선생님의 모습을 감추고, 여고생들 앞에서 좀 더 어른스럽게 보일 수 있게 카키색의 정장을 맞춰 입고 출근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매우 어색하고 촌스러운 모습이었을 것 같다. 나의 교직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잠시 교직에 몸을 담았던 친정아버님은 나에게 ‘선생의 똥은 개도 안 먹는다.’라는 말씀을 종종 해주셨다. 특히나 나는 전공에 따른 책무의식을 가지고, 교과 교사이면서도 항상 학생의 고민을 함께해야 하는 전문가로서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아이들과 함께 울고 웃으면서 아버지의 말씀에 깊은 공감을 하면서 고난의 행군을 시작하였다.


어언 38년.

세월이 너무 많이 흘렀다.

세상도 너무 많이 변했다.

모교에서 30년 넘게 근무하며, 많은 후배 선생님들에게는 귀감이 될 선배 교사로서, 선배 선생님들께는 곁에서 힘이 되어드려야 하는 후배 교사로서, 또한 나를 가르쳐주셨던 은사 선생님들께는 부끄럽지 않은 제자 교사로서의 삶을 위해 열심히 살았다.

첫아이를 낳고 아이가 돌이 되었을 때 나는 교육대학원에 입학했다. 좀 더 나은 교사가 되기 위해, 아이들과 좀 더 가까이 소통하는 교사가 되기 위해 상담 심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현장의 경험과 대학, 대학원에서 배운 내용들을 가지고 나의 이름을 건 책도 출간하여 인세라는 것도 받아 보았고, 여러 교사들 앞에서 강의도 하였다. 나름대로 보람된 삶이었다.


세일즈의 세계에 적용되는 1:250법칙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한 사람을 250명 대하듯 하고, 그렇게 하면 1인의 신뢰는 250명의 찐 팬을 낳게 된다는 내용이다. 역으로는 한 사람의 실망은 250명의 상실과 아픔을 초래한다는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나는 학교에서도 가능한 가장 작은 자, 소외된 자, 그래서 눈에 잘 띄지 않는 학생들과 가까이하려고 노력했다.

이제 이 모든 기억들을 책상 서랍 속의 묵은 편지들과 함께 묻으려 한다. 묻을 때가 온 것 같다. 건강이 허락되고, 여건이 허락되면 정년을 하려고 하였다. 근데 이제는 떠날 때가 온 것 같다. 세월이 바뀌고, 아이들도 바뀌고, 교육 환경도 바뀌고. 하지만 바뀐 교육 환경이 두려워서는 아니다. 난 대학교 때부터 교육 공학, 미디어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사실 대학원도 교육 공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상담에 밀렸었다. 미디어를 통한 교육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러한 미디어 교육을 현장에서 해보고 싶었으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입시의 부담 속에서는 제약이 많았다. 요즘은 코로나 19로 인해 모두가 원격 교육이 보편화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원격 교육 속에서 진행되는 미디어 활용은 질적 가치를 가진 교육 자료로 활용되기에는 준비가 너무 부족했었던 것 같다.


지난 주말에 나는 원격수업에 대한 강의를 거의 하루 종일 들었다. 의무적 연수도 아니었고, 내가 당장 학교에서 적용하게 되지도 않을 거지만, 난 600여 명의 현직 교사들이 Zoom으로 모이는 이른바 Webinar에 참가하였었다. 완전히 자발성 하나로. 오전에는 9시에 시작해서 12시에 끝나는 인문학 강의를 원격으로 듣고, 저녁에는 다시 9시에 시작해서 새벽 1시 40분이 되어서야 호스트가 강제 종료를 시켜야만 끝나는 그런 세미나였다. 참여자들의 열기가 끝나도 끝내지를 못하였다. 나도 후배 교사들의 열기에 감동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듣고 보고 했다. 멀리 떨어져서도 학생들과 이렇게 소통하면서 수업을 할 수 있는 tool의 새로운 세계에 감탄하면서 발언자들과도 채팅으로 실시간 공유하면서 참여하였다. 이제 정년을 코앞에 둔 교사가 이렇게 밤을 지새우면서 이 Webinar에 참여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이제라도 이런 수업을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열망을 잠시나마 갖게 해 주었다. 이러한 열망도 이젠 과욕으로 내려놓고, 뒷사람들에게 모든 걸 내맡기려 한다. 사랑도 내릿사랑이라 하듯이 못 다 이룬 꿈들도 뒤따라오는 후배들의 열정이 이루어주리라 기대하면서.


눈 오는 벌판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발걸음 함부로 하지 말지어다.

오늘 내가 남긴 자국은 드디어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백범 일지 중에서


이상화, 심석희, 곽윤기. 스피드 스케이팅 분야에서 내가 아는 올림픽 메달 리스트들이다. 이들의 실력이 빛을 발할 때는 그들이 코너를 돌 때이다. 우리는 혹시나 삐끗해서 실수할까 염려하면서. 그 순간을 가슴 조이며 바라본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선수들이 출발해서 직선 코스를 달릴 때는 속도에서 크게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승부는 코너링에서 결정 나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자전거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 인생도 그런 것 같다. 100세 시대에 나는 이제 내 인생의 코너를 돌려고 한다. 이 코너를 돌면 나타날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외로움이 나를 흔들리게도 한다. 천 번을 흔들려야 신앙이 된다고 한다. 


하나님, 어쩌면 천 번 보다 더 흔들린 나의 결정에 믿음을 주세요. 생각의 노예가 되면 마음은 생각의 종이 된다고 했어요. 이제는 생각이 아니라 마음의 지시대로 살고 싶어요. 우리의 마음도 신호등처럼, 초록불, 노랑 불, 빨간불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빨강은 멈추세요! 노랑은 생각하세요! 파랑 불은 움직이세요!’


지금껏 멈춰서 생각하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움직일 때인 것 같아요.

내 인생의 코너를 돌아 새로운 주행선으로 진입이다.



작가의 이전글 코로나가 가져다준 선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