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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샘 Aug 25. 2023

아들에게 빚진 자

돌아올 탕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중략)-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태복음 1장 1절~ 16절 >

“너는 내 아들이라,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

찬송가의 한 구절이다.


남편이 어느 날 성경의 마태복음을 읽는데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낳고 낳고를 계속 읽으면서 불현듯 자신도 아들을 낳아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뭔가 마음 깊이 와 닿는 강렬함이 있었다고. 훗날 나에게 해준 이야기이다. 내가 임신인 것 같다고 하고 임신이 확인되었다니까 남편은 분명히 아들이라고 확신하면서 덧붙여 나에게 해 준 말이었다. 난 그때 이렇게 기도했었다. “하나님 저희들이 둘째까지 잘 키울 능력이 된다고 생각하시면 둘째를 허락하여 주시고, 아님 딸 하나로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잘 키울게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길을 열어주세요.”라고.


하나님은 우리 가정에 또 한 번 귀한 선물을 주셨다. 첫째도 너무나 힘들게 기다리다 얻은 딸이기에 우리는 늘 감사했다. 8살 터울의 둘째. 말씀과 함께 우리에게 덤으로 주신 선물이었다. 내 나이 36에 낳은 둘째. 첫째가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을 때의 일이었다. 그 당시로는 매우 노산이었고 당시가 IMF 시절이라 사회도 매우 어수선한 때였다. 딸아이는 동생에게 우유병을 물리고 기저귀를 갈아주면서 동생을 돌보아주었다. 마치 소꿉놀이하듯이. 그렇게 저렇게 아이들은 잘 커주었고, 덕분에 나는 직장 생활도 계속할 수 있었다.


공주와 거지.

우리 집 딸과 아들을 나는 가끔 이렇게 표현한다. 큰 딸은 거의 공주처럼 키웠고, 둘째는 거의 거지처럼 키웠다. 솔직히 말하면 아들은 팬티까지 거의 얻어 입히고 키웠다. 당시 주변에 3살 위 형이 있었다. 그 집 아들은 위로 딸 셋 다음에 얻은 아들이었다. 나는 그 아들의 모든 것을 얻어다 입히고 키웠다. 귀한 자식일수록 막 키우라나? 둘째는 정말 거의 돈 안 들이고 키웠다. 옷도 거의 얻어 입히고, 교육은 거의 EBS와 함께. 할아버지께서 하루 종일 당신 방에서 TV를 틀어놓고 계시다 보니, 손자는 늘 할아버지 곁에서 EBS를 보면서 하루를 보냈던 것 같다. 한글은 한글 자모가 그려진 벽에 붙이는 그림판 하나로 한글을 떼었다. 참 신기했다. 

이렇게 저렇게 아들은 딸에 비해 정말 저렴하게 소박하게 키웠다. 참 감사한 일이었다. 17년 동안 병원 한번 안 가고, 우리가 보기에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한 아이로 자라주어 우리 집안의 기쁨이었던 아들. 하나님이 허락하신 아이라 매사 순조롭게 학교, 교회 생활 잘하고 있었고, 교회에서는 장로의 싹이 보였던 건지 교회 어른들이 꼬마 장로라 부르셨다. 하기야 6살 때인가 캐나다 빙하 체험을 갔을 때 올라가자마자 첫마디가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이렇게 멋진 것도 창조하시고.”라고 하여 나도 놀랬던 기억이 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덤으로 주신 달란트로 미대에 진학할 계획을 가지고 자신의 길을 준비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개학 첫날.

나도 개학을 하여 학교에 출근했는데 멀쩡하던 아이가 머리가 너무 아파 견딜 수 없다며 조퇴를 하였다는 것이다. 아니 어제까지도 아무렇지도 않던 아이가. 감기 증세와 비슷하여 동네 병원에서는 감기 초기라 하였지만, 심한 두통으로 아이는 너무 힘들어하였다. 급히 세브란스 병원에 가게 되었고, 무서운 병명이었다. 뇌수막염. 친한 친구의 딸이 어려서 뇌수막염을 앓고 지금도 몸이 불편하게 살아가고 있는 상황을 나는 오랫동안 지켜봐 왔다. 그런데 갑자기 입시를 코 앞에 두고 한 번의 기회뿐인 실기 시험을 한 달 반 남겨 둔 시점이기에 더더욱 놀라고 당황했다. 팔팔하게 뛰고 운동하면서 입시를 준비해도 모자란 판에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아들을 보면 마음이 너무 답답했다. 등에서 척수를 뽑을 때는 지켜보는 나도 등골이 오싹하다는 표현이 적절할는지. 그 힘들다는 척수 검사를 등 뒤에서 지켜봐야 하는 것은 차라리 내가 대신 하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정말 엄마로서 대신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죄로부터 나온 것 같다는 생각만 들었다.

처음에는 시험을 한 달여 앞둔 상황에서 시험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에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였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잘 못했나요? 저를 벌하시지 왜 아무 죄 없는 아들을 이렇게 힘들게 하시나요? 과연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계신 건가요? 저희가 목표로 하고 있는 대학이 너무 욕심인가요? 그래서 하나님이 미리 이렇게 막으시는 건가요?

하나님의 때는 우리의 때와 다르다더니. 그러나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부터 왜 하필이면 이 시점에 이러한 시련이 오는 걸까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를 묵상하면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특별한 검사 외에는 계속해서 항생제만 맞으면서 지냈기에 정작 아들은 육체적 고통은 없었다. 입시생으로서는 누릴 수 없는 또 다른 호사인가 싶기도 했다. 적극적인 치료가 진행되지 않았기에 하루에 2~3팩 정도의 주사만 맞으면서 추이를 지켜보는 시간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의 고통은 잠재우고 계신 걸까? 만약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시면 저희는 괜찮아요. 생명만 살려주시고 아무 후유증 없이 퇴원할 수 있게만 도와주세요. 주변에서도 엄청 기도해 주시고 염려해 주셔서 다행히 뇌 수막염은 치료가 되어 퇴원을 하였다.


이제 담대히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아들에게 어떤 길을 열어주신다 하더라도 감사히 받겠습니다. 서울대이건 홍대이건 아니면 그 어떤 길을 열어주신다 하더라도 감사히 받겠습니다.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불평하지 않겠습니다. 그 어떤 길도 우리가 뿌린 땀에 비하면 모두가 넘치도록 큰 은혜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돌아온 탕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돌아 올 탕자도 버리지 않고 돌아오게끔 하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과연 나는 이 시간에 이 고통 가운데서 무엇을 생각하고 깨달아야 하는 걸까? 욥의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을 볼 수 있었던 것. 오직 이를 통해 엄마인 나의 죄를 회개하고 도망치지 않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순종의 믿음을 허락하신 하나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모든 고통과 환란도 모두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나를 죄악에서 건져내주시고자 하는 지극히 큰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임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 퇴원할 때 의사 선생님 왈 언제든지 몸이 이상하면 바로 응급실로 들어오라 하신 말씀이 또 현실이 되었다. 갑작스러운 복통을 호소하였다. 다니던 동네 병원에서는 고3병이라고 스트레스 덜 받으라고. 난 그때 알았다. 우리나라에서 많은 동네 병원들은 고3이 아프면 고3병, 중년이 아프면 갱년기 우울증으로 진단 내린다는 것을. 물론 더더욱 전문적인 검사를 하지 않은 상태의 진단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긴 하지만.

이번에는 담낭염. 이게 무슨 일일까? 퇴원하고 일주일이나 지났을까? 담로에 돌이 있어서 그렇게 갑작스러운 복통이 일어나는 거라고. 아이는 가끔 그랬다는 것이다. 배가 너무 아파 죽을 것 같다가도 잠시 후면 아무렇지도 않아서 마치 꾀병 같기도 해서 부끄러웠던 적이 몇 번 있었다고 하였다. 17년 동안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던 아이가 대학 입시를 앞두고 이런 일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생기는 것은 정말 무슨 일일까? 의사 선생님은 낼모레 실기 시험을 앞두고 있다는 우리들의 형편을 아시고, 그냥 수술하자고 하셨다. 쓸개는 없어도 살아가는 데 크게 지장은 없으니까. 고 3만 아니라면 좀 지켜볼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시험 당일에 복통이 또 일어나면 곤란하니까 제거해버리자고. 우리야 의사 선생님의 처방을 따를 수밖에. 개천절인가 한글날인가 휴일이었던 거 같다. 아들은 또 수술대에 올라가서 담낭 제거 수술을 받았다. 아들은 이제 쓸개 빠진 놈이 되고 말았다. 복부에는 붕대를 둘둘 말고 퇴원을 하였고, 복대를 칭칭 감은 채로 며칠 뒤 일산의 KINTEX로 실기 시험을 보러 갔다. 


20014년 가을은 정말 잔인했다. 직장 다니면서, 아이 병치레하면서, 아이 입시 준비하면서 울며 불며 학교를 다녔던 것 같다.

'사건을 섭리처럼'

그 당시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말씀이었다. 도대체, 왜, 하나님은 어떤 섭리를 가지시고 우리 가정을 이렇게 힘들게 하시는 걸까? 내가 지금까지 잘 못 살았다면 나를 치시지 왜 아무런 잘 못도 없는 아이를 이렇게 두 번씩이나 치시는 걸까? 정말 우리가 너무 욕심을 내고 교만에 빠져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날마다 골방에 들어가 나의 죄를 돌아보고 아이에게 평생 미안한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건 아닌지 회개가 절로 나왔다. 나의 교만과 나태함, 불성실함...

정말 하나님은 우리 아들을 분명히 사랑하실 거라 믿었다. 교회에서도 꼬마 장로라 할 만큼, 주일 성수는 물론이고, 아동부 ,중고등부에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왔다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렇다면 과연 이 시련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어쨌든 우리는 참가하는 데 의의를 두고 입시를 치르고 몸을 추스르면서 지냈다. 붕대를 칭칭 감고 실기 시험을 보고, 면접을 보고, 수능을 보고.


12월 6일. 아빠 생일 전날이었다.

침대에 누워서 아들과 둘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최종 발표가 났으니 확인해 보라고.


합격이었다.


그 순간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친할아버지 생각이 너무나 났다.

외할아버지는 당신의 둘째 딸인 내가 매우 똑똑한 줄로 평생 착각하면서 살다 가신, 요즘 말로 딸 바보였다. 그러한 나도 그 대학에는 원서 한번 내보지 못했다.

시아버님은 이 손자를 애지 중지, 거의 노년기를 손자 키우는 재미로 제 2의 인생을 사신 분이셨다. 그 아이의 대학 합격 소식을 보지 못하고 한 해 전에 돌아가셨다. 아마도 이 두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이 손자 자랑에 10년은 더 사셨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우린 힘들었던 2014년 가을, 겨울을 보내고 2015년을 맞이하였다.


아이는 대학에 입학해서 이런저런 모습으로 행복하게 학교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로부터 들었다고. 올해부터는 담낭이 없는 사람은 현역으로 군대를 안 가고 공익요원으로 군 복무를 하게끔 법이 바뀌었다고. 어머나, 하나님. 정말 하나님의 뜻은 우리 인간의 뜻과 생각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다더니...

21일 긴긴 병원 생활로도 해결이 안 되는 병역 문제를 또 한 번의 시련을 주시더니, 3~4일의 입원과 수술로 한 큐에 해결해 주시다니. 사실 아들은 4대 독자이기 때문에 과거에는 병역 면제 대상이었다. 하지만 요즈음은 독자가 너무 흔하다 보니 요건이 바뀐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당연히 현역으로 군대를 갈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또 생각지도 못하던 이러한 일이 생기다니.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다. 이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크고 작게 내려주시는 축복의 사건들을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지금도 두려운 마음이다.


“**아, 너는 내 아들이다.”

나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고통 총량 불변의 법칙.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 똑같은 정도의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주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교만하지도 말고, 나의 고통의 무게가 세상에서 가장 크다는 착각도 하지 말며, 나의 고통과 감사의 시간을 담대하게, 그리고 겸허히 헤아릴 줄 아는 지혜를 주소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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